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회사원)
흔히 역사를 높은 곳에서 아래로 향하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의 힘>에서 지난 12월 발간한 『내란의 밤, 시민의 기록』은 그 문법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이 책은 관찰자의 세련된 언어를 버리고, 그 밤,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서 각자의 공포와 용기를 확인해야 했던 시민들의 날것 그대로의 육성을 선택했다. 얼마 전 개봉한 12.3 관련 영화가 웅장한 음악과 긴박한 편집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면, 이 책은 그러한 소음을 걷어낸 후 남은 개개인의 떨리는 숨소리에 집중한다.
- 이름 없는 이들의 옴니버스 연극
‘시민 기록물’로서 이 책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시작된다. 아이를 재우다 TV 자막 보고 얼어붙었던 누군가의 거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헬기 소리에 옆 사람과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던 한밤의 거리, 그리고 국회 담장 넘는 군화 소리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던 어느 복도까지. 이 책은 정교하게 설계된 옴니버스 연극처럼, 각자의 공간에 있던 주인공들이 하나의 ‘광장’으로 수렴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313명의 서로 다른 시선이 겹치고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서사는 그 어떤 치밀한 각본보다 극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감동은 마지막 챕터인 ‘12.3 시민 313인이 전하는 한마디’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앞선 기록들이 그날의 긴박한 타임라인을 쫓았다면, 마지막에 배치된 이 짧고도 강렬한 고백들은 마치 연극의 마지막 무대에서 모든 배우가 나와 관객의 눈을 맞추며 건네는 독백과 같다. 313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가 ‘우리’라는 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구성의 절묘함. 그것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다채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 숫자로 읽는 심장박동
이러한 감동과는 별개로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개인의 증언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정교한 통계와 도표들이었다. 자칫 파편화된 기억의 늪에 빠질 수 있는 독자에게 데이터는 흔들리지 않는 북극성이 되어준다. 여기서 통계는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다. 몇 시에 시민들의 연결망이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는지, 어떤 단어들이 절박하게 공유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들은 그날의 긴박함을 입체적으로 조각해 내는 도구가 된다. 텍스트가 심장의 온도를 전한다면, 도표는 그 숨결들이 만드는 거대한 파동의 궤적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다. 논리가 감성을 붙들고, 숫자가 감정을 증언하는 이 기묘하고도 완벽한 조화. 이러한 지점이 바로 이 책을 단순 증언집이 아닌 ‘입체적인 시민사’로 격상시키는 요소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의 힘>이 그간 벼려온 집요한 경청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간첩조작 사건에서부터 세월호까지, 권력의 언어를 걷어내고 오직 사람의 언어에만 몰입해 온 그들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이 책에 엑기스처럼 녹아 있는 것이다. 국가 폭력의 그늘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며 일어선 이들이, 이제는 다른 이들의 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진실의 힘>이 보여준 이 집요한 기록 정신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이 지켜낸 이 목소리들이 우리 민주주의의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우리가 서로를 지켜냈던 그 아름답고도 치열했던 밤에 대한 가장 완벽한 헌사
잉크로 새긴 우리 모두의 밤. 『내란의 밤, 시민의 기록』은 묻는다. 당신은 그 밤 어디에 있었느냐고. 그리고 책장을 덮으며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 밤의 주인공은 단상 위의 정치인이 아니라, 추위와 공포를 뚫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평범한 우리 모두였다는 것을. 숫자가 길을 내고 313명의 목소리가 대미를 장식하는 이 특별한 기록은, 우리가 서로를 지켜냈던 그 아름답고도 치열했던 밤에 대한 가장 완벽한 헌사다.
지난해 12월 3일 이재명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12.3 내란의 밤을 국민주권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기념일로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아직 입법 절차가 남아있기는 하나 그 밤 시민들의 용기와 행동을 기리려는 정부의 시도는 반갑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리는 방식이 박제된 식순에 갇히는 대신, 이 책이 보여준 시민의 서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풀어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기념일이 국가가 만든 ‘그릇’이라면, 이 책에 담긴 시민들의 육성은 그 안을 채울 가장 생생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날 거창한 기념식 대신 이 책을 바탕으로 광장 전체를 무대로 삼는 대규모 옴니버스 공연을 펼친다면 어떨까. 굳어버린 동상이나 비석 대신, 시민들이 직접 무대 위로 올라 그날의 공포와 환희를 다시 몸짓으로 풀어내는 그러한 풍경 말이다. 책 속의 증언들이 대사가 되고, 도표의 수치가 조명이 되어 광장을 비출 때, 12.3 내란의 밤은 비로소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가는 미래의 첫 문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