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광주아시아포럼 : 2013 국가폭력과 트라우마 국제회의> 발표자료입니다.
2013.5.16~18 김대중컨벤션센터 / 주최 : 518기념재단, 주관: 광주트라우마센터.
고문조작 피해자와 재활
- (재단법인) ‘진실의힘’을 중심으로
- (재) ‘진실의힘’, 고문 생존자가 만든 치유공동체
‘재단법인 진실의힘’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수사기관에 끌려가 수십 일에 걸쳐 잔인한 고문을 당했던 고문생존자들이 만들었다. 고문과 간첩조작, 장기간의 구금 피해자였던 이들은 사건 발생 3~40년이 지난 뒤 재심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또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는데 성공했고, 배상액의 일부를 출연하여 ‘진실의힘’을 만든 것이다. 설립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고문생존자, 인권운동가, 변호인, 의료인 등 ‘고문조작’사건 문제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힘써온 각 분야 전문가들이 대등하게 결합하여 독특한 모델을 만들어냈다.
진실의힘은 고문피해자 심리상담, 국가폭력피해자 생활 및 의료지원, 치유센터 건립운동, 고문방지협약 이행감시 활동, 고문조작사건 진상규명 지원,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기념대회, <진실의힘 인권상> 시상 등 고문피해자 지원과 고문방지 활동을 하고 있다. 점차 아시아 국가폭력 고문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사업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진실의힘은 2008년 고문생존자 집단상담을 시작하면서, 고문후유증과 트라우마 - 치유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제기했다. “고문을 당한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그 후유증은 여전하고,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 지금은 명백한 진실이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생소한 이야기였다. 특히 정치범이 고문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취약해서 생겨난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강했다. 진실의힘은 그 당시 한국의 과거청산 운동에서 정작 ‘사람’, ‘피해자가 겪는 고통’이 배제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을 우선적으로 해결해 나서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 글은 1980년대 한국에서 간첩이 만들어진 상황, 그들이 겪은 피해의 실태,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실의힘이 만들어진 경위를 살펴보고, 치유의 두 축이었던 재심재판과 심리상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 고문-간첩 조작 피해자, 그 겹겹의 고통
반공지상주의가 판치던 7, 80년대, 한국사회에서 ‘간첩’ 낙인은 피해당사자가 사법적으로 받는 처벌과 가족들이 당하는 소외와 차별의 가혹함이라는 측면에서 봉건시대의 ‘대역죄’에 비견할 만하다. 무고한 시민이 자기가 죽을 줄 알고서도 ‘간첩’했다고 허위 자백하게 되는 과정은 그러므로 간단할 리 없다.
① 간첩 조작의 ‘법적’ 절차
간첩으로 조작된 이들이 겪었던 과정은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안기부(6~70년대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대공분실 수사관들이 영장도 없이 낚아채듯 끌고 간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고문실에서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00일 넘도록 “사람이 사람에게 했다고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한다. 처음부터 구금일수를 정해두는 것이 아니다. 언제 끝날지, 과연 끝나기는 할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고문이 가해진다. 피해자는 견디다 못해 수사관들의 요구대로 ‘자백’을 한다. 그런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수십 년 살아온 행적에 맞춰 간첩활동 시나리오를 그럴 듯하게 쓰고자 하는 수사관들의 요구에 맞춰줘야만 한다. 쓰고 또 쓰고, 이제 헤어 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스스로 얽혀 들어간다. 저항하면 끝없는 고문이 가해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수사기관의 불법체포, 장기감금, 고문, 허위자백은 ‘간첩’으로 조작해내기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이제 이들은 검찰과 법원이라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국가기관의 ‘사법절차’를 밟아야 한다. 조작된 간첩이므로 딱히 증거를 찾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거 어렵지 않다. 당시 대법원 판례는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에 사실상 무제한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검사는 5, 60일의 불법감금을 뻔히 알고서도,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라고 호소하는 피의자의 주장을 묵살하고, “다시 수사기관으로 돌려보낼 것”이라 협박하고, 심지어 폭행하면서 피의자 신문조서에 날인을 강요한다. 안기부 등 사법경찰관들이 저지른 불법 감금과 고문 범죄를 검사가 눈감아 주고, 이를 증거 삼아 기소함으로써 검찰은 자기 몫을 다한 셈이다.
법원은 어떠했을까? ‘공지의 사실도 국가기밀’이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널리 알려진’ 사실을 말한 것도 ‘기밀 누설’이 되어 평범한 인간은 결국 간첩으로 조작된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국민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오히려 이와 같은 일련의 연속적인 범죄행위를 통해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게 관행이 되었던 것이다.
② 참 질긴 ‘법적’ 낙인
인권을 옹호해야 할 마지막 보루인 법원에 출두해서 아무리 고문과 불법감금을 호소해도 “피고인의 주장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는 일이 되풀이됐다. ‘국가기밀’을 탐지한 간첩이므로 최소 7년형, 무기,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제 그는 영문도 모를 감옥살이를 시작한다. 감옥에서는 ‘공안사범’이라는 이유로 일반수보다 못한 행형상의 차별을 당한다. 반드시 억울함을 풀겠다는 일념으로 기나긴 감옥살이를 견딘다. 하지만 출소한 뒤 맞닥뜨린 현실은 가파르기만 하다. 보안관찰법 적용을 받는 ‘보안관찰’ 대상자가 되었으니 경찰이 기다리고 있다. 3개월에 한번씩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 기소될 수 있다. 재심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원래 재심자체가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국가 공권력이 조작한 사건을 다시 심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재심 사유를 까다롭게 해석하는 대법원 판례, 진실을 은폐하고 수사기관의 범죄행위를 감싸고 도는 검찰의 행태 등, 넘어서야 할 벽이 너무도 많다. 어디 그뿐인가. 당장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해야 하지만 ‘간첩’ 낙인 때문에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다.
③ 끈질기게 지속되는 ‘심리적’ 고통
“차라리 강도 살인 같은 거면 몰라도 간첩만은, 빨갱이만은 안된다고 식구들이 외면했어요. 그 응어리, 그 억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마음이 묶여 있는 거에요. 뭔가 있으니까 그랬겠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견디기 힘들었어요”
억울하다고 항변해 보지만, “설마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국가가 그럴 리 있나?”하는 의심의 눈초리만 더하기 일쑤다.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고통스럽고, 말해봐야 이해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떻게 해서 ‘간첩’이 되었는지, 본인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므로 이를 설명할 길도 없다. 억울하다는 말 한 마디 할 사람 찾을 수 없는 철저한 고립과 단절 상태다. 고문이라는 ‘파국적 상황’(catastrophic level)에 노출된 경험이 있으니, 일상적인 삶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슬픔이나 기쁨 같은 정상적인 정서반응이 사라지기도 한다.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삶을 압도하기도 한다.
고문을 당했다고 말해 보지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 의심하며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한다. 개인이 다른 개인한테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수사기관에 호소할 수 있다. 하지만 수사기관한테 당한 인권침해는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다. 게다가 압도적인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주장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사정이 중첩되어있으니 억울함과 분노, 좌절, 공포감이 배가된다. 고문이 떠오르는 날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미 수 십 년 전 그 고문 현장에서는 벗어났지만,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어 일상을 공격한다. 기억이 떠오르면 평화로운 일상이 순식간에 깨지고 분노, 공포, 불안, 모욕감, 자책의 감정 속에 빠져들어 간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고문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나를 고문하고 법적 낙인을 찍었던 이들은 승승장구 한다. 그걸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린다. 사회 전반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이 일반인에 비해 더욱 강하고, 과거의 경험과 겹치면서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이 공포의 핵심이다. 문제는 공포나 무력감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기도 어렵다.
④ 간첩! ‘사회적’ 낙인
“출소한 뒤, 동네 사람들은 내가 걸어가면 뒤에서 ‘저기 간첩 지나간다’고 대놓고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농사짓고 있는 논 한 가운데를 짓밟고 지나가는 동네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말이, 이건 간첩 것이니 뭉개버려야 한다고 했다.”
“시댁 식구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불러놓고 ‘네 아버지가 간첩인데, 그 딸한테 우리 손주들을 맡겨둘 수 없다. 아이들 앞길을 막지 말아라’면서 헤어질 것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나는 두 아이들을 남겨둔 채 집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더구나 군사정권 아래에서 ‘간첩’, ‘간첩 집안’, ‘간첩 마누라’, ‘간첩 자식’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유죄판결을 받든 아니든, 수감된 기간이 길든 짧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이다. 수사기관의 발표와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재판을 통해 ‘간첩’으로 규정된 피해자와 그 가족은 모든 것을 잃고 경제적, 사회적 삶이 파괴되며, 국가의 감시를 받고, 이웃의 배척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관계망의 파괴, 그 자체이다.
‘간첩의 가족’이 받는 고통은 ‘간첩’으로 규정된 피해자가 받는 고통을 보면서 곁에서 느끼는 ‘제3자’의 정신적 고통이 결코 아니다. ‘간첩’으로 규정되는 순간, 국가 권력과 사회 전체로부터 ‘적’으로 간주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고, 사회의 배척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웃에 의한 집단 따돌림과 소외, 강요된 실직과 취업곤란, 가족관계의 해체, 무기력감이나 대인기피증에 시달린다.
- 진실의힘과 치유
① 고문-간첩 조작 피해자와 치유
죽음같은 고문의 경험을 겪은 고문피해자, 게다가 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국가로부터 ‘간첩’ 낙인이 공식화된 간첩조작 피해자.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고통인지, 어떤 것이 1차적으로 바로잡혀야 할 것인지 따져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고문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파괴화고 몸과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남긴다. ‘간첩’이라는 법원의 확정판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이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지 않는 한 이로 인한 법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은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다. 이 2가지 문제는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피해자를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불법절차와 불공정한 판결의 피해자가 겪고 있는 겹겹의 고통은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 이처럼 30년 넘는 세월을 겹겹의 고통 속에 살아온 피해자들에게 ‘치유’라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1차적으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게 필요하다. 진실을 규명하여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간첩’이라는 조작된 낙인을 거둬들이고,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일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편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사회적 관계망이 파괴된 상태로 오랜 세월동안 쌓인 심리적 문제는 인격을 변형시키고 인간관계의 왜곡을 가져오기 때문에 반드시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진실의힘’은 고문생존자들과 그들을 지원해온 인권활동가, 변호사, 의료인들이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 간첩낙인으로 인한 고통, 이 겹겹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 만든 재단법인이다. 고문 간첩조작 피해자가 겪고 있는 현재의 고통을 보다 심층적으로 파악한 끝에 ‘치유’의 문제를 심리적인 영역만으로 보지 않고, 심리적 법적 사회적으로 층층이 쌓인 복합적 문제로 파악, 궁극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다.
‘진실의힘’이 고문생존자 개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주목한 것은, 민주정부 10년에 걸쳐 진행된 과거사 청산 운동이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이뤄지다보니, 피해자 개인이 겪어 온 정신적 상흔을 치유하는 문제는 지엽적으로 간주되거나 외면돼 왔다는 판단에서였다. 정작 피해를 당했던 ‘사람’과 그 사람의 고통은 배제된 채, ‘피해자’란 구제받아야 할 대상이거나 도와줘야 할 불우이웃이거나 기록상 등장한 인물에 불과했을 뿐이다. ‘진실의힘’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피해자들이,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온 힘을 토대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모색했고, 그 깊은 의미를 집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의힘’을 만든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고문조작피해자들이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고 “상처입은 치유자”로 거듭나는 단초를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② ‘진실의힘’ 태동
2005년 7월 15일, 고문경관 이근안에 의한 고문조작 간첩 피해자 함주명 선생이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 판결을 계기로 함선생 변호인이었던 조용환 변호사, 인권활동가 그룹, 그리고 함선생과 유사한 방식으로 간첩 조작된 피해자 10여명이 모여 ‘재심’을 통한 법적 권리 회복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재심재판을 준비하기로 한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간첩으로 조작되었으니, 오히려 이를 뒤집기 위한 재심재판이 쉬울 리 없다. 증거를 찾아 나서고 증인을 만나러 다니던 과정에서 과거사법이 제정되고 과거사위원회 활동이 시작된다. 높기만 하던 재심의 문턱이, 과거사위의 조사 · 결정을 통해 하나둘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 때의 진상규명 운동과 재심준비, 재판과정을 통한 신뢰 관계 형성으로 재단법인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우리와 같은 기회를 얻지 못한 다른 억울한 분들을 도울 수 있는 재단을 설립하자’는 구체적인 희망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요컨대 재심 재판의 의미가 개인의 억울함을 구제하는 것을 너머 공적인 의미를 만들어내고 삶의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보다 큰 인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신과전문의 등 의료인들이 참여했다. ‘고문후유증과 치유’를 주제로 토론을 시작했고, 곧 집단상담을 시작했다. 재심재판과 심리상담, 이것은 ‘진실의힘’을 만들어낸 치유의 두 축이었다.
- 치유의 과정, 인간 존엄성의 회복
1) 사법적 정의 회복, 형사재심
재심 준비 및 재판 진행과정은 그 동안 사회적인 지지 세력이 전혀 없었던 ‘조작간첩’ 피해자들을 사회가 주목하고, 그들의 주장을 사람들이 처음으로 경청하는 일종의 씻김굿과 같았다.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아 공식적 · 법적 권리를 회복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진실을 말하고 찾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상실했던 자신의 세계를 회복하는 치유적 과정이 이뤄졌다는 게 더욱 중요했다.
① 진실을 직면하기
재심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은 고문조작 피해자가 진실을 직면하는 과정이고, 진실을 말하는 과정이다. 간첩으로 조작된 정치적 맥락, 법적 논리,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짚어나가야 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문수사실의 고통스런 시간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고문에 굴복하여 허위자백을 한 그 순간의 그 무력감과 비참함을 직면해야 했다. 나를 고문했던 수사관, 그들의 행위를 기억해내야만 했고, 그들이 지껄인 욕설과 모욕을 하나하나 떠올려야 했다. 말해야 했고 말할 수 밖에 없었고 입 밖으로 끄집어내서 표현해야 했다. 그 뿐 아니었다. 불리하게 증언했던 이들을 찾아가서 그때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들어야 한다. 그 역시 고문을 당했으므로 나를 원망하는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왜곡되었던 관계를 바로잡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재심에 이르는 과정은 이와 같이 불법감금과 고문,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전면에 떠올리는 과정이었다. 은폐되고 감춰진 진실을 찾아나가고 그걸 공식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그러므로 수없이 그만두고 싶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되찾고자 하는 용기, 같은 고통을 당한 동료들의 응원, 자신들의 주장을 신뢰하고 사건의 진실을 끈질기게 파헤쳐준 변호사와 인권활동가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난 뒤 비로소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다.
② 안전감 회복
수십 년 동안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채 허위조작의 억울한 삶을 강요당해 온 피해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진실을 직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다시 트라우마를 겪은 일들이 얼마나 허다한가. 진실을 말하고 고통스런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을 만한 안전한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신뢰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형성하고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진실의힘 설립은 바로 그 점에서 고문생존자들에게 가장 안전한 환경이 될 수 있었다.
“비로소 얼굴을 들어 나를 고문했던 수사관을 당당하게 쳐다볼 수 있었다.” 고문수사관이 재심재판의 증인으로 나왔던 어느 고문생존자 이야기다. 고문당하는 내내 고개를 들고 수사관들을 쳐다보지 못했던 분이, 재심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안전한 환경 덕분에 비로소 용기있게 그 죽음 같았던 고통의 시간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③ 자존감 확립
평범한 일상을 살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간첩이 되었다. 동네 파출소 한번 가보지 않았으니 법적 절차를 알 리 없었고, 무엇보다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 경제적 형편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왜 간첩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그걸 누구에게 설명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고 ‘조언’해준 수사관들이나 국선변호인의 말대로 법정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로인해 현재 겪고 있는 자괴감, 자책감. 하지만 수사기관의 불법감금과 고문, 검찰과 법원의 공모로 이뤄진 사건조작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면서 점차 자책감에서 벗어난다. 원인과 전모를 파악하니 분노를 정확하게 표출할 수 있고, 법정에서도 재판장에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담지자로 당당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검찰과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피고인으로서 과거 어두운 역사를 증언하는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④ 신뢰관계 구축
재심재판의 전 과정에서 변호인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변호사는 고문후유증이나 고문생존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자신의 의미, 역할을 잘 이해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치유자에게 요구되는 공감과 내적성찰, 인간존중, 지속성, 고통 감내의 능력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그냥 개인한테 당한 억울한 사건을 조사하고 재심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절대적 지지와 공감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고문피해자들에게 신뢰관계를 회복하고 구축하는데 가장 큰 밑바탕이 되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억울함과 고통을 이겨내며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분투해온 피고인들 덕분에 과거 법조인들이 저지른 큰 오점을 일말이나마 씻어내고 법률가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다시한번 성찰할 기회를 준 것에 대해 피고인에게 감사”(조용환)
⑤ 무죄판결
“권위주의 통치시대에 위법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1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교도소에서 심대한 고통을 입은 피고인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고인의 가슴 아픈 과거사로부터의 소중한 교훈을 바탕으로 사법부가 국민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민의 권익을 보장하고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는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서울고등법원 제10형사부, 2010.7.8.)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한 법원은 대체적으로 판결문에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국가를 대표해 용서를 구한 점 때문에 피고인들은 고통스런 오랜 세월을 위로받기도 한다. (물론 이에 대한 검찰의 항소, 상고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검사가 지니고 있는 소중한 책임을 망각하는 행태이고, 피해자들을 다시 외상을 입힌다)
하지만 무죄를 이끌어낸 힘은 무엇보다 두려움, 고립, 허위와 맞서 싸우면서도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진실을 찾은 피해 당사자의 건강성이다. 삶속에서 반복되어온 외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간첩 낙인... 그 고통스런 세월 속에서도 개인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억울함을 풀기 위해 견디고 버텨온 강한 생명력. ‘무죄’라는 재심 판결은 그것을 확인하는 증명서인 것이다.
2) 고문피해자 심리상담
재심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한편으로 집단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1주 1회, 9~12회 진행했던 집단 상담은 2008년부터 시작했다. 집단상담을 통해 참가자들은 현재 겪고 있는 극단적인 감정이나 고통이 단지 성격 문제라거나 오랜 징역살이 때문이거나 나이 들어 생긴 못된 성격이 아니라 고문후유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똑같은 경험을 한 동지들과 집단을 이뤄 고문 고통과 그로부터 생겨난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겪고 있는 고통이 유사하다는 점, 그것을 고문증후군 (Post-torture syndrome), 또는 고문후유증이라 이름 붙인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의 원인을 알게 되자 조금씩 응어리가 풀려나갔다. 또한 그동안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고통스런 이야기를 ‘말’로 표현해서 꺼내기 시작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집단 상담이 끝날 즈음, 상담에 참가한 이들은 한결같이 “같은 편이 생겼”다거나 “가족보다 가깝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동안의 무력감과 고립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고 연결하는 능력을 되찾은 것이다.
집단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2010년 11월부터 한 사람이 그 날의 주인공이 되어 마음을 열어 보이면, 듣는 이들은 공감의 파도를 타는 ‘마이데이-맘풀이’를 시작했다. 미리 정해진 주인공이 진행자와 함께 고문과 간첩조작으로 고통받았던 지난날의 삶과 오늘, 앞으로의 삶을 이야기 한다. 한 사람의 주인공, 공개적 증언, 가족이나 지인의 참여, 관객의 치유적 역할 등에서 집단상담과 다르고, 일반적인 증언대회와도 다르다. 마이데이 - 맘풀이는 “고통을 떠나보내는 치유의식, 공개적으로 반인간적인 권력을 폭로하고 어두운 역사를 증언하는 기록무대, 관객과 주인공이 공명하고 서로의 상처가 치유되는 집단 치유의 시간”(문요한, 2012) 이다.
4년여 동안 심리 상담을 진행하다가 2012년 1월, ‘진실의힘 치유학교’를 열었다. “상처입은 치유자 양성과정”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첫날 입학식에서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런 자질이 있을까?”하던 의문. 졸업식 날 “고통은 용기의 원천”, “우리가 치유한다는 것은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치유는 상호작용”이라는 말로 변했다.
고문생존자들이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고문, 오랜 감옥살이, 보안관찰로 인한 경찰감시, 간첩낙인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 등등 온갖 고통을 이겨낸 귀중한 경험이 있고, 둘째, 고통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 대한 깊은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 셋째, 자신의 깊은 상처를 직면하고 치유받는 과정에서 치유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는 것, 넷째, 인간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치유의 본질을 깨닫는다면, 그 깨달음을 고통 속에 있는 피해자들과 나누게 된다면, 그야말로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치유학교를 졸업한 ‘상처입은 치유자’들은 <심리치유센터 와락>, 언론노조 농성장, 쌍용자동차노조 농성장 등을 둘러보며 고통을 함께 나눠가졌다.
- 결론 : ‘진실의힘’, 그 사회적 의미
“나는 고문, 감옥살이, 사회적 차별과 낙인 등
죽음 같은 고통을 견뎌낸 고문생존자입니다.
이제 나는 상처에서 돋아난 내 삶을
여전히 고통 속에 머물러 있는 피해자들과 나누며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아가겠습니다.”
- 진실의힘 치유학교, 1기 졸업식에서
본질적으로 ‘진실의힘’이 지향하는 방향은 바로 이것이다. '간첩'으로 내몰려 불가촉천민으로 살아왔던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에 폭력과 고통에 맞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희망의 자산을 남기려는 것이다.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며 인간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안내하는 스승, 조력자, ‘치유자’ 로서 고문생존자의 정체성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의힘은 치유를 전문적인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결합하여 만든 전문적 치유기관은 아니다. 고문의 끔찍한 고통을 견뎌낸 고문생존자, 인권활동가(자원활동가 포함) 그룹, 변호사, 의료인들이 모여 일상적인 ‘치유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치유공동체’란 무엇인가, 앞으로 진실의힘은 그 점에서 더욱 진화해 나갈 것이고, 한국사회에 어울리는 치유모델, 치유공동체를 찾아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