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구원한다

- 진실의 힘 치유학교를 기억하면서 -

홍현정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그날 지방에 가야하면 속이 상했습니다. 그 일을 미루거나 당길 수 없을까 하릴없이 머리로만 궁리를 거듭하기도 했습니다. 대신 서울에만 있다면 제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가회동 노틀담 수녀원으로 달려갈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지난 2월 14일부터 3월 31일까지, 여섯 번의 화요일과 3월 마지막 토요일에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제목으로 있었던 “진실의 힘 치유학교” 이야기입니다. 뭐, 그 정도까지였겠냐고요? 글쎄, 그럴 줄은 저도 몰랐지요.

사실 처음에는 막연한 부채의식이었습니다. 80년대에 청년기를 지내면서도 ‘참, 모르고 살았구나’, 혹은 천주교의 수도자로서 우리 사회 일부에 엄연히 존재하는 어둠과 고통에 ‘참 무지했구나’ 하는, 미안함 말입니다. 그런 제게 박동운, 김태룡, 김양기, 김장호 선생님과 정혜신 선생님의 대화가 “치유”가 무엇인지, 선생님들 각자 안에 이미 있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이 어떠한 지, 하나씩 보여주었습니다.

“진실의 힘”을 통해 세상과의 끈을 다시 잡고, 그래서 자신과의 끈도 다시 찾은 김장호 선생님이 “과거 일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차단시키고. 그러니까 해답을 못 찾는거죠. 이제 와서 그 해답을 찾는 거예요. 지금에 와서, 30년 전에 있었던 일들, 또는 20년 전에, 10년 전에 있었던 것을 하나씩 되찾아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이 나는 즐겁고 대단히 기쁜거죠.” 라고 하시자, 김장호 선생님을 끈질기게 세상으로 이끌어낸 김양기 선생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선생님 치유자네!” “아, 내가 아니까, 억울하게 사는 것이, 혼자 갇혀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내가 아니까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지.”

제가 따르겠다고 나섰고, 매일 현실에서 만나고, 그래서 조금씩 더 닮아가고 싶은, 원조 “상처입은 치유자”의 모습이 이렇게 선생님들의 모습과 겹쳐 오면서 제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시작할 때는 참관자들이 더 크고 유연한 원을 이루면서 선생님들이 이루는 작은 원을 감싸는 것으로 보였는데, 점점 더 작은 원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힘이 큰 원을 휘감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언가를 내어주겠다고 나섰던 저의 숨은 교만이 드러나고 치유되었습니다. 이 자리는 “자신의 상처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성찰하며 치유받는 과정을 통해서 치유의 본질을 깨닫는 사람”들을 통해 저 역시 치유를 받으라는 소중한 초대였던 것이지요.

비록 지금은 많이 나았지만 무엇보다 선생님들은 “상처 입은 이들”이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사람들의 편견과 두려움에, 악의 힘 그 자체로 인해서 말입니다. 지금도 고문을 당하던 그 때가 되면 몸이 알아 몸살을 앓고, 마음도 내려들 가십니다. 고문과 억울한 감옥살이 그 자체도 힘들었거니와 그로 인한 상처 때문에 겪는 관계 맺음의 어려움과 수시로 닥치는 수치심, 화, 분노, 두려움, 불안 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선생님들의 상처는 본인들과 가족들, 친구들에게까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상처가 저를, 이 사회를 일깨웁니다. 제주도에서, 광주에서, 용산에서, 그리고 쌍용차 사태에서... 자기만 바라보느라 다른 이를 볼 줄 모르는 이 사회는 계속하여 약한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마음이 저릿저릿 죄어들지만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상처가 바로 우리의 일부이니까요.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선생님들이 품은 상처 자체가 다른 무엇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 세상의 부정의와 모순을 고발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고통이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고통을 알기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기에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햇빛 아래로 손잡고 나올 수 있다는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치유학교를 통해 경험을 되돌아보고, 서로 이끌어주고 비추어주면서 네 분의 선생님들이 “고문과 감옥살이, 편견과 사회적 낙인 등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어 낸 고문 생존자”들에서 “상처에서 돋아난 새 삶을 여전히 고통 중에 있는 피해자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거듭 나는 과정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불의에 짜부라지지 않고, 고통에 도망하거나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끌어안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아가는 선생님들에게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힘을 목격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지요! 더 이상 의무나 부채감이 아니라, 바로 이 아름다움이 저를 “치유학교”로 이끌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들이 늘 당당하고 씩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자꾸 뒤를 잡아당기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감히...”, “내가 어떻게...”, “그깟 경험이 뭐라고...”, 현재의 한계 때문에 치유자라 나서기에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직 없으신 모양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선생님들 안에 얼마나 놀라운 힘이 있는지, 저와 참관인들에게는 보이는데 말입니다. 정혜신 선생님의 안내로, 그것조차 극복하고 참된 치유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은 선생님들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누구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벌써 틀렸던 거 같아요. 상대방하고 같이 공감하고 같이 갈 수 있는, 지켜만 볼 수 있어도...” “어느 곳에 ... 가더라도 내가 겪었던 것을 진실성 있게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상대편에게 어떻게 최대한 성의껏 그 말을 할 것인가...” “정말 자연스럽게 순수한 표현이 치유적이다 하는 것이 오늘 공부한 핵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치유학교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선생님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깊이, 섬세하게” 바라보고 나눈다면 어떤 이유로든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을 치유하고, 또 그분들을 보고서 스스로도 치유 받게 되리라는 확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셨습니다.

약함, 무력함, 고통... 오늘날 경쟁적인 소비사회에서 마치 ‘악’인양 치부되고, 그래서 누구도 내 것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치유학교”는 이러한 약함들이 아름다움을 전혀 방해하지 못함을, 아니 오히려 그 심오한 아름다움의 원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고통이 존재를 피워내는데 장애가 아니라고, 아니 오히려 그 끈질긴 용기의 원천이라고 저를 격려했습니다. 고통과 약함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에 참된 성장의 가능성이 있다고도 알려주었습니다.

치유학교의 졸업식은 부활절 전 주간,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수난주일”이 시작하는 토요일 저녁에 있었습니다. 다음날 제주도 여행을 위해 모인 “진실의 힘” 가족을 위하여 예쁘게 꾸민 부활 달걀을 준비했습니다. 겉으로는 죽은 것 같지만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을 간직한 달걀은 생명과 사랑이 죽음과 증오의 힘을 이긴 부활의 상징이라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저로서는, 이 두 달간 만났던 선생님들의 삶이 곧 부활의 상징, 부활의 살아있는 증언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제가 다시 새로운 세상을 희망했다면, 그것은 선생님들의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 한가운데에서 피워낸 아름다움 덕분이었습니다. 선생님들, 함께 했던 여정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