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칠레 산티아고 시내에서 찍은 포스터 ⓒ박윤주

박윤주 교수 (계명대학교 스페인어중남미학과)

2019년부터 2020년에 걸친 칠레의 사회개혁 요구 시위의 결말은 2020년 10월 26일 국민투표로 개헌이 결정되면서 해피엔딩인 듯 보였다. 770만 명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였고, 78%가 개헌에 찬성했다. 더 놀라운 것은 누가 개헌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국민의 결정이었다. 기존 국회의원이 제헌의회의 50%를 구성하는 안은 부결되었고, 새로운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안이 통과되었다. 칠레 시민들은 피노체트 군사 정권과의 완벽한 결별을 의미하는 새 헌법은 기존 정치 질서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주체들이 작성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듬해 5월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의 결과는 칠레 시민들이 어떤 ‘새 부대’를 원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총 155석 중 17석이 원주민에게 할당되었다. 원주민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현 헌법이 바뀌어야 할 방향이 명확히 드러나는 선택이었다. 당선된 155명 의원 중 77명이 여성이었다. 사회개혁 요구 시위 내내 피노체트 군사 정권의 잔재가 남긴 폭력과 억압에 저항했던 여성계의 목소리가 새로운 헌법에는 잘 녹아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하는 대목이었다. 정부 여당 소속 의원은 불과 37명에 불과했는데 이는 정부 여당이 개헌안에 대한 부결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소속 정당을 분석해 본 결과, 독자 노선을 천명한 후보가 무려 47명이나 당선되면서 원주민 그룹 소속 17명과 함께 제헌의회의 성격을 더욱 개혁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환경운동 단체, 성소수자 단체, 교육 및 보건 분야 등을 대표하는 이들이 선출되어 칠레가 직면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들이 개헌안에 담길 것으로 기대되었다. 국제 사회도 이 제헌의회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칠레의 시도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전망하는가 하면, 양성이 동등하게 대표되는 제헌의회의 탄생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내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개헌안은 2022년 9월 4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절대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의 무려 62%가 반대표를 던졌다. 사실 칠레 개헌 과정을 쭉 지켜본 이들에게 개헌안 부결 소식은 그다지 놀라운 뉴스는 아니었다. 이미 많은 여론조사 기관에서 이번 개헌안에 대한 칠레 국민의 부정적 여론을 전했기 때문이다. 특히 워싱턴포스트에 소개된 칠레 공공연구소(Centro de Estudios Públicos)의 여론조사 결과는 흥미롭다. 이 연구소는 2021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개헌이 칠레인들의 삶이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으로 여론조사를 진행하였다. 답변의 선택지는 ‘나빠질 것이다’, ‘변함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선될 것이다’의 세 개 항목으로 작성되었다. 아래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2021년 조사에서는 답변자의 50% 이상이 새 헌법은 그들의 삶을 개선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2022년 조사에서 새 헌법이 그들의 삶을 개선할 것이라는 의견은 40% 밑으로 떨어진 반면, 개헌으로 상황이 나빠질 것이라고 답변한 이들이 10%에서 35% 정도로 늘어났다. 개헌안에 대한 기대가 1년 만에 우려로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결과였다.

<그래프1. 개헌과 삶의 개선에 대한 인식 변화>

수많은 언론이 칠레의 개헌안 부결 소식을 전하면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가장 손쉬운 분석은 급진적인 개헌안의 내용에서 부결의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헌법 조항이 무려 499개나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기업 구성원 남녀 동수, 난민 강제 추방 금지, 임신 중단 보장, 성 정체성 선택권, 자연과 동물에 대한 헌법적 원리 등 매우 추상적이고 급진적인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었고, 이러한 내용에 대한 저항이 심했다는 것이다. 내용과 무관하게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칠레 언론 지형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칠레의 언론들은 개헌안의 내용뿐만 아니라 제헌의회의 구성원들을 꾸준히 공격하며 개헌안을 전문성이 떨어지는 아마추어 사회운동가들이 만든 황당한 주장으로 낙인찍었고, 개헌안의 내용과 동떨어진 정보들이 여과 없이 유통되면서 개헌안이 부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들은 부분적으로 정확하지만, 부결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특히 개헌안이 급진적이었기에 부결되었다는 분석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분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칠레의 2019-2020 사회개혁 요구 시위에서 제시된 주장들을 살펴보면 개헌안의 내용이 특히 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헌안의 내용은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칠레의 거리에서 외친 구호들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시력을 잃었던 개혁 요구 시위의 결과 탄생한 개헌안이라면 당연히 좀 더 강력한 개혁의 요구를 담아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그때는 급진적이었으나 성공하였고, 지금은 급진적이어서 실패했다는 분석은 어색하다. 개헌안 부결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내고자 한다면, 그때는 왜 급진적이었는데도 성공했으며, 지금은 왜 그 급진성이 발목을 잡게 되었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즉, ‘급진성’ 자체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탓하는 것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회개혁 요구 시위 당시 칠레 언론은 시위 세력을 외부 세력의 영향을 받은 폭도들로 몰았었다. 하지만 칠레 시민들은 보수 언론을 조롱하며 시위대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갑자기 칠레 시민들이 보수 언론의 여론 조작에 속아 개헌안을 거부하였다고 주장하기에는 증거도 근거도 희박하다.

나는 앞서 사회개혁 요구 시위를 분석한 글에서 사회개혁 요구 시위의 성공이 사회개혁 세력의 성공적인 전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분석틀로 개헌안 부결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개헌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냈던 칠레의 사회개혁 세력은 어떻게 그들의 요구를 담은 개헌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들이 거리에서는 성공하고 국회에서 실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2019~2020년 칠레의 사회개혁 요구 시위는 다양한 시위대의 주장이 칠레 사회 구성원들이 납득할 만한 거대한 사회적 요구로 승화되는 과정이었다. 성평등, 환경권 보장, 원주민 권리의 회복, 다양한 차별과 혐오 철폐의 요구는 이러한 가치들을 막아서는 피노체트 군사 정권의 잔재를 극복하자는 목소리로 승화되었다. 피노체트 독재 정권의 잔재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 쓰일 헌법에는 칠레 시민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여러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생각들을 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들이 제헌의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당연하였고, 칠레 시민들은 그들에게 투표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제헌의회 구성 이후 나타났다. 칠레의 여러 분야를 대표하는 제헌의회 입법 의원들은 분야를 넘어 소통하지 않았다. 각각 스스로가 대표하는 사회 분야의 요구를 개헌안에 담는 것에 최선을 다하였다. 환경 분야의 입법을 담당하는 의원들은 원주민들의 권리에 관한 안을 작성하는 이들과 소통하지 않았고, 성평등을 담당하는 의원들은 노동을 담당하는 의원들과 소통할 기회가 없었다. 각자 자신들의 분야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개헌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나 모두가 함께 고민한 일관성 있는 개헌안 도출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각각의 분과 내에서조차 소통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아쉬운 것은 소수이긴 하지만 보수적인 시각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개헌안 작성 과정에서 소외되었다는 점이다. 몇몇 의원들은 개헌안 부결 이후 보수성향의 입법 의원들의 의견을 경청했더라면 개헌안을 좀 더 수정하여 부결을 막았을 수도 있었다며 후회하였다. 거리에서 표출된 더 다양하고 더 급진적인 요구도 칠레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거대한 하나의 의제로 묶어내는 저력을 보여주었던 칠레의 개혁 세력은 막상 개헌안 작성의 과정에서 그 능력을 상실해버린 듯했다. 여러 사회개혁 세력들이 조각조각 각자 만들어 낸 개헌안은 거대한 대의를 대표하는 개헌안이 아니라 여러 이해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헌법에 담기에 급급했던 시도로 폄하되었고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의 공격에 취약해졌다.

결국 칠레의 개헌안은 부결되었으나, 유토피아적인 개헌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좋은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좋은 생각이 성공적인 정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한 분야에서의 좋은 생각이 다른 분야에서의 좋은 생각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가 공감하는 좋은 생각이 그 사회 모두의 좋은 생각으로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좋은 생각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완벽하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생각이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믿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칠레 개헌안 부결은 좋은 생각이 그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 안에서만 유통될 때, 다른 좋은 생각과 만나지 못했을 때, 무엇보다도 그 좋은 생각을 아직도 미심쩍어하는 사람들과 충분히 생각을 나누지 못했을 때, 아무리 좋은 생각도 성공한 정책이 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준다.

하지만 좋은 생각을 성공한 정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칠레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칠레 개헌안 부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칠레 국민의 76%가 개헌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응답하였다. 보리치 대통령은 개헌안 부결에 대한 국민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성명을 내고 개헌을 위하여 정당들과 협력할 것을 천명하였다. 정당들도 곧바로 협상 절차를 시작하며 개헌 절차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다시 개헌 절차가 시작되었다. 국회가 선임한 전문가들이 작년 말 국회에서 합의된 12개 분야에 대한 1차 개헌안을 3월 6일부터 3개월 동안 작성하기로 하였다. 법률 지식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았던 지난 제헌의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14명으로 구성된 기술위원회가 전문가들의 활동을 모니터한다. 시민들은 5월 7일 50명의 입법 의원으로 구성된 제헌의회를 다시 선출하는데, 이 제헌의회는 전문가들이 6월까지 만든 1차 개헌안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한다. 최종 개헌안은 12월 7일 국민투표를 통하여 확정될 예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제헌의회가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지난 개헌 과정에 비하여 이번 개헌의 과정은 좀 더 제도적이라는 평가받는다. 혹자는 개헌의 과정이 보수화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이 새로운 개헌 절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전문가위원회의 의장으로 중도좌파 정당이 추천한 무당파의 베로니카 운두라가라는 변호사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의 선출이 좋은 생각을 성공한 정책으로 만들기 위한 긍정적인 신호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칠레가 2019년 거리에서 시작된 개혁의 노력을 지금도 계속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법으로 극복하는 실험 그리고 좋은 생각을 성공한 정책으로 만드는 노력에 칠레는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칠레의 노력은 그래서 고마운 사건이다. 부디 칠레가 거리에서 외쳤던 수많은 좋은 생각들을 성공적인 정책으로 좋은 헌법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3회에 걸쳐 칠레의 개헌 과정을 살펴보는 작업을 마무리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칠레의 소중한 노력을 행여 부정확하게 전달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군사 독재와 민주화를 거쳐 신자유주의를 뚫고 사회개혁 요구 시위를 일궈낸, 그리고 그 결과물인 개헌을 목전에 둔 칠레로부터 지금의 우리가 배울 것이 참 많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3회에 걸쳐 지면을 허락해주신 <진실의힘>에 감사하며 저자의 확신이 독자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닿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