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다궁.광장 왼쪽에 아옌데 동상이 서 있다. ©조용환,<안데스를 걷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진실의 힘 뉴스레터를 통하여 칠레의 사회 개혁 요구 시위와 그 뒤를 잇는 개헌의 노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칠레의 사례를 잘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이해하고 심지어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뜬금없이 왜 칠레의 개헌 시도를 살펴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아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칠레는 너무 멀리 있는 나라이고, 그 생경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거실의 TV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설명하거나 심지어 그 혼란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레의 사례, 특히 꽤 오래 진행된 칠레의 개헌을 위한 노력과 그 노력의 부분적 성공, 나아가 얼마 전 들려온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 부결의 소식은 한 사회가 변화하는 방식, 그 노정에서 일어나는 저항, 나아가 이를 극복하는 공동체로서의 역량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칠레는 먼 국가이다. 하지만 그렇게 멀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치게 지금의 문제에 몰입한 우리에게 잠시 현실과 거리를 두고 우리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한다. 머리가 복잡하니 TV를 끄고 먹방을 켜는 것보다는 TV를 잠시 끄고 칠레의 노력과 좌절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현실과 잠시 거리를 두되 애정과 관심을 멈추지 않는 괜찮은 방법이 되어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박윤주 교수 (계명대학교 스페인어중남미학과)

TV를 켜기가 두려울 정도로 뉴스는 혼란스럽다. 각자가 서 있는 정치이념의 스펙트럼이 어디인가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혼란스러운 시절이 시작된 듯하다. 앞서 옳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죄악시되고 다 같이 추진하자고 했던 것들이 부정된다. 예컨대, 이전 정부에서 원자력 발전 관련 정책을 정했던 방식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은 놀라운 지경이다. 이해관계자, 전문가, 일반 시민 등의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기 위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했다는 사실은 지워진 듯하다. 이 위원회는 시민 참여를 통한 숙의 끝에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재개하되 원자력발전 비중을 축소하는 에너지정책을 추진할 것을 권고하였고, 정부는 시민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원전 정책을 마련하였다. 당시 이 과정은 정치적 후유증을 최소화한 정책 결정 방식이지만 탈원전 공약 이행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공론화위원회의 활동, 그리고 전 국민에게 생중계된 토론회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은 듯하다. 3개월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내려진 원자력발전 비중 축소 결정은 특별한 공론화의 과정 없이 폐기되었다. 원전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한 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정이 이렇듯 쉽게 뒤집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떻게 결정되고, 그 결정은 또 어떻게 구성 혹은 재구성되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갖던 중 칠레에서 개헌안 국민투표 부결의 소식이 전해졌다. 2019년 10월부터 5개월 간 칠레는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을 경험하였다. 중고등학생들이 조직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 반대 시위는 곧 전국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시위로 확대되었고, 여성, 원주민, 학생, 교사, 노동자, 연금생활자등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사회문제의 해결을 촉구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들은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 청산이라는 공통의 목표로 모아졌다. 그리고 대표적인 독재의 잔재로 여겨지는 1980년 신헌법 (이하 1980년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의 제정이라는 구체적인 요구가 다양한 시위참여자들의 의견을 아우르는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요구는 칠레 정치권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이후 개헌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약 80%의 찬성으로 개헌과정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개헌을 위한 제헌의회도 구성되었다. 여성, 원주민, 학생, 노동자 등 칠레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이들이 입법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국내외 언론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사회변혁을 제도화하는 칠레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범한 제헌의회가 내놓은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약 62%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미 여론조사 결과 부결은 예상되고 있었지만 막상 결과를 받아 들고 보니 여간 허탈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거의 80%의 국민이 개헌을 하자고 했었다. 그런데 다시 60% 이상의 국민들이 개헌안을 부결시켰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한번 민주 사회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칠레의 다양한 사회 세력이 헌법이라는 공간을 두고 벌이는 갈등과 협력, 투쟁과 타협의 노력을 살펴보는 것은 앞서 언급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성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법은 모든 사회에서 버팀목이 되어준다. 우리에게도 헌법은 각별하다. 우리의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문구는 영화 대사로 활용될 정도로 익숙하고 동시에 우리가 정치라는 영역에 기대하는 바를 상징한다. 헌법을 통하여 국가의 성격, 민주주의의 내용, 중요한 권리들에 대한 원칙을 세운다는 점에서 칠레와 우리는 닮았다. 하지만 칠레에게 헌법은 단순히 사회를 구성하는 대원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칠레의 헌법은 말 그대로 칠레의 역사를 거쳐 계속되어온 칠레 시민들의 투쟁과 성공 그리고 좌절과 극복의 기록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칠레 역사상 최초로 선거로 선출된 사회주의 정부였던 아옌데 정부의 헌법 개정이다. 노동자와 농민 세력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아옌데 정부 하에서 칠레 하원은 외국 자본의 구리 대광산 지분을 국유화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하는 헌법 수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이날을 칠레의 두 번째 독립기념일이라고 선언하며 칠레가 마침내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 냈다고 천명하였다. 아옌데 정권을 탄생시킨 노동자·농민과 함께 외국 자본의 착취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수많은 시민들의 의지가 헌법에 반영된 순간이었다.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아옌데의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나, 구리 대광산 국유화의 기조는 유지되었다. 피노체트의 이러한 결정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으나,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어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안의 역사적 무게는 아무리 강력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

1980년 피노체트는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제1조에서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며 존엄과 권리를 갖는 존재로, 가족을 사회의 근본적 핵심으로 천명한 1980년 헌법은 제4조에 가서야 칠레가 민주 공화국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게다가 제9조에서는 모든 종류의 테러리즘을 본원적으로 반(反)인권적 범죄라 규정하고, 테러리즘으로 규정된 범죄는 정치적 범죄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당시 피노체트 정권이 민주화 인사들의 시위와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테러리스트는 정치범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한 이 조항은 대표적인 악법이며, 지금도 칠레 원주민들의 투쟁을 제어하는 도구로 소환되고 있다. 하지만 1980년 헌법도 칠레 사회 세력 간의 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1980년 개헌안의 통과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온전히 민주적으로 치러지지 않았다는 여러 가지 정황도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아옌데의 사회개혁에 반발하여 강력하게 연대한 칠레의 자본, 군부, 그리고 이후 이들과 결합한 중산층들의 의지가 피노체트 정권의 탄생과 1980년 헌법의 제정까지 이어졌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2019년 10월부터 칠레를 뜨겁게 달궜던 시위대의 사회 개혁 요구는 1980년 헌법을 개헌하라는 요구로 모아졌다. 시민사회세력들이 고발한 다양한 사회문제의 공통된 원인으로 청산되지 않은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잔재가 지목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헌 요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다시 한 번, 칠레 사회 세력의 의지가 헌법에 반영될 것이 예고되었다. 아옌데 정권 하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이들과 결합한 반외세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헌법의 수정 논의를 주도하였고, 피노체트의 독재 하에서는 자본, 군부, 그리고 이들과 결합한 중산층의 의지가 신헌법의 근간이 되었다면, 2019년 터져 나온 개헌 요구는 그동안 칠레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여성, 원주민, 도시 빈민, 학생, 그리고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기반을 둔다. 이렇듯 칠레 헌법의 변화는 그 진보 혹은 보수적 색채를 떠나 언제나 칠레 사회의 사회 세력 간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칠레에서 언제 어떤 세력이 어떻게 헌법을 수정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칠레의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헌법이라는 공간을 주도하기 위하여 성공과 좌절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차분히 복기하다 보면, 우리의 사회 세력들 간 관계를 돌아보고 나아가 우리의 성공과 좌절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두 번의 연재를 통하여 최근 칠레에서 있었던 개헌 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글에서는 2019년 칠레의 뜨거운 여름, 그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도시를 점거하고 외쳤던 다양한 요구들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또한 그러한 요구가 개헌의 시도로 이어지는 과정을 소개할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칠레 개헌 국민투표 부결을 살펴볼 것이다. 부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개헌의회의 활동 그리고 개헌안의 내용 등을 분석해보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한 사회의 기대가 좌절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좌절을 다시 극복하는 여러 가지 노력과 성과 또한 조망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