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진실의 힘 설립자들” 작은 다큐 상영회
권주현(서울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연이은 과제와 시험으로 지쳐 있었던 시기를 지나 12월 17일에 재단법인 ‘진실의 힘’에서 주최하는 ‘작은 상영회’에 다녀왔습니다. 남아 있는 일정을 보류하고 상영회를 찾은 이유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곳을 찾는 분들의 기억을 함께 느끼는 시간이 저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을 기회를 제공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해 상영회에서 느꼈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기억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상영회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올 해 “진실의 힘 설립자들 – 작은 다큐 상영회”의 주인공은 박근홍 선생님, 박미옥 선생님, 정삼근 선생님, 허현 박미심 선생님, 그리고 심한운 선생님이셨습니다.
지난 겨울 임봉택 선생님의 자서전 『거꾸로 매달아도 사는 게 좋다』에서 선생님께서 직접 써 내려가신 기억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의 재판 자료를 통해 공부했지만, 피해자분들의 기억을 직접 전달받는 것은 자료를 읽는 것과는 매우 다른 감각입니다. 영상 속에서, 그리고 상영회에서 선생님들께서 해 주시는 이야기는 내용뿐만 아니라 전달하는 눈빛과 몸짓에서 역시 그 오랜 시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상의 전반적인 흐름은 재판 자료에서 확인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상영회의 경험은 선생님들이 보내신 ‘세월’을 더욱 폭넓게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많은 것이 재판 자료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재판과 징역 이후 희생자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또 국가 폭력은 희생자의 가족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박미옥 선생님과 심한운 선생님의 영상은 국가폭력이 남긴 상흔이 시공간을 통해 확산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진도 가족 조작간첩단 사건’으로 연행된 이후 7년형을 산 박경준 선생님의 따님 박미옥 선생님은 아버지의 연행 이후 ‘간첩의 딸’이라는 낙인을 견디셨습니다. 남편인 이호창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마주한 편견과 차별의 기억을 담아낸 영상은 고문 피해자 자녀들이 마주했던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드러냅니다. 희생자에게 가해진 폭력은 그 자녀의 삶에서 여러 기회를 박탈하고, 때로는 무력감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조작 간첩 피해자 자녀들에게 놓인 과제는 본인 앞에 놓인 폭력을 극복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풀리지 않는, 부모님의 진실을 향한 과정을 함께하는 것은, 그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일으키는 과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신이 어릴 적 조작된 간첩 혐의로 사형된 아버지의 무죄를 위해 보낸 심한운 선생님의 시간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버지의 사망에 대한 어떠한 정보 없이, 다만 ‘아버지의 무고함’을 간절히 믿을 수밖에 없었던 세월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박경준 선생님과 심문규 선생님의 기억은 본인의 삶뿐만 아니라 자녀의 삶을 거쳐 통해 지속되고, 확장됩니다.
‘고통의 확산’을 마주하면서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적 확산이 매우 강하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남은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면, 그것을 용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죄 판결과 손해배상으로도 결코 보상받을 수 없는 세월의 고통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희생자를 괴롭게 한다면, 가해자를 용서하고 같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종종 증오의 감정이 지니는 파괴력을 목격합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혐오하는 감정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절망적으로 만들곤 합니다. 하지만 고통의 기억을 딛고 증오를 극복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과 원망의 시간을 가지고 ‘나의 삶’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삶은 지속된다.’ 지난 상영회에서 느낀 메시지입니다.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삶을 계속해서 파고들겠지만, 그것을 안고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진실의 힘의 가치에 가까운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강인한 생명력의 감각은, 일상의 작은 분노들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제가 근래에 느낀 감각 중 가장 따뜻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나의 삶에 집중할 것인가?’ 지금부터 제가 고민해야 할 질문이 되었습니다.
한편 고통의 공간적 확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상영회를 시작하자마자 화제가 된 12월 3일 밤에 관한 이야기에서 생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밤, 수많은 시민이 망설임 없이 국회로 달려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과거에 국가가 가했던 폭력과 그 상흔이 고문 피해자 선생님들을 거쳐 우리 사회 전반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고통의 기억은 퍼져 나갈수록 옅어질 것입니다. 12월 3일에 저와 제 친구들이 느꼈던 감정과 선생님들께서 느낀 감정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느낀 감정은 우리의 분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아직 과거의 기억에 대한 세대 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이 존재한다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국가폭력의 아픔이 세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치유되고 있다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과거는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우리가 역사를 통해 마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대에 따라 과거를 느끼는 감정은 다를지라도 과거의 상처는 우리의 상흔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사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진실의 힘의 작은 다큐 상영회에 참여하는 경험이 언제나 제게 큰 보람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에 제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기회에도 선생님들과 우리 사회의 기억을 치유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