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정(법무법인경 부설 공익연구소)
세계적인 축제, 알메달렌 주간
알메달렌 공원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다양한 항공편이 있지만 직항로가 없어 두바이까지 9시간, 4시간 대기, 다시 7시간 정도를 날아 스톡홀름에 도착하면, 다시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해 40분간 비행기를 타고 고틀란드섬으로 날아가 택시를 타고 비스뷔시로 들어가야 한다.
비스뷔시에서는 여름 휴가철이 시작될 즈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 행사 중 하나인 알메달렌 민주주의 주간(Almedalen Democracy Week)이 열린다. 알메달렌은 스웨덴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고틀란드(Gotland)섬의 비스뷔(Visby)라는 도시에 있는 작은 해안가 공원 이름이다. 1968년 스웨덴 교육부 장관이었던 올로프 팔메(Sven Olof Joachim Palme)가 총리 지명을 받은 뒤 이곳으로 휴가를 왔다가 우연히 진행한 연설이 연인원 10만 명의 스웨덴 국민이 참여하는 대표적인 정치 행사가 됐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나 사회적 대타협, 연대 임금 등 다른 곳에서는 민감한 정치 주제를 ‘대화의 힘’으로 풀어나간 스웨덴의 정치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알메달렌 주간이다. 올해도 5일 동안 총 2,115개의 세션이 이 작은 공원 인근 곳곳에서 열렸다. 그나마 예전에는 8일 동안 4천여 개의 세션이 열렸다고 하니, 스웨덴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보다 더 말하기를 즐기는 것 같다. 알메달렌 주간에는 영리적인 목적을 띠지 않는 공익적 주제라면, 청중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폭력이나 혐오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누구나 약간의 신청비와 대관료를 내고 부스를 열어 대화 자리를 만들 수 있다.
알메달렌 주간이 정치 연설에서 시작된 만큼, 스웨덴 8개 정당의 역할도 유별나다. 8개 정당이 동등한 권한으로 기획회의에 참여해 알메달렌 주간의 큰 방향성을 논의한다. 그리고 알메달렌 공원 구석에 같은 크기와 모양의 천막 부스를 차려 놓고 사람들을 만난다. 각 정당 대표가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7시에 중앙 무대 앞에서 진행하는 연설은 알메달렌의 메인 이벤트다. 총리가 속한 정당의 연설은 총리가 직접 한다.
대화로 설득하기, 대화로 영향 미치기, 대화로 대화로 대화로…
새삼 알메달렌에 주목한 것은 그들에게는 있고, 우리에게는 없거나 부족한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누구는 명절에 정치 이야기를 금지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듯이, 우리는 말은 넘쳐도 대화는 부족한 나라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마주할 수 있는 태도, 논쟁다운 논쟁, 이해와 합의의 문화는 점점 더 실종되고 있다. 무엇보다 말의 효용성이 없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득해도, 그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다. 외려 말의 용도는 설득과 이해보다 날 선 공격에 더 잘 쓰인다. 진영 논리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없는 제도 정치만이 아니라 시민사회 안에서도 민감한 이슈는 피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안전하지만 무익한 대화만 넘쳐난다. 정작 대화가 필요한 주제들이 끼리끼리 문화의 뒷담화로 넘어간 지 오래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대화다운 대화가 실종되고 있는 것이 개인의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권력의 대결이, 논리 없는 무력의 자행이, 합리성을 상실한 제도의 자의적 쓰임이 설득을 위한 대화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서는 진솔한 대화나 합리적 토론 따위가 의미 있을 리 없다.
스웨덴의 정치 문화가 대화와 토론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메달렌에서 목격한 2,115개의 세션에서도 특별한 대화의 기술이나 기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각종 토론회에서 하듯이 미리 섭외된 토론자들이 둥그런 원탁 앞에 서서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다른 패널의 의견을 들으며, 청중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질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의제에 관심 있는 청중이 모이고, 진지한 토론이 계속된다. 대화의 효용성을 체감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성수기에 대표적인 휴양지로 대화하러 온다는 것이 단지 의지와 관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올해 연인원 10만 명의 사람들이 알메달렌을 찾았다. 알메달렌에서 만난 스웨덴 최대 노조 LO의 알메달렌 프로젝트 매니저 마린 헨릭손은 LO가 알메달렌에 참여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업들이 알메달렌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고 있어요. 우리도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적극 참여해서 시민들을 만나야 합니다.” LO 다음으로 큰 규모인 스웨덴 전문직 노조 TCO는 좀 더 노골적이다. “쉽게 말하면 로비를 위해서죠. 여기에는 총리에서부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그들을 만나서 친분을 쌓고 우리의 의제를 알려 놓으면, 나중에 노동자에게 중요한 정책을 통과시킬 때 도움이 돼요.”
두 노조가 알메달렌을 찾은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자신의 정책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대화의 ‘영향력과 효능감’을 이해하고 있다. 물론 스웨덴도 대화의 위기는 감지되고 있다. TCO가 마련한 토론회의 한 주제는 “우리의 대화가 왜 점점 더 트럼프화되어 가는가?”였다. 그래도, 이것을 한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쟁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남다르다.
한국의 알메달렌, 가능할까?
‘특별한 것 없는 특별함’으로 꾸며진 5일간의 알메달렌 주간은 정치 ‘축제’라고 하기에는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무수한 대화 자리를 제외하면 특별한 볼거리나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기발한 퍼포먼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그들은 수많은 주제에 진지하게 몰입한다.
한국에서도 알메달렌을 모방하기 위해 많은 지자체와 단체가 이곳을 찾았고, 돌아가 정책 박람회와 비슷한 행사를 여럿 개최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결과로 보면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스웨덴과 다른 우리의 정치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지만, 의지를 가진 자치단체장이 바뀌는 순간, 기대만큼의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순간, 참여자들을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간주하고 설계하는 순간, 일회성 행사로 마무리된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런 점에서 스웨덴과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 우리가 알메달렌을 모방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선진적 대화 문화가 부럽다면, 우리의 정치를, 정치 문화를, 정치의 작동 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자! 따져보면 알메달렌 역시, 정치 ‘행사’라기보다 정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국판 알매달렌을 시도하는 솔라시 포럼이 9월 21일(목)부터 23일(토)까지 충남 공주시 한국문화연수원에서 개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