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
아내, 딸과 함께 처남이 사는 미국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약 3개월 전부터 여행계획은 두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은 상태였는데 나는 동부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일정을 포함시켜 달라는 부탁을 했다. 처남이 사는 L.A.에서 동부까지는 비행기로 6시간, 시차가 3시간 나는 장거리라며 딸과 아내는 L.A.에 남겠다고 했다. 내가 50년 전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니 아내가 마음이 상했을까 싶어 물어보니 아니라고 한다. 리치먼드 가기 전에 뉴욕을 들르자고 설득해서 온 가족이 같이 가기로 했다. 어차피 L.A.에서 리치먼드까지는 직항이 없어 뉴욕이나 워싱턴을 경유해서 가야 했다.
뉴욕 일정을 마치고 리치먼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의 고속버스보다 좌석이 좁고 불편한 비행기는 한 시간 이상을 날아 리치먼드 공항에 도착했다. 1975년에 마지막으로 만났고, 3년 전 한국에 왔을 때 잠깐 봤던 친구는 마치 어제 보고 오늘도 보는 사람처럼 나를 맞았다. 아주 침착한 표정으로. 내 아내가 있어서 그랬을까? 그런 것 같았다. 짐을 싣고 공항 주차장을 나오는데 출구를 놓쳐 두 번이나 헤맨 끝에 겨우 빠져나왔다. 태연한 척 하기는...
담장이 없이 키 큰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전통적인 미국식 주택에 들어서니 친구의 남편이 반갑게 마중을 나왔다. 친구는 나와 동갑이고 그는 82세. 독일이 고향이고 미군 장교로 복무하다 퇴역을 했고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문득 일가친척 없는 먼 곳에서 몸이 불편한 남편을 뒤치다꺼리 해야 하는 친구가 안쓰러웠다. 남편에게는 나를 사촌이라 했다고 한다.
우리 둘은 장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었다. 1975년 1월,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2월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후,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했다. 친구는 방황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취업 사기를 당해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을 떠날 때 우리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들렀는데 어머니가 한복 한 벌을 마련해 주셨다고 했다. 50년 가까이 보관하던 한복을 보여주는데, 자식에 대한 아픔을 가슴에 안고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때 용기를 내서 참고 너를 기다릴 걸 그랬어.” 라고 친구가 말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바깥만 내다봤다. ‘이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지금을 살고 있을까? 나도 물론 힘들었지만 자기가 훨씬 더 아팠을텐데. 내가 먼저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3박 4일을 함께 하고 L.A.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워싱턴에서 탔다. 친구는 두 시간 거리를 운전해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짐을 내려놓고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며칠 만에 용기가 생겼는지 친구가 한 번 안아보자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었다. 말로 못했지만 헤어진 지 50년이 흘러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했고, 남은 삶을 잘 살아가자는 다짐을 했다. 친구가 아내에게 “함께 와주고 나를 거두어주어 고맙다”고 주제넘은 참견도 했다. 그렇게 또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헤어졌다. 우리의 평범했던 삶을 이렇게 박살 내놓은, 그리하여 막강의 권력을 누려왔던 그들은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더 얻게 되었을까?
귀국해서 시차 적응도 안 되고 기온 차이도 커서 컨디션 조절이 힘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12월 3일. 밤에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전화기 알람이 울린다. 대통령 심야 긴급 담화를 한다고 떠서 급히 TV를 켰다. “국회가 패악질을 하고 종북좌파 세력들이 준동을 하고…”
왜 이 시간에 저런 내용의 담화를 하고자 했을까? 갸웃거리며 보고 있었지만 바로 뒤이어 나온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말은 잘못했거나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담화 내용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홧김에 막말을 하는 잡배도 아니고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공정과 정의가 바로 서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등등의 소리를 기회 있을 때마다 떠들어 댔고, 전직 법을 다루던 사람이 이렇게 한다고?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선을 지나치게 넘었다 싶었다.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라며 긴급조치와 계엄을 입에 달고 살았던 박정희와 국가의 위기를 본인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으려 계엄을 이용했던 전두환. 그 더러웠던 기억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우리 세대는 45년 만의 계엄이 엉뚱하기도 하지만 공포스럽기도하다.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어지는데다, 정신과 의도가 올바르지 않은 자가 자루를 쥘 경우 더욱 혼돈스러울 테고 피해는 항상 국민들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12월 14일 지방에 있는 친구들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집회에 참석해 밤을 세우고, 다음 날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특별한 일을 하고 온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어디 잠깐 다녀온 듯 담담한 표정이어서 은근 놀랐다. 무용담이라도 늘어놓으려나 했는데 말이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날아다니던 70년대 나의 대학생 시절의 데모와는 너무나 다른 요즘 세대들의 시위 모습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온 나라가 휩쓸려 돌아가는 이 혼란의 소용돌이가 하루빨리 진정되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지만 쉬워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의 뜻이라면”하면서 하야를 선언하고 떠난 이승만 대통령이 그런대로 젠틀했던 건가? 왜 저리 지도자 답지 못한 변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걸까? 아직도 사태를 마무리하기에 시간이 더 필요해 보여 참으로 답답하다. 계엄이 여기에서 멈추어 선 것이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지금 세대들은 알까?
독재자의 총칼에 사망자가 200여 명에 가까웠던 4.19 혁명, 바로 뒤 5.16 군사쿠데타로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2024년 현재까지 있었던 모든 계엄 사태를 보았고 겪었던 나로서는 이 상황이 낯설지도 않지만 적응도 어렵다. 다만, 수많은 희생자와 피해자를 낳았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그나마 이 정도에서 폭주를 멈추어 세운 위대한 민중의 힘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정말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