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꿈꾸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

-손정운-

수용 상황

어릴 때 집에서는 ‘손정민’으로 불렸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카드 작성할 때도 손정민으로 썼는데 나중에 호적을 보니 이름이 ‘손정운’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형과 누나는 어머니가 데려가고 저는 아버지와 살게 되면서 계모, 아버지, 저 이렇게 셋이 살게 됐습니다. 진주 봉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이사해서 봉래 국민학교로 전학을 해서 다녔습니다. 2학년 마칠 때였는데 아버지와 부산 친척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부산역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화장실 간다 그랬나 잠깐 기다리라고 했는데 어른 두 명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버지 따라서 왔는데 아버지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니까 바로 부산역 앞에 있는 파출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당시 저는 집 주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진주시 장대동 77-24. 함양 사는 할아버지 주소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파출소에서 집 주소를 말했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를 바로 아래 중부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경찰서에서도 “아버지와 같이 왔으니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했지만 그게 다 무시됐습니다. 거기서 또 부산시청으로 보내졌습니다. 사회복지계인가 그렇게 적혀 있었는데 애들이 네다섯 명은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형제복지원 차에 태워졌습니다. 1 톤짜리 탑차 같은 데에 타니 캄캄해서 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내릴 때 문이 열리고 불빛이 확 들어오는데 아주 무서웠습니다. 덩치 큰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딱 서서 내리라고 하니까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더 어린애들은 울기도 했습니다. 왜 왔는지, 어딘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도착해서 들어가니 입고 있던 옷을 ‘형제원’이라고 마크가 딱 찍힌 파란 추리닝으로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애, 어른 구분 없이 신입 소대에 넣었는데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원훈 등을 외우게 했습니다. 못 외우면 구타하고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신입 교육도 받는데 “간부들 말을 무조건 잘 들어야 한다. 도망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소대 생활

1981년인지 기억을 못하는데, 번호 들고 사진 찍을 때 적힌 수용 번호가 81-2623번으로 기억합니다. 신입 소대에서 아동소대로 넘어갔는데 맞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아동소대 조장은 김영환, 그 사람이 “튀김”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목에 화상 흉터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동소대에서 몇 개월 있다가 청소년 소대인 9소대로 갔습니다. 9소대는 형제원에서 제일 똘똘한 애들, 빠릿빠릿한 아이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13살부터 17살 사이 아이들이 있는데 체육대회나 행사를 하면 9소대가 쓸었습니다. 나올 때까지 9소대에 계속 있었습니다.

9소대 침상은 철로 만든 2층 침대가 양쪽으로 한 스무 개씩 있었습니다. 그때는 소대원이 50명은 채 안 된 것 같고 형제원 이름이 찍힌 모포 한 종류를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썼습니다. 겨울에도 다른 이불을 주지 않아서 추웠습니다. 겨울에는 난로 두 개가 있었는데도 추웠습니다. 저는 9소대에서 소지 반장을 했습니다. 소지 반장은 서무 아니면 조장이 시켜주는 것인데, 우리 소대에는 소지가 저 포함해서 3명이고, 주로 청소하고 빨래를 세탁실에 갖다주는 일을 했습니다. 한 소대에 소대장 1명, 서무 1명, 조장 3명이 있고, 그리고 소지 3명이 있는 겁니다.

6시 전에 음악이 나오면 전부 칼같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쭉 복도에 앉아서 소대에서 예배를 봅니다. 서무가 예배를 주도하는데 한 명도 빠지면 안 됩니다. 찬송가 한두 곡 부르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다음 세면을 합니다. 세면을 하고 나면 중대장이 점호를 돕니다. 1소대부터 28소대까지 쭉 돌아앉아서 점호를 하는데, 일렬로 침대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습니다. 소대장 들어오면 번호를 몇 초 만에 순식간에 1번부터 50번까지 대야 합니다. 못하면 맞는 겁니다. 점호 끝나면 아침 밥을 먹는데 ‘선착순’ 있는 날은 그냥 후루룩 마시고 나오는 겁니다. 선착순으로 10등 안에 못 들면 밥은 밥대로 못 먹고, 맞는 거죠. 그런 날이 빈번합니다. 선착순 없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라 편하게 먹습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식당 앞에 줄 맞춰서 서 있다가 올라가는 겁니다. 완전 군대식입니다. 9살, 10살 먹은 애들이 군인처럼 제식 훈련을 받고, 동요는 몰라도 웬만한 군가는 다 압니다. 밥 먹고 나면 각자 철공소, 나전칠기, 낚시공장 같은 공장으로 가고 아동 소대 애들은 학교 가고, 일 못하는 애들은 내무반 청소하고, 대운동장에 가서 제식 훈련도 하고, 놀지는 못합니다. 점심 먹고 오후에 또 일하고 저녁 먹고. 1년 365일 반복이 되는 겁니다. 누구 하나 잘못하면 단체로 맞고, 단체 기합으로 히로시마, 원산폭격 그런 기합을 받습니다. 그게 일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 오늘도 맞는가 보다, 죽지만 안으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맞는 겁니다. 그래도 소대에서는 잠시 휴식 시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조장이나 서무들 눈에 띄면 혼나니까 소대원끼리 길게 얘기를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평생 친구 관계를 맺는 게 어렵습니다. 감정 표현을 하는 것도 좀 부족하고. 학교나 집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친구도 사귀고 어른들하고 관계도 맺고 해야 하는데 눈치 보며 비슷한 나이끼리 단체생활만 한 것이 영향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탈출 실패

84년 인가 9소대 있을 때, 한번 도망쳤습니다. 9소대에서 소지 반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지 반장은 애들보다는 조금 덜 맞고 여유 시간이 조금 있는 겁니다. 소지가 돼서는 청소를 해야 하는데, 내무반 안에만 하는 게 아니라 소대 주위로 삥 돌아가면서 청소 다 해야 합니다. 그나마 소지들은 열외 될 때가 있고, 단체 기합도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망갈 궁리를 할 수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도망가는 애들이 종종 있었으니까 ‘아 나도 도망가면 성공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취침 들어가면 한 사람이 2시간씩, 아침 6시까지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데 불침번 설 때, 화장실을 통해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소대 내 화장실이 재래식 화장실이라 가득 차면 밖에서 퍼낼 수 있게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 철문으로 나가려고 재래식 변기를 깼습니다. 변기 아래로 빠져나가긴 했는데, 문에 고개 내밀자마자 경비한테 딱 걸렸습니다. 밖을 지키는 경비가 있었습니다. 바로 중대장실로 끌려갔습니다. 선도실에서 중대장한테 야구방망이로 맞을 때 쇄골이 부러졌습니다. 맞고 기절했는데 지금도 툭 튀어나와 있습니다. 그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그대로 뼈가 붙다 보니 어긋나 버렸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후에 수술을 해서 이 정도입니다. 중대장 이름이 김광석이었는데 박인근이 직접 임명한 사람입니다. 중대장실에 거기는 야구방망이가 많습니다. 거기서 중대장이 자기 기분에 따라서 애들을 패는 겁니다. 얼마나 끔찍한지 그때 내가 안 죽은 게 천만다행으로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맞고도 의무실에 안 보내줬습니다. 가도 의사는 없이 원생들이 가운 입고, 그냥 배 아프다고 오면 배에 빨간 약 발라주고, 머리 아프다고 오면 머리에 빨간 약 발라주는 끝이긴 합니다.

<형제복지원의 실태를 재현한 모형 작품_한종선>

폭행

소지하는 동안은 좀 나았지만, 그 전 한 3년은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조건 맞는 겁니다. 한 사람이 잘못해도 단체로 맞고. 맞다가 기절하는 애들도 있고. 그 애가 실려 나가면 다음 날 안 들어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소대별로 칠판에 전체 인원, 전원 인원, 퇴소 인원이 몇 명인지 쓰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소대장에게 맞다가 실려 나간 아이가 다음날 퇴소 숫자로 표시됐습니다. 귀가 조치됐다는데 밤에 맞다가 끌려 나간 애가 다음 날 아침에 집에 보내졌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우리끼리는 죽었다고 수군댔습니다. 새마음교회 앞에 무덤이 많은데, 거기에 묻는 거라고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나마 나는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맞았어도 안 죽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지 반장은 좀 열외가 되니 다른 애들보다 덜 맞았지만 그래도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맞는 것을 숱하게 봤어도 도와준다, 마음이 아프다,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일단 살아남으려면 내가 안 맞아야겠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겁니다. 말렸다가는 내가 더 맞을 게 뻔하니까 그런 생각은 사치입니다. 소지 반장은 통솔, 관리는 해도 소대원을 때릴 위치가 아니어서 때려 본 일은 없습니다.

생활

먹는 것은 부실했습니다. 1식 3찬 나오고, 오전 오후 간식으로 동그란 빵 하나에 콩국 한 그릇 나오는데 늘 배가 고팠습니다. 주는 양은 정해져 있는데 다른 먹을 것이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여름 성경학교 하면 사탕이나 하나씩 얻어먹었습니다. 그러니 영양 상태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목욕은 목욕탕에서 일주일에 한 번 했습니다. 소대별로 들어가서 물 끼얹고 쭉 앉아서 때 밀어주고, 또 반대로 돌아앉아서 때 밀어주고, 다시 물 끼얹고 머리 감고 나오는 겁니다. 물을 마음대로 쓰지도 못했습니다. 치약도 없어서 소금으로 이빨을 닦고 칫솔도 모가 완전히 다 누워야 바꿔줍니다. 옷은 봄 여름 가을까지 추리닝인데 여름에는 반팔 하나씩 줬고 겨울은 국방색 바지에, 검은 잠바 하나 줬습니다. 형제원 마크 다 찍혀져 있었습니다. 신발은 거의 고무신 신고 다녔고 양말은 주긴 줬습니다. 제가 나이가 이제 쉰넷인데 또래에 비해 치아 상태가 나쁩니다. 윗니가 거의 없어서 지금은 틀니를 하고 아랫니도 임플란트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 피해자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이가 안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참 자랄 나이에 제대로 못 먹었지, 제대로 치아 관리도 못 받았고, 겨우 소금으로 이를 닦고, 얼굴을 매일 얻어터지니 이가 성할 리가 없었겠다 싶습니다.

교회

교회는 일주일에 삼 일 가지만 일요일은 두 번 갔기 때문에 일주일에 네 번 갔습니다. 그건 무조건 가야 합니다. 교회가 엄청 큰데 전체 인원을 다 앉혀 놓고 임용수 목사가 설교하고, 원장이 할 얘기 있으면 했습니다. 잘못한 애들이 있으면 불러내서 직접 때리고. 박인근이 권투를 했다고 했나 펀치를 잘 날립니다. 그 교회에서 딱 세워놓고 애들을 그냥 때립니다. 완전 인민 재판입니다. 크리스마스 때는 웨하스와 산도, 그 두 가지를 줬습니다. 종교를 강제로 가지게 한 것인데, 지금도 교회라고 하면 무조건 사기꾼 집단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6>

강제 노동

81년도에 들어갔을 때, 산꼭대기에 새마음교회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동소대 몇 개월 있으면서 마대자루를 지고 날랐습니다. 쌀 포대 양쪽에 손잡을 공간만 남기고 흙을 다 채워서 지고 날랐습니다. 물가에서 퍼와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흙이었는데 겨울에 장갑도 없이 마대자루를 잡으면 손이 자루에 얼어붙어서 안 떨어집니다. 억지로 떼면 손 가죽이 벗겨지고 그랬습니다. 운동장에서 새마음교회까지 그걸 들고 하루에 수십 번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 양을 못 맞추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못한 만큼 맞아야 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흙 나르고 토요일은 내무 사열했습니다. 중대장이 소대마다 돌아가면서 내무 사열을 하는데 그날은 소대가 완전히 반짝반짝해야 했습니다. 내무 사열하고 나면 운동장에서 제식 훈련을 무조건 받았습니다. 북한 열병식처럼 각을 맞추고 한 방향으로 가다가 쫙 퍼져서도 가고, 일자로도 가고, 군대식으로 이걸 계속 연습했습니다.

퇴소 경위

형제복지원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서신’ 서식이 있습니다. 그걸 집에다가 보내 준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여기 있으니 와서 확인을 해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거기다 자기 이름과 주소를 쓰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도 그 서신을 몇 번 집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보내줬는지는 모릅니다. 네다섯 번 집 주소를 썼다가 답이 없으니까, 완전히 여기서 평생 살아야 되는가보다 포기하려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집으로 한 번 썼습니다. 그걸 보고 작은아버지가 85년도에 저를 찾으러 왔습니다. 작은아버지 말로는 우리 집에 편지가 온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연락 방법은 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군대보다도 못합니다. 군대는 전화라도 할 수 있지만 형제복지원은 전화도 없습니다. 교도소보다도 못합니다. 교도소는 형기라도 있지만 형제복지원은 언제 나간다는 기약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없어지고 나니까 전국으로 나를 찾으러 다니셨다고 합니다. 고아원이란 고아원 다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이혼할 때도 4남매 중 저를 데리고 가실 정도로 아버지가 저를 엄청 예뻐했습니다(눈물).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3년 넘게 전국을 다니다가 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시골 가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너 때문에 모든 일 포기 하고 전국 고아원이란 고아원을 안 다녀본 데가 없다. 딱 형제복지원만 안 갔다.” 형제복지원은 고아원이 아니었고 부랑인 보호소니까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하셨던 겁니다. 그 이야기 듣고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진짜 가슴이 찢어집니다. 형제복지원만 아니면 이런 일을 당할 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질 일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텐데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가스배달

퇴소해서 함양 작은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나이가 열일곱쯤 됐습니다. 학교라고 다닌 것이 없으니 할 게 없었고 친구도 없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사는 동안에 다 빼앗긴 겁니다. 얼마 있다가 친모가 있는 서울로 갔습니다. 주민등록등본 초본에 어머니 집인 서울 천호동으로 전입한 것이 1985년 10월 30일로 되어 있어서 퇴소한 때를 1985년 7~8월 경으로 생각합니다. 맞으면서 단체생활을 해서 그런가 오래전에 헤어져서 그런가, 어머니와 정이 많이 없었습니다. 누나는 일본에 살고 있고 형들도 다 따로 살고 있어서 어머니 혼자 살고 계셨는데 몇 개월 지내다가 독립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다닌 것이 교육의 전부인데 열여덟 살 나이에 어디 가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는 하지 못하고 스스로 먹고살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18살에 오토바이 면허를 따고 천호동 파일로트 공장 앞에 있는 가스배달소에서 배달을 했습니다. 가스배달일을 5~6년 하다가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에서 우리 집사람(성삼진, 성지민으로 개명)을 만났습니다. 혼인신고를 94년도에 했고, 딸이 95년에 태어났습니다. 97년에 아들 창빈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무렵부터 제 삶이 좀 편안해지고 안정이 됐습니다.

형제복지원 출신이라 이혼 요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형제복지원 방송을 하기 전까지 나는 형제복지원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이 없습니다. 집사람 만났을 때도 안 했습니다. 사람들이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수용소로 알고 있으니 나를 이상하게 볼까 염려됐습니다. 아무에게도 말을 안 했으니 그것 때문에 차별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냥 잊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20014년에 아내와 아이들이 TV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저에게 알려 줬습니다. 부산에 저런 곳이 있었다고. 듣자마자 심장이 멈추고 얼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하기 싫은데, 잊으려고 애썼는데!’ 한참 생각했습니다. ‘밝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집사람과 살면서 언젠가는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얘기를 했습니다. “방송에서 본 것이 모두 사실이다. 내가 거기 출신이다. 아무 죄 없이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끌려 들어갔다”라고 했습니다. 집사람이 “피해자는 전화 달라고 방송에 나왔다”라며 전화해 보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피해자 대책위에 연락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그걸 이해해 주나 싶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데를 가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랑인이 아닌데 왜 내가 부랑인 시설에 있었다는 걸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수십 번을 설명해도 아내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처가에도 내가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결국 그다음 해에 이혼하자고 해서 협의 이혼을 했습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주지 못할까 봐 얘기 안 하고 살았는데 단 한 번 이야기한 것이 이혼을 하는 원인이 된 겁니다. 애들은 나를 이해해 줬습니다. 딸은 헤어디자이너로 일하고 아들은 부산 경성대 앞에 있는 식당에서 셰프로 일하는데 지금도 자주 왕래하며 지냅니다. 내가 배운 것 없이 일하느라 어려웠기 때문에 아이들 뒷바라지한다고 정신없이 2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진상규명의 필요성

집사람하고 이혼하고 나니 내 이야기를 막 내보이고 싶어졌습니다. 우리들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가 없을 테니 제대로 형제복지원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라디오 방송 ‘여성시대’에 사연을 보내서 방송에 나오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 알렸습니다.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기도 하니 쉽게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직장 동료나 주변 사람들은 지금은 저를 응원해 줍니다. 이제는 감추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 조금은 마음의 바윗덩어리를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죄 없는 어린애들, 나이 먹은 사람들, 병자들이 잡혀가서 고통받은 곳이라고 더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미래를 꿈꿔 보는 일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 일은 앞으로 잘 해결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정부에서 제대로 된 사과도 받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위령비라도 세워주고 싶습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다 없는 사람들인데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하고 평생 그 여파를 견디며 살았으니, 그에 마땅한 배상도 받고 남은 인생을 고생 없이 살다 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