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수많은 장면이 머리를 스치면서, 괜히 ‘내가 잘 살았나’ 반추해보곤 합니다. 2019년은 결코 쉽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잘 살아 온’ 진실의 힘의 10주년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존재는 든든한 버팀목, 후원회원님들이었습니다. 국가폭력 피해자의 삶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그 피해자들이 만든 '진실의 힘'이라는 공간에 깊은 애정을 끊임없이 길러다 준 후원회원들의 고마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이번 송년모임은 10년 후원회원님들을 위한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2009년 이제 막 발을 디딘 진실의 힘에 손을 내밀어 준 김성일, 유현미, 최영아, 민원식님이 참석했습니다. “나도 국가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후원을 시작하고, 처음 행사에 참석한 민원식님. ‘마이데이’ 현장에서 선생님들의 얼굴을 스케치하던 유현미님, 진실의 힘에서의 자원활동이 인생의 또 다른 시작점이었다는 최영아님, 10년간 멀리서 마음을 포개었다는 김성일님입니다. 진실의 힘이 출간한 <안데스를 걷다>의 표지이자 조용환 변호사님이 직접 찍은 페루의 일곱 색깔의 산 비니쿤카(Vinicunca)의 풍경에, 감사의 인사를 담아 낸 액자를 선물해 드렸습니다.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10년 후원회원님들께도 보내드릴 작은 선물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잠시 집을 비우는” 송소연 이사님과의 이별의 순간도 찾아 왔습니다. 진실의 힘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께 울고, 웃었던 진실의 힘 ‘가족들’과의 기억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봄날을 고대하며, 어둑한 밤을 견뎌냈을 임근규 선생의 영상 편지가 전달됐습니다. 선언문을 낭독하듯 “무죄를 받았던 것처럼 나는 병마와의 싸움에서도 이겨낼 것”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막걸리 보안법도, 예기치 못한 병마도, ‘문학도’를 꿈꿨던 그의 삶을 가로막지 못하겠지요. 그것이 진실의 힘과 긴긴 나날을 함께 한 이들의 삶이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인간은 폭력보다 강합니다.
차마 입을 떼기 어려울 것 같아서 고심 끝에 써내려 갔다는 송소연 이사님의 첫 문장은 “재단법인 진실의 힘 상임이사에서 한 사람의 후원회원으로 돌아갑니다” 였습니다. ‘집’을 떠나는 그의 마음을 쉬이 짐작하긴 어렵습니다. 20년 까마득한 후배인 저는 가끔 20대 후반의 ‘송소연’이라는 사람과 마주하는 순간을 꿈꾸곤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족들을 만나고, 싸우고, 버티고, 견뎌냈을까. 타인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었던 우직한 삶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 동력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진실의 힘 10년, ‘모든 게 송소연 덕분’이라던, 그를 스쳐 지나간 모든 선생님들의 삶에 있었습니다. 어떤 모양과 형태든 간에 자기만의 힘으로 삶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요.
송소연 이사님의 말처럼, 진실의 힘은 ‘집’입니다. 언제나 문이 열린, 언제든지 머물다 가도 될, 언젠가는 돌아올 그런 곳이기에 우리는 슬픔의 기운을 한껏 덜어낸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안녕히!
다음은 <이제 몸을 챙깁니다> 책을 출간한 정신과 의사 문요한 이사님과의 ‘몸의 대화’ 였습니다. 몸의 대화라니, 아직은 우리에게 생경합니다.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이들과 ‘잘 지냈느냐’는 인사를 쉽게 주고받으면서 정작 나의 몸에게 ‘안녕’을 물은 기억은 참 드뭅니다.
“1분에 몇 번 숨을 쉬는지 아세요?”라는 문요한 선생님의 질문에 20번, 40번 등등 여러 대답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질문이죠? 지금부터 눈을 감고 1분간 몇 번 호흡하는지 세어보세요.” 길고도 짧은 1분이라는 시간, 온전히 ‘몸’에만 집중해봤습니다. 각자의 호흡에 따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우리는 천천히 몸의 각 부분의 세밀한 움직임을 느꼈습니다. 일상의 모든 영역을 시간에 따라 쪼개어 움직이듯 우리는 스스로의 ‘몸의 속도’를 알아차리면서, 삶의 속도도 깨달아 갑니다.
몸이 곧 삶인 임봉택 선생님의 독후감 낭송 시간도 가졌습니다. 임봉택 선생님은 종일 배를 타고 꽃게와 생선이 걸린 그물을 끌어 올립니다. 달력 뒷면에 써내려 간 글에는 뱃사람 임봉택이 터득한 몸의 대화법을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바다의 짠 기운을 털어내고 짬을 내어 읽어간 책 속에서, 임봉택 선생님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몸’에 남아있는 깊은 트라우마에 대해 말했습니다. 임봉택 선생님이 쓰신 표현 그대로 이 글에 옮깁니다.
“몸이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안는 강한 트라우마라는 것은 한마디로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산법원에서 제판을 받을 때 일입니다. 우리 제판에 저를 고문하던 김동권이란 형사했더 놈이 증은으로 나온다는 말을 송이사한태 듯고 재판장으로 올라가 봣는대 정말로 그놈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놈을 보는 순간 사지가 떨리면서 무슨 말을 해야 갰는대 말이 나오지 안더군요. 제가 문요한 선생님의 이 책을 보면서 인간의 몸과 마음의 변화를 깊이 느낀 바 있습니다.
또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욕심을 버리고 내가 조금 손해를 본다는 마음으로 생활을 한다면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럭캐 살려고 노력하고 있읍니다만 잘 대지 안터군요. 참고로 제가 이 책을 3분의 1정도 밖에 보지 못해서 이정도로 마무리 하겠읍니다.”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건너 온 임봉택 선생님의 이야기는 가슴을 지릿하게 하면서도,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인내와 용기로 지금의 우리를 단단하게 묶어내는 듯 했습니다. 함께 이겨내기 위해, 함께 기운을 얻기 위해 당신의 트라우마를 내비치고, 우리는 그 마음을 그대로 안고 서로를 든든히 안아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요한 선생님은 한 해를 잘 살아낸 나에게, 이 마음 하나만큼은 아끼지 않기를 당부했습니다. “내가 힘들 때도 나에게 친절하길” 우리를 집어삼킬 듯 밀어 닥치는 고난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셨던 후원회원들을 위해서 다시 한번 곱씹어 봅니다.
‘내가 힘들 때 나에게 친절하길’ 언제나 그러했듯,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