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스승과 제자의 뜻밖의 조우가 진실의 힘에서 일어났습니다. 후원회원 신청 전화를 옆에서 듣던 저는 ‘고민경’ ‘역사 교사’라는 말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야! 엄청 좋아했었어!”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선생님에 관한 크고 작은 기억을 끄집어내자, 수화기 너머 선생님께서는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치였습니다.

다영

진실의 힘: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 수업을 들은 건 단 한 번이지만, 역사 선생님들만의 굉장히 자유롭고 진보적인 교육 방식을 지금까지 잊지 않았어요. 후원회원 신청 명단에 ‘고민경, 교사’라는 메모를 보자마자 분명 내가 아는 그 분이라고 감히 확신했습니다. (웃음) 선생님께서는 서승 선생님 통해서 ‘진실의 힘’을 알게 됐다고 하셨죠?

고민경: 이전에도 페이스북을 통해서 진실의 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단체인지는 몰랐어요. 그러다 서승 선생님, 치바나 쇼이치 선생님을 모시고 울산 지역 역사교사들이 학생들과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옥중 19년> 같이 읽고, 토크 콘서트도 열었어요. 이후에 경북 영양에 있는 ‘한의 비’(오키나와 강제징용 생존자로서 평생 강제노동, 인권유린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투쟁한 강인창 선생을 기리는 비석) 답사를 갔고, 이 비석을 조각한 긴죠 미노루 선생 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진실의 힘’을 알게 됐어요. 이런 단체를 돕는 일에서 가장 쉬운 건 사실 후원이라고 생각했고요.

ⓒ고민경
서승, 치바나 쇼이치 선생님을 모시고 울산 지역 역사교사, 학생들이 함께 한 토크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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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

진실의 힘: ‘내가 후원하는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후원이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진실의 힘에 손을 내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고민경: 역사교사로서 과거사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7, 80년대에 있었던 간첩 조작 사건이라든지. 제가 대학을 다녔던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강기훈 씨 유서대필 사건도 언론에 보도가 됐잖아요. 저희 세대의 역사교사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예요. 세월호나, 산업재해 문제 등 절대 외면할 수가 없죠.

진실의 힘: 선생님 방금 얘기해주셨던 내용들이 다 진실의 힘 활동과 맞닿아 있네요.

고민경: 네. 서승 선생님 통해서 강용주 씨 이야기도 들었어요.

진실의 힘: 강용주 이사님께서 오랜 싸움 끝에 19년 만에 보안 관찰 불복 투쟁에서 승리하셨죠. 최근 선생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또 다른 이슈가 있으신가요?

고민경: 저는 현재 교육부에서 역사교과서 관련 업무를 하고 있어요. 국정역사교과서가 폐지된 이후 어떤 역사교과서를 만들어야할지, 역사교육에 어떤 내용을 담아내야할 지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화, 인권, 민주시민의 관점으로 역사 교육과정이 어떻게 재구성되어야할 지, 어떤 수업을 해야 할지 등입니다. 

진실의 힘: 국정교과서 이후 후속 조치라면,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인가요?

고민경: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12월경에 나올 예정입니다. 2003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처음 나왔을 때보다 근현대사 영역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왔고 교과서에도 그 내용이 일부 반영되어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현대사교육의 방향, 교과서 자체에 대한 연구가 많이 필요한 상황이죠. 제가 처음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했을 때는 이런 수업을 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91학번인 저도 근현대사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예요. 초보 교사였던 당시 근현대사 교과서의 내용 지식을 공부하면서 강의식 수업을 하기에도 벅찼던 것 같아요. 제가 속한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는 여러 선생님의 수업을 보며(특히 나보다 한참 후배인 ^^)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연구, 실천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진실의 힘: 선생님도 현장에 돌아가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시겠어요.

고민경: 제가 최근에 만난 학교 학생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 어떤 주제를 찾아 정리하고 자기 생각을 발표하는 활동을 잘 하는 것 같아요. 학교 현장의 수업이 이런 방향으로 바뀌는 영향도 있겠죠. 저 역시 이런 수업을 많이 시도하는 편인데 어떤 자료를 찾아서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아요. 너무 많은 정보가 넘치는 시대인데 가짜뉴스도 많고.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도록 하는 것 역시 역사교육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진실의 힘: 비판적 관점으로 뉴스 읽기, 역사 교육의 방향 등은 저희 후원회원들도 관심 있어 할 주제 같은데요.

고민경: 제가 잘 할 수 있는 교사를 추천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웃음) 논쟁적인 역사 수업을 학교 현장에서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천하는 좋은 선생님들이 주변에 많아요.

진실의 힘: 인터뷰 이후에 다시 한 번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웃음) 지난 8월 초에 독일 베를린, 뮌헨을 다녀오셨죠? 페이스북에서 뮌헨 나치 기록 박물관, 뮌헨 다하우 수용소 등을 다녀온 포스팅을 읽었습니다.

고민경: 독일역사를 전공한 이동기 교수님께서 역사교사를 대상으로 독일답사를 진행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 맞는 부산, 울산 지역의 역사교사들이 9박 10일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물론 전액 자비 부담입니다. (웃음) 단순하게 홀로코스트 기념이 아니라, 그 역사를 어떻게 기념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지 살펴봤어요.

진실의 힘: 진실의 힘에서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2022년 정식 개관할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하는 중입니다. 저도 지난해에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다녀왔는데, 한국의 기념관과는 굉장히 다른 톤의 전시 방식이 눈에 띄었어요.

고민경: 네. 또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논쟁들이 오갔는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하나의 역사박물관 만들 때 얼마나 다양한 생각이 오가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흔히들 말하는 우파, 좌파 이분법적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 또 논쟁 자체를 소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 논쟁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거죠. 또 기념관에서는 다양한 문제 제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만약 바꿔야 할 부분이라면 휴관을 하고 새롭게 업데이트 하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고민경
뮌헨 다하우 수용소.

진실의 힘: 선생님, 얼굴 마주하고 독일 연수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혹시 진실의 힘 활동에 바라는 점, 또는 ‘이런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고민경: 사실 시민단체 활동하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잖아요. 서로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즐겁게 활동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잘 하실 수 있도록 열심히 지지하겠습니다. 그거 외에 특별하게 제가 뭐 바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웃음)

진실의 힘: 마지막 질문은 다소 사심을 담았습니다. 23년차 교사다 보니 뜻하지 않은 공간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제자를 만날 기회가 많으시잖아요. 그때마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요.

고민경: 진실의 힘 후원회원 신청할 때 제자였다는 얘기를 듣고서 참 놀라웠어요. 제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잘 하고 살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긴 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시민단체에서 자기가 원하는 어떤 이상을 실현하고 사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되게 고맙기도 하고요.

진실의 힘: 어떤 이상을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선생님들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저만 해도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날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안티조선’ 책을 선물 받았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언론 보도를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들이면서 살았는데, 뉴스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이후 제 삶을 결정할 때 큰 영향이었어요. ‘안티조선’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웃음)

고민경: 아유, 그 선생님께서 이 말을 들으면 굉장히 기분 좋아하시겠는데요.

진실의 힘: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있어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가치나 철학들이 굉장히 크게 작용을 하니까요.

고민경: 저희가 만났을 2003년, 2004년 그 무렵 학교는 교사인 제게 가장 이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학생회, 동아리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죠. 학교 축제, 교사 학생토론회, 다양한 동아리 활동. 그 에너지가 지금 떠올려봐도 굉장했던 것 같아요. 

진실의 힘: 저는 중, 고등학교 모두 일반계 학교만 다녔지만, 2005년 그때는 공교육, 사교육 간의 격차도 크지 않은 시기로 기억해요. 그때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자립형 사립고가 있긴 했지만, 서울이 아닌 지역에는 자립형 사립고, 특목고가 막 하나 둘 생겨날 시점이었죠.

고민경: 일반계 고등학교가 지금보다 훨씬 더 활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기 교사였던 나는 자기 나름의 교사로서의 이상을 마구 펼쳤는데 그 당시 학생들이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으며 나 같은 교사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간혹 들기도 했는데 좋네요. 이런 얘길 들으니까.

진실의 힘: 그때 저희 반은 야자도 안 하고 그랬습니다. (웃음)

고민경: 저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긴 하거든요. (웃음) 야자 강요 안 하고.

진실의 힘: 그때나 지금이나 ‘하지 않아도 될’ 다른 선택지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민경: 저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