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옥 님은 진도 고군면에서 아버지 박경준, 어머니 한등자 선생의 큰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전남대 간호학과 2학년이던 1981년 3월, 아버지, 어머니, 큰 어머니 이수례, 사촌오빠 박동운, 박근홍 선생 등 일가족이 한꺼번에 안기부로 불법연행되었습니다. 그해 8월, 언론에 대서특필 된 ‘진도가족간첩단’ 사건이었습니다. 간첩으로 조작되어 7년형을 살고 1988년 출소한 아버지 박경준 선생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평생 서류가방 가득 재판 기록과 성명서를 넣어다니며 재심을 준비했습니다. 2009년 11월 13일 재심 재판, 박미옥 님은 재심 재판을 선고를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에 재판정에 앉았습니다.
2020년 2월 27일 대법원 선고로 손해배상 사건 재심재판이 모두 끝났습니다. 매번 재판을 기다리며 마음 졸인 시간들을 생각하면 정말 기쁜 일입니다만, 무려 39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이 파기환송 된 게 2014년 12월 12일이니, 그때부터도 벌써 6년이 지나서야 손해배상 재심 재판이 끝났어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무사히 재심재판이 끝난다는 확신을 한 적은 없었어요. 해를 넘길 때마다 희망고문 받는 마음이었죠. 애초에 손해배상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이 될 거라고 예상할 수도 없었어요. 뒤이어 손해배상 1심 가집행금을 ‘부당이익금’이라며 국가가 소송을 걸었을 땐 속에서 막 불이 났어요.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고요. 사실 대법원 선고가 나오기 전까지는 비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기대하는 게 더 어려웠죠.
진실의 힘이 설립 이전부터 인연을 맺어오셨습니다. 2011년에는 다른 고문피해자 자녀들과 고문치유모임을 통해 마음 속에서 꺼내놓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지요. 녹록치 않은 시간을 함께해 온 진실의 힘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였나요?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진실의 힘은 제게 하나의 공동체였어요. 우리는 사회에서 힘 없는 약자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뜻을 모아서 큰 힘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도 있었지요. 형사 재심, 민사 손해배상으로 정해진 이치에 따라 모두 끝났어야 하는 일인데 생각지도 않게 여러 번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잖아요. 예상치도 못하게 셀 수 없이 법원을 오가면서 진실의 힘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버텼을까 싶어요. 진실의 힘이 없었다면, 각자가 혼자 싸워내고 버텨내야 했잖아요.
어떤 선생님은 진실의 힘이 언제나 우리가 버텨낼 언덕이 되어준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어요.
맞아요. 눈에 보이지 않게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고, 힘이 됐어요.
재판이 10년 이상 길어지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파기환송의 배후가 전면에 드러나는 이해 못할 일도 일어나면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을 텐데요.
나는 평생을 무언가에 쫓겨가면서 바삐 살아왔어요. 또한 사건이 완벽히 매듭지어질 때까지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5명의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지요. 제 성격상 원래 사람들이 많은 모임에 나가거나, 앞에 나서는 걸 참 어려워해요. 그렇지만 앞에 나서서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잖아요. 특히나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엔 더 그랬죠. 처음에는 나를 드러내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그렇게라도 사건에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든 힘이 되어야 한다 싶었죠. 그런 힘을 낼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진실의 힘에서 한 고문치유 모임이었어요. 누구나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진실의 힘에서 많은 사람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용기가 났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의 앞에서든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셨어요.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단 한번도 ‘너 왜 그러냐’라고 혼을 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항상 나를 자랑스러워 했고, 사람 만나는 곳이면 꼭 나를 데려가서 자랑하곤 했어요. 동네 면장을 하실 때도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집 앞을 쓸고, 마루를 닦고 출근하셨거든요.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미옥이 아버지는 남들이 한나절 할 일을 몇 시간에 다한다’고 했어요. 어릴 때부터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주신 무한한 사랑과 신뢰가 제가 그간의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큰 힘이었어요.
그런 아버지가 겪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수 없이 생각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죄가 없는 나를 끌고 가서 몹쓸 고문을 하고,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소설처럼 꾸며서 덮어 씌운 후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시킨다면 어떤 심정일까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박경준 선생님은 7년형을 선고받고 1988년에 출소한 후 서류가방에 사건 기록을 가득 넣고서 민가협과 여러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셨습니다. 1998년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경준 선생님은 10년 간 조작간첩의 존재를 알리고 궁극적으로 ‘무죄’를 받아내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출소하고 나서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셔서 저희 집에서 지내셨는데, 집에서는 잠만 주무시다시피 했어요. 낮에는 탄원서며 각종 서류를 싸 들고 바쁘게 다니시더라고요. 그때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던 민가협 사무실을 매일같이 가셨고, 국회며 학회며 이리저리 다니셨는데 제가 모두 따라 다니지는 못했어요. 그때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라고 더 나서지 못한 건 아쉬워요. 하지만 아버지는 ‘무죄’를 선고받는 일이 순차적으로, 무리 없이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혼자 다니셨던 것 같아요.
박경준 선생님은 사건 당시 재판 때에도 ‘무죄’를 밝혀야 한다는 의지가 크셨어요. 잘못된 순간에는 늘 목소리를 내는 걸 주저하지 않으셨고요.
1981년 당시 재판장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한등자)한테 들었어요. 아버지가 조카인 큰 오빠(박동운)에게 한 말이 있어요. 집에서는 오빠를 동운이 아니라 근성이라고 불렀거든요. 아버지가 “근성아, 근성아, 정신 똑바로 차려라. 여긴 재판장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제는 정신차리고 똑바로 말해야 한다”라고 했대요. 그런데 엄마 눈에도 큰 오빠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대요. 엄마가 “너희 오빠는 아주 넋이 나가버린 사람 같더라”고 했어요. 그렇게 다들 지독한 고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인데도 아버지는 ‘재판정에서만큼은 반드시 사실을 얘기해야 한다’고 하신 거죠. 그래서 나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아. 엄마한테 그 얘기를 듣고서.
진실을 밝혀 나가는 긴 싸움 끝에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손에서 진실의 힘이 탄생했습니다. 돌아가신 박경준, 한등자 선생님의 뜻도 이곳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함께해 온 선생님이 앞으로 진실의 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음지에서 양지로 왔잖아요. 조작간첩 사건을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형제복지원 같은 사건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끙끙대는 것을 보면 내 일만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싶고요.
이번에 선생님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진실의 힘의 후원회원이 되었어요. 진실의 힘의 활동을 따뜻하게 격려함과 동시에, 가장 매서운 눈으로 지켜봐 주셔야 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으셨어요. (웃음)
저는 제가 볼 수 있는 반경의 삶 밖에 모르잖아요. 내가 배우지 않고, 교류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진실의 힘이 나의 눈이 되어주는 거겠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요. 누군가 직접 나서지 못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대신 해줬으면 하고, 그것을 위한 발걸음에 제가 조금이라도 더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