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남 함평사건 희생자 유족회 정근욱입니다.
<진실의힘 인권상>은 우리처럼 과거 역사의 피해자였던 분들이 만든, 아주 높고 깊은 뜻을 가진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해는 채의진 선생과 정희상 기자, 그리고 올해는 인도네시아 65 학살 피해자들을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두 해 연속 ‘집단학살 피해자들’을 수상자로 선정한 것을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해마다 음력 10월 27일이면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저의 고향 마을에서는 100세대가 넘는 집에서 한날 제사를 올립니다. 1950년 그날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수백의 사람들이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살던 집들과 벼농사 수확물은 모두 불에 태워졌습니다. 살림살이도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른바 ‘공비 토벌’을 목적으로 함평 해보면에 주둔했던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는 권준옥 중대장의 지휘 하에 지변마을 등 7개의 마을 주민을 남산 뫼에 집결시켰습니다. 집마다 불을 질렀고, 남산 뫼에는 17세 이상 45세 이하 주민들 2백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갑자기 기관총 3정이 불을 뿜었고, 주민들은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2백여 명이 순식간에 몰살당한 것입니다. 4백여 호가 넘은 유서 깊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당시 중학교 5학년 졸업반이던 형님 정동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2살 난 아가여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5중대 군인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차별적인 학살이었습니다. 당시 5중대 군인들이 학살한 민간인 숫자는 나산면이 46명, 해보면이 128명, 월야면이 350명으로 총 52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비단 함평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전국적으로 약 20만 명에서 40만 명이 영문도 모르고 곳곳에서 죽어갔습니다.
학살이 학살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이유라도 알고 싶었던 유족에게 국가는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억압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부는 진실을 암흑에 가두고 피해자들의 진실규명 노력을 오히려 탄압했습니다. 학살에 이은 제2의 범죄였습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처벌을 받았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전도된 시대는 계속되었습니다. 진실규명 자료는 압수당했고, 가족으로서 최소한의 제의와 위령행사를 못하게 막았습니다. 유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마치 감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었던 분통스럽고 애끓는 일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 참 놀랍습니다.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가요.
저는 그와 같은 어두운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65학살 피해자인 베드조 선생님이 어떻게 살아오셨을지, 어떻게 싸워오셨을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라는 추정만으로 그렇게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다니, 똑같은 이유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족으로서 피에 맺힌 분노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시신들이 산과 들에, 강에 마구잡이로 버려졌다니, 유골을 찾아 헤매던 유족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진실규명을 외치면 오히려 탄압을 당하셨다니, 정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울부짖었을 그 오랜 세월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제는 진실규명의 증거가 되어버린 ‘죽은 자들의 유골’을 수습하러 다니시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슬프고 원통할지, 그 걸음에 지팡이라도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 앞섭니다.
그러나 베드조 운퉁 선생님. 선생님 말씀처럼, “뼈와 살은 묻혔지만 진실만은 덮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의 힘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 날의 진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경험했던 분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있지만, 그 다음 세대들이 이어서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습되지 않고 땅 속에 있는 유골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규명하라는 지상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집단학살의 완전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이 투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자국의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한 한국과 인도네시아 유족 여러분, 그리고 제7회 인권상 수상자 베드조 운퉁 선생님, 우리 피해자들의 염원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누가 왜 무슨 이유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는지 책임자를 찾아주십시오. 공산당, 공비라고 빨간 색 덧칠당했던 피학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채 땅 속에 묻혀있는 유골들이 제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랍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 땅, 인도네시아 땅, 그리고 지구 어디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봅시다. 잊지 맙시다.
온전한 진실을 찾아낼 때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함께 어깨를 겯고 싸워나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