진실의 힘 인권상을 만들 적에는 작가로서 난처함에 빠지고 맙니다. 예술가의 작품을 기대하는 분들께 막상 나의 예술관은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난해하다 여기실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인권상 후보들의 사연을 배우고 나면 그분들과 함께하기 위해 샘솟아야 할 힘은 어디 가고 작가적 무능력부터 또다시 알아차리게 됩니다. 심지어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는 죄책감은 칼끝이 나를 향하게 합니다.
분연히 일어서 싸우는 분들이 계시는데 나는 그 모습마저 슬프기만 합니다. 독재 시절 경제개발모델의 시혜를 받은 내가 슬픔마저도 이젠 습관이 된 건 아닌지 따져보았습니다. 그런데 따져야 할 것은 슬픔의 당위성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눈물은 피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이번 제9회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대상자의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 같은 단어는 그냥 내리 찍히는 도끼 같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두렵다 하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따져 보고 기억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서로를 외롭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구조적 폭력이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은 정말 놀라운 분들입니다. 살아남은 가족들이 서로 뭉치는 경우는 드물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은 따로 떨어져 울지 않을 것입니다. 정작 고립된 사람들은 인간을 기계부품처럼 소비하고 돈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수치스러워야 합니다. 국가 주도형 경제개발로부터 폭력과 인권유린마저 대물림하는 굴레를 끊어내야 합니다. 다시는 그렇게 헤어지지 않기 위해, 다시는 그렇게 슬퍼하지만은 않겠다고 모인 분들을 위해 이 상패를 만들었습니다.
‘다시는’의 의미를 생각하며 ‘빵과 장미’가 아니라 목장갑과 장미를 떠올렸습니다. 한국의 노동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잘것없는 목장갑. 내게는 그것이 너무 소중하기도 하고 아주 슬퍼 보이는 사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그것의 존엄함을 보호하려는 강인함이 동시에 어른거리기 때문입니다. 유리 꽃을 만드는 과정 또한 비슷했습니다. 유리 꽃은 그것이 불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처럼 피어납니다. 시간이 흐르면 망각과 기억 사이로 흐르는 눈물처럼 그렇게 서서히 식어가는 유리 안에서 영롱하게 멈춘 눈물을 봅니다. 그러나 방심하면 한순간 깨져버리고 말기를 거듭합니다. 인간다움을 보살피는 꽃은 쉽게 피지 않습니다. 다시는 똑같이 세상에 오지 말라며 불꽃으로 태워서 따라 올라간 유리 꽃을 만들고 삼베로 감쌌습니다. 냉소와 싸우고 비관주의를 다시 조직하는 일처럼 이 상패가 눈물과의 거리를 다지는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