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진실의힘 인권상 결정문
인도네시아 베드조 운퉁과 YPKP 65

재단법인 진실의힘은 인도네시아 베드조 운퉁 대표와 YPKP 65를 제7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YPKP65는 1965년~1966년 사이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던 집단 학살 사건 피해자들이 1999년 만든 조직(1965/66 학살진상 연구소, the Indonesian Institute for the Study of 1965~66 Massacre)입니다. 베드조 운퉁 선생은 그 당시 체포되어 9년간 수감되었던 피해자이며 현재 YPKP65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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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드조 선생은 고문과 폭력의 시간을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남은 생존자로, 그의 삶은 인도네시아의 어두운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진실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군 장성 7인이 납치,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수하르토와 군부는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을 배후세력으로 지목합니다. 그 즉시 공산당의 활동은 금지 당했고,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영장 없이 마구잡이 체포를 당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자비한 소탕행위는 중부 자바에서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부 자바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백만~3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의심과 추정만으로 대량 학살당했습니다. 자바의 강물과 저수지는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발리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군부의 총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들과 산에는 암매장된 시신들이 넘쳐났습니다. “살해된 사람의 숫자로 치면, 이 살육은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 가운데 하나”(미 CIA보고서)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악명 높았던 ‘부루’ 섬에 있는 감옥을 비롯해 여러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책은 불태워졌고, 태워지지 않은 책은 금서가 되었습니다. 영화사와 출판사는 문을 닫았고, 예술가와 작가들은 투옥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의문을 가질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암흑의 시간이었습니다. 공포는 온 사회를 뒤덮었고, ‘65학살’은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1965년 당시 고등학생 베드조는 교원노조 활동 중이던 부친이 체포되자 무차별 체포를 피해 숨어야 했습니다. 자신도 정치 동아리 활동을 해온 터라 군부의 의심어린 눈초리를 피해가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1970년 10월 24일 자카르타에서 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Kalong interrogation camp에 수감된 채로 전기고문, 채찍질, 거꾸로 매달아 놓기 등 잔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후 Salemba 감옥을 거쳐 Tangerang 강제노역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2km이상 걸어서 노동하는 장소로 가야 했고 뙤약볕에서 쉬지도 못한 채 도로 공사 등 강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수용소는 비위생적이고 비좁았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크고 작은 질병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가장 큰 고통은 극심한 기아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작은 곤충을 잡아먹으며 버텼습니다. 숱한 동지들이 곁에서 죽어갔습니다.

수감 당시 베드조는 가까스로 영어를 독학했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어” 군부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재촉했습니다. 책 한 권 없었던 수용소에 다행히도 영어사전이 있었습니다. 정치범들과 함께 읽어야 했으므로 종이에 옮겨 적었고, “시간은 너무나 많았으므로” 글자란 글자는 모두 외웠습니다. 베드조는 지옥의 시간에서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24시간 감시하는 군인들의 눈을 피해 기타를 만들었고, 연주했습니다. 마른 나무로 기타 통을 만들고, 손으로 크기를 재고, 철을 이용해 줄을 만들었습니다. 피아노 건반을 종이에 그려놓고 한음 한음을 상상 속에서 배워나갔습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그의 옥중 투쟁은 참으로 치열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수용소 밖의 세상은 또 다른 감옥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 관련자’라는 낙인과 차별, 감시에 맞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는 영어와 기타, 피아노를 가르치며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리는 부친을 대신해서 가족들을 부양했습니다. 정치범 동지들과 모임도 지속했습니다. 그는 억새 풀처럼 살아남아서 가족과 동료들의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지옥의 시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 고문과 폭력의 어두운 시간을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남은 것이야말로 베드조, 그의 투쟁의 가장 큰 성과일 것입니다. 고문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믿음을 파괴합니다. 다시는 ‘인간’으로 살지 못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것이 바로 고문입니다. 그렇지만 고문이 항상 목적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조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굴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고문의 상처와 극심한 기아는 젊은 그를 뒤흔들기도 했고, 죽음의 문턱까지 잡아 당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통 앞에서 굳세게 선 채 어려움에 맞섰습니다. 갇힌 우리는 옳았고, 가둔 군부는 틀렸다고 믿었습니다. “왜 나는 살아남았을까?” 고통 속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고, 그것은 고통을 견뎌내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고 그의 동지들은 살아남았으므로 역사의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수하르토 정권이 영원토록 땅 밑에 묻고자 했던 반인도적 만행을 햇빛 아래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강력한 진실의 언어로 거짓의 시대를 거둬내고 있습니다.

2. 베드조는 고통 속에서 걸어 나와 YPKP65 활동가로,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학살 사건의 진실규명, 피해자들의 고통에 주목하면서 피해자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진 이듬해인 1999년 4월, 65사건의 생존자들은 YPKP65를 결성하고 진실규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어렸던 베드조는 선배들의 권유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꺾이지 않는 저항의 목소리, 원칙적이고 강렬했던 주장들, 피해자가 있는 곳에 곧 조직을 결성해온 열정. 1세대 선배들의 활동은 베드조와 피해자들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같은 생각, 같은 배경을 가진 이들을 만나면 살아있는 느낌이 들고 행복해진다고”고 베드조는 말합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이 곧 자신의 삶을 사는 일과 같다는 베드조는 YPKP활동이 자신의 소명(calling)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건너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조는 전 정치범과 피해자들이 국가의 인정과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학살당한 이들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 싸워나가겠다고 생각했고 또 실천했습니다. 그의 신념과 행동은 노령과 병환 중에 있는 피해자들이 견뎌나가는 굳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선배 운동가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베드조는 2007년부터 YPKP65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습니다. 베드조는 선배들의 경험을 이어받으면서 변화된 시대에 맞게 운동의 방식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2세대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집단학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희생자는 모두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부의 낙인과 차별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반공에 기초한 통치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운동도 공산주의자라는 편견과 이데올로기 공세가 여전합니다. 그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YPKP65 활동을 제한했습니다. 지원이나 후원, 지지를 받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1세대 리더십은 공개적인 활동을 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2세대 리더십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더욱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더욱 널리 알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베드조가 대표가 된 2007년부터 YPKP65는 다양한 운동방식을 채택,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시민들과 젊은 세대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내기 위해 온라인상에서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여 까미산(대통령 궁 앞에서 매주 목요일 벌이는 목요집회)을 2007년 1월부터 시작,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의 지지와 연대도 YPKP65가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시민사회는 피해자 의료지원 등 인권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끌어냈습니다. 군부와 반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피해자들의 집회와 모임 등 각종 활동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열망은 그보다 더 강렬하다.” 베드조와 YPKP65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밝힐 것,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할 것,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 것, 명예를 회복시킬 것이 그것입니다. 학살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전 세계 인권침해 피해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과거 국가폭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지향하기를 소망합니다.

3. YPKP65는 망각과 침묵을 강요 당했던 65사건의 실태조사와 실상을 알리기 위해 1999년 결성되었습니다. YPKP65의 존재는 정부의 부인과 은폐, 거짓에 맞서는 무기였고, 피해자들이 세상을 향해 가는 창이 되었습니다.

1965 학살사건 이후, 수하르토와 학살 가해세력인 군부는 32년 동안이나 인도네시아를 통치했습니다. ‘반공체제’는 수하르토 장기 집권을 위한 무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65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또다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되었습니다. 몇 명이 죽었는지, 연구자에 따라 희생자 수를 50만 명에서 300만 명까지 추산하고 있습니다. 희생자 수의 이 엄청난 차이가 바로 65사건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뚜렷한 증거일 것입니다. 망각과 부인은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가려는 수단입니다. 피해자들이 공포 속에 묻어 둬야 했던 슬픔이기도 합니다. 피해자들 스스로 진실을 드러내기를 꺼려하고 두려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진실은 오래도록 어둠에 갇혔고, 피해자들은 숨죽여 흐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테러와 폭력, 거짓의 시대에도 굳세게 선 채 어려움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진실로 무장한 채 선동과 망각에 맞서 싸운 피해 생존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는 죽어 갔고, 또 어떤 이는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강력한 진실의 언어로 YPKP 65를 만들었습니다. 1999년 4월 7일, 65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5인 –이부 술라미(20년 복역), 프라뮤다 아난 토르(인도네시아 대표적인 작가, 10년 복역, 2000년까지 가택연금 당함), 하산 라이드(부대표, 철학박사), 수하르노(조직가), 쿠살라 토르(작가)-이 1965년 사건 이후 최초로 피해자들의 모임을 만든 것입니다. 군부의 힘은 여전했고, 반공 세력의 위협과 테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향해 가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YPKP65는 학살 사건의 진상조사를 시작하는 닻을 올렸습니다.

집단학살과 암매장지가 있는 14개 지역에 110개 이상의 지부를 두고 집단 학살 암매장지를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해왔습니다. YPKP 65는 이제까지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12개 주에서 122개, 중부 자바섬(Pati, Boyolali 포함)에서 약 50여개의 집단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실태조사 보고서를 만들어 정부에 진실규명을 촉구했습니다. 증거를 수집하고 피해자들의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이었던 집단 무덤(mass grave)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진실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공포 속에 숨죽이고 있던 피해자들도 조직의 결성과 함께 존재를 드러내며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에 맞서며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의 증언자가 된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은 기록으로 남았고, 기록은 진실규명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YPKP65 결성과 활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피해자들 자신의 조직을 만듦으로써 피해자들이 당당한 목소리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살아남은 자체가 투쟁인 시대에 자기의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은 목숨을 건 또 다른 투쟁이었습니다. 처음 그 목소리는 낮고 가늘었습니다. YPKP65 결성으로 그 목소리는 점차 힘을 얻었습니다. 더 이상 숨어살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해자들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서로 굳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있었으나 책임은 없는 괴이한 모순적 상황에서 죽음의 책임을 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에 들에 강에 저수지에 짐짝처럼 버려졌던 영혼들이 제 이름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법적으로 감옥과 수용소로 끌려가서 10년 넘도록 갇혀 있어야 했던 이유, 영문도 모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바다에 버려져야 했던 이유를 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극적이고 잔혹했던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당당하게 따져 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문과 감금, 집단학살의 잔혹한 행위는 공동체의 존엄과 의지를 해치고 구성원들을 두려움과 공포의 노예로 만듭니다. YPKP 65의 결성은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망각과 부인의 카르텔을 깨고, 침묵에 맞서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습니다. YPKP65의 존재는 정부의 부인과 은폐, 거짓에 맞서는 무기였고, 피해자들이 세상을 향해 가는 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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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진실을 일깨운 베드조 운퉁 선생을 비롯한 1965학살사건 생존자들의 삶에 깊은 존경과 뜨거운 연대의 마음을 보냅니다. 우리 역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20만~4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군과 경찰에 집단학살 당한 역사가 있습니다. 학살이 금기어이듯, 진실도 금기어였던 오랜 세월, 유족들의 눈물겨운 분투는 진실을 밝히는 마중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역시 지금까지도 집단학살의 완전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유골은 수습되지 않은 채입니다. 노환과 고령의 유족들은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유족들의 온 생애를 건 투쟁을 상기하며, 우리는 진실의힘 인권상이 진실규명을 위해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1965 학살사건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대와 위로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길에 접어들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과거청산 운동의 길에서 굳은 연대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