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시간
바오밥
귀한 세 달을 보냈습니다. 작업의 공적인 의미를 떠나서 자신에게 그랬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기자로 쭉 해왔는데도, 이번엔 남는 게 달랐습니다. 기회주의적이지 않은 기록 작업을 할 수 있어서 매일 스스로를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었고, ‘123시민’ 38명이 겪은 삶의 면면과 용기를 들으면서는 겸허함을 배웠습니다. ‘언젠간 끝날 이 시간이 참 귀하고 감사하다.’ 퇴근 후 지하철에서 종종 생각했습니다.
123시민은 제가 인터뷰이 연락처를 휴대전화에 저장하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피고인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지난해 12월 3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뛰쳐나간 시민들입니다. 저는 지난 1월 중순 우연한 기회로 ‘진실의 힘 123내란기록팀’에 합류했습니다. 계엄 당일 국회로 나간 시민을 찾고 인터뷰해 그들의 기억과 삶을 기록하고자 꾸린 팀입니다. 자유가 박탈되고 군대가 시민에게 총을 드는 계엄하에 국회로 달려나갔던 행동이 그 자체로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기록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날 군경에 맞선 집단적인 힘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의 기여로 만들어졌기에, 그 한 명 한 명의 존재가 곧 민주주의의 기록이라는 의미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찾을까? 누가 응할까? 몇 명이나 응할까? 끝은 맺을 수 있을까?’ 백지상태였던 처음엔 걱정이 컸지만, 팀에서 머리를 맞대고 하나씩 해가다 보니 점과 선이 그려졌고 어느 시점엔 청사진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언론보도, 각종 SNS, 사돈의 8촌까지 뒤져 1차 명단을 만들고 인터뷰 과정을 설계하고 인터뷰지를 완성한 후, 1월 23일 첫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2월 12일, 기록팀의 내란기록 작업을 공개모집으로 전환하면서 123시민을 더 적극적으로 찾았습니다. 그 결과 300명에 가까운 시민을 찾았고, 현재 기록팀은 300명의 구술기록을 남기는 것을 1차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최근 다른 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한 분을 제외하면 팀에 총 11명의 활동가가 있습니다. 2명은 운영, 4명은 사진, 5명은 인터뷰를 맡고 있습니다. 매일 적게는 1명, 많게는 5명의 시민이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을 찾습니다. ‘당신은 왜 그날 그곳에 가셨나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겪으셨나요? 당신은 어떤 사람이길래 그날 국회에 갈 수 있었나요?’ 이런 질문들을 건네면서 2~3시간가량의 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124분의 구술기록이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두어 달 동안 38분의 123시민을 만났습니다. 38권의 책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당일의 기억과 결의, 국회에서 했던 행동들, 그의 가치관, 그리고 삶의 여정과 굴곡까지, 각양각색의 드라마를 가진 동료시민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다양함 속에서도 똑같이 반복되는 정서가 있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부채감입니다. 어떤 분은 “어떻게 구한 세상인데,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인데”라고 말했습니다. 과거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말하며 눈물 흘린 20대 청년도,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 말하며 목이 메인 50대 남성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길이 이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에 남았던 인터뷰이의 말들이 머릿속을 스칩니다. “저는 살 만큼 살았어요. 후회도 없어요. 죽어야 하면 제가 죽어야죠”라고 했던 A씨, 아들이 눈물로 만류하는데도 다른 부모가 유족이 되게 할 순 없다며 서울로 갔던 10·29이태원참사 유족, 그리곤 “엄마, 살아서 돌아와줘서 고마워”라는 말에 아들을 꼭 안아주신 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지켜온 우리의 자유와 권리인데, 그들에게 절대 질 수 없고 지고 싶지 않았다”는 B씨, 계엄 이후엔 모든 투쟁 현장에서 싸우는 이들이 절대 남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C씨, 그래서 생전 집회 한 번 나가본 적 없지만 계엄 이후 ‘말벌’이 된 C씨, 같은 이유로 비상행동 집회에 자원봉사만 20번 넘게 나갔던 회사원 D씨.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가장 많이 남은 생각은 ‘좀 더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입니다. 많은 느낌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터뷰이들 말 저변에 깔린 따뜻함,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옆집에 사는 것 같은 익숙한 이들의 선의, 종종 마주했던 뜨거운 눈물, 너의 일이 우리의 일이라는, 서로가 서로의 삶에서 은혜를 나누고 있다는 연대감, 그리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자신의 깊은 얘기를 풀어주실까’하는 개인적인 감사함까지, 다양한 기억들이 이리저리 얽히다 결국 더 나은 삶에 대한 생각으로 귀결된 것 같습니다.
이 기록을 어떤 결과물로 남길지 아직 확실하게 정하진 않았습니다. 기록집을 내기로 정했지만, 어떤 출판물로 공개할지,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이야기를 담을지, 그 책으로 어떤 메시지를 사회에 남기고 싶은지 등을 남은 시간 동안 더 논의하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기자로 일을 하게 되면서 4월 초 아쉽게 진실의 힘 생활을 끝냈지만, 쉬는 시간 틈틈이 인터뷰 작업은 이어가려고 합니다. 300분의 귀한 시간, 귀한 얘기들이 헛되지 않도록 기록팀도 귀한 결과물을 낼 수 있길 바라면서, 끝인사는 진실의 힘, 그리고 123내란기록팀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