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야만의 시간'에 한통련 간부라는 이유로 사업을 접어야 했던 허경민 선생을 만나봤습니다.

허경민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다니고 고려대학교 의과대에 입학했다. 먼저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형(허경조)가 한국 유학을 권했기 때문이다. 허경민이 의대를 다니던 첫 해인 1975년 형은 이른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관련자 21명중 12명이 재일교포 유학생이었다. 허경민도 남산 정보부로 연행되어 닷새동안 고문을 받다 풀려났다. 수사관들은 형의 친구가 누구인지, 형이 누구와 만나는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형이 ‘간첩’으로 몰려 구속됐어도 허경민은 별 수가 없었다. 학교는 더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아들들을 걱정한 아버지 뜻에 따라 풀려나자 마자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갔다. 의사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경민은 형의 석방을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민단은 간첩사건으로 구속된 동포를 도와줄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총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교포사회에는 1971년 ‘서승, 서준식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정치범 가족 교포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가족교포회’에서 활동하다 한국의 정치범 석방을 위해 일하는 ‘한국청년동맹(한청)’을 만났다. 기댈 곳은 사정을 이해해 주는 그곳 밖에 없었다. 유학 경험으로 한국말이 유창한 경민에게 한청은 한국말 수업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오사카의 여러 지부를 방문해서 학생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봉사를 했다. 봉사를 하며 한청과 어울리는 것이 크게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청년을 벗어날 무렵인 1986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하던 어른들이 한통련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반독재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신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월급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낮에는 어머니를 부양하며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저녁에 한통련 일을 하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로 지정된 것 때문에 간부들이 개인적으로 겪은 어려움은 많았다.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한국에 있는 부모 형제를 오랫동안 만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장례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허경민은 선생님들의 어려움을 직접 들어본 일이 없다. ‘이러 저러한 어려움들이 있다더라…’는 얘기를 친구들과 뒤에서 나누곤 했다. 고국에 방문하지 못해서 생기는 어려움들을 선생들이 젊은 허경민에게 표현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었다. 젊은 허경민은 선생들로부터 격려만 받았다.

90년대가 되면서 한국에서 온 소위 민주인사라는 분들이 한통련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금방 여권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기대하는 마음에 연락을 하면 한결같이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일본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재일교포들이라고 알았다가 김대중과 관련있는 반국가단체인 것을 알고 나면 곤란해져서가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 었다.

허경민은 오사카에서 ‘네트리서치’라는 컴퓨터 회사를 운영했다. 1999년부터 한국계 학교인 ‘교토국제학원’에 컴퓨터를 납품해왔고 2015년에는 수업관리 프로그램을 납품할 예정이었다. 서로 오랜 인연이 있었지만 학교관계자는 갑자기 거래 중단을 통보했다. ‘통일일보’라는 보수적인 동포신문이 국제학원과 거래하고 있는 허경민이 한통련 간부이기 때문에 사업자금이 반국가단체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는 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거래가 일방적으로 끊기고 회사 경영이 어려워져도 허경민은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오랜 인연이 있는 학교관계자들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직원들을 다른 회사에 소개하고 회사문을 닫았다. 회사 문을 닫은 허경민은 2021년 한통련 오사카지부 부대표직에서 물러나 현재 한국에 머물며 일본어 강사를 하고 있다.

허경민의 바로 위의 누나이자 허경조의 동생인 피아니스트 허경자는 감옥에 갇힌 오빠를 그리워하면서 1976년 노래 '재회'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1970~1980년대 일본에서 구원운동 집회나 민주화 시위 때 한국의 '아침이슬'처럼 널리 불렸으며,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재일교포 가족

허경민의 아버지 허창두는 제주가 고향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일고)로 유학을 하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인 광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업(1928년)의 주동자가 되어 퇴학을 당했다. 퇴학 후 일본으로 가 오사카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생업을 위해 일하면서도 민족교육에 열성이었다.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게 되자 공립학교에 이른바 ‘민족교실’인 한글 방과후 수업이 개설되게 애를 썼다. 당시 학생의 40%에 달하는 한국 학생들은 한글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막내 아들 허경민은 우연히 광주일고를 방문했다가 기념관에 아버지 허창두의 이름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어렴풋이 듣기는 했지만 기록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2021년 허창두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간첩의 아버지'로 살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허경민의 둘째 형 허경조는 오사카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여 석사학위까지 받았으나 일본내 취업이 어려웠다.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서른의 나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본과 1학년인 1975년 이른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1979년 1월 최종 무죄선고를 받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허경조는 이후로 사람을 피하고 항시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는 등 정신적 충격이 커서 시작한 컴퓨터 사업을 제대로 경영할 수 없었고 현재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79년 이후 한국에 방문하지 않고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었다. 허경조는 2015년 국가를 상대로 낸 배상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데 이어, 2021년 서울대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