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이-맘풀이 04 <하원차랑> 선생님  

●2011년 3월 22일(화) 오후7시  

●진행 문요한

3월 22일 4번째 마이데이-맘풀이가 열렸습니다. 주인공 하원차랑 선생님은 일본에 취업했다가 83년 ‘부산거점 지하당 구축 서민간첩단 사건’ 수괴로 조작되어 7년을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셨습니다. 전향을 거부하고 만기복역 하는 동안 어머니을 여의고 가정이 깨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선생님의 마음 깊이 고인 이야기들은 무엇보다 무쇠처럼 단단한 삶의 의지, 모든 걸 잃고도 다시 열리는 하원차랑 선생님의 사람됨에 듣는 이들은 열렬한 응원과 탄식, 눈물로 함께 했습니다. 특히 하원차랑 선생님은 대전교도소 수감 당시 괴롭기짝이 없는 전향공작을 강용주 이준호 선생님이 함께 있어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동지들을 기렸습니다. 저마다 하원차랑 선생님을 격려하는 마음을 담은 큰 박수로 시작했습니다.

“살아야한다, 오로지 이 생각만으로……”

문요한 선생님 : 우리가 마음의 상처나 응어리가 풀리는 것은 그때 고통 받았던 핵심적인 감정들 그 마음들을 지지적인 관계에서, 아무 앞에서나 얘기한다고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니구요. 서로 받아주고 같이 나눌 수 있는 지지적인 관계에서, 그때 고통 받았던 감정을 다시 재경험하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과거의 감정과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하원차랑 선생님하고 잠깐 얘기를 하고 올라왔는데요, 별로 힘드신 것도 없다 하시고 그까짓거 생각해보면 뭐 하겠냐 하시다가 후반부로 가면서, 누구 앞에서도 말씀하지 못하셨던 응어리진 마음들을 조금씩 내비치기 시작하시더라구요.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 안에서 고문이나 복역하셨을 때, 힘드신 것도 컸지만, 복역을 끝내고 나오셔서, 말 그대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이, 그것도 혼자 병들고 힘든 몸으로 세상과 맞서야했던 기억이 마음속에 힘든 부분으로 남아계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다른 때보다도 그냥 일상적으로 혹은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그때 당시 힘들었던, 남들한테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마음을 내려놓는 그런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힘들었던 부분들 같이 나눌 때, 선생님만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게 아니라, 그 비슷한 응어리가 져 있는 분들도 마음이 공명을 일으켜서 내 마음에 응어리가 같이 풀려져나가는 것을 경험하는 그 어떤 ‘공동 치유의 장’ 이 되지 않을까 싶구요. 마사지라는 것이 주물러드리는 거잖아요. 근육이 뭉쳤을 때 실제로 마음을 주물러드릴 순 없지만, 그런 심정으로, 이야기를 해 나가셨을 때, 그 마음을 같이 어루만져주는, 옆에 같이 있어준다는 심정으로 해 나가시면 선생님도 우리도 마음속의 응어리들을 한꺼풀 벗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원차랑) 선생님, 오늘 심정이 좀 어떠신가요?

하원차랑 : 지금 뭐, 그래도 그 정도라도 이야기 할 수 있었는 것만도 족하게 생각을 합니다.교도소 생활을 할 때, 참, 세상은 언제라도 한 번은 만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지금 바깥에 나와서, 이제야 생각했는데, 교도소 출소 할 때까지, 안에서 강용주랑 내랑 이준호랑 우리 서이만, 나머지는 모두 남파해 온 사람들이고, 우리 서이만 말은 안 하고 있어도, 굉장히 마음의 의지를 하고 살았는데, 바깥에 나와 보니 먹고 사느라 서로 바쁘니까, 누가 어느 하늘 아래라도, 인자, 서울 이쪽에 올 때는 이준호가 인천에 있다는 것은 알았거든요, 우리 둘이 서로 “전향하면 안 돼.” “전향은 무슨 소리를 하노?” 운동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어느 하늘 아래 세월이 오래 지나면은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세월이 오래 지나 이제 만나니까, 지랑 내랑은 며칠마다 한 번씩 꼭 전화해가지고 하고 싶은 이야기 하고 말이지요, 부산서 몇 백 리 바깥이지만, 우리 집에까지 와서 들여다보고 말이지, 서로 마음의 의지를 했던 것이, 지금 그게 생생하니 생각이 나네요.

둘이 서로 전향을 하지 말자고, 그 마음 가지고, 버티고 ,끝끝내 지내다왔지요. 바깥에 나와서는 가정적인 어려움이 있고, 참, 먹고 사는데 열중하다보니까,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고, 오로지 산다는 거에 치중해 가, 오늘날까지 살아왔어요. 항상 어디에 있어도, 강용주가 어디에 있는가? 이준호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서이밖에 없으니까, 바깥에 살고 있어도, 어디 사는가? 어찌 사는가?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이런 모임을 해 가지고 서로 만나게 되니까 반갑지요.

우리 서이서 힘이 돼가지고 그나마 견뎠지요

문요한 : 선생님이 전향을 하지 않으셨던 힘이 어디서 나오셨던 것 같으세요?

하원차랑 : 이제, 내 자신이 안 한 간첩을 했다 할 수도 없지만은, 우리 서이서 서로 힘이 돼가지고 그나마 견뎠지요. 지금도 이제 마 칠십년 넘게 살았으나, 지금도 여기 딱 갖다 대 놓고, 총 쏴 죽일테니까 전향해라 그러면 난 안해요. 안 합니다. 거 뭐 빨갱이 아닌데 빨갱이라 할 수 있는교? 말도 안 되잖아요. 이제 언제 (재심)재판을 받게 될랑가 모르지만은, 받게 되면 최후의 이야기 할 때가 되면, 재판이야 이기고 지든지 그건 뭐 판사 지네 마음이고, 나는 내 하고 싶은 이야기 한다고 그렇게 하고 있죠.

말마따나 천하 없는 역발장수도 그 고문에는 못 견디잖아요. 고문은 보통 내가 한 45일을 구속영장 없이 고문을 어지간히, 그 고문을 해가 (간첩을) 만들었는데 내가 (전향)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안 뚜드려 팰 이상에야 내 스스로 그것(전향서)을 써 가지고 사상이 있는 자로서 그래 할 수 있나요? 할 수 없지요. 그리고 우찌됐던 우리 서이가 딱 이래 있으니까, 또 서이가 서로 심적으로 그런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으니까, 안 하는 거죠.

문요한: 혼자셨다면?

하원차랑: 혼자였다면... 내 혼자 였다면, 하도 그래싸니까 어쩔 수 없이 그리 될랑가? 모르겠지만은 여럿이 있으니까, 그런 마음을 똑같이 가지고 있으니까, 할 수 없었지요. 내 목숨과 같이 중요한 건데, 그걸 어찌 할 수 있느냐, 그 말이지요.

문요한: 선생님이 정직이나 진실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는데도 그걸 고문으로 강요당하신 거잖아요.

하원차랑: (목소리를 높이며) 고문으로! 여러분들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야! 임마, 부르는대로 써 임마” 불러주면 우리 그대로 쓰는 거, 내 맘대로 쓰다 글자 좀 틀리면 뒤통수 뚜드려패면서, ”이 새끼! 임마, 이것도 옳게 못써?“ 그리 된 거 아닙니까? 그거 날조해 가 했는 거, 어떻게 내 스스로 거기다 도장을 찍을 수 있나요? 내가 안 뚜드려패고, 지금도 되게 뚜드려패고 전기로 고문하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겠지요, 하겠지마는 안 뚜드려패고 안 맞고 내 스스로가 했다고? 난 그건 몬합니다. 허위자백했다고 검찰에 가서 이야기를 해도 “야! 임마, 헛소리 하지마라.” 귀때기 때리대요. 그 검사가 지금도 내 한번 봤으면, 변호사 하는 데만 한 번 알면 내 한 번 찾아갈라캅니다. 조준웅 변호삽니다. 어디 하는 줄만 알면 내 한번 찾아가서 인사 한번 할라칸다. (웃음)조준웅, 그 당시에 부산시의 2호 검사라....

문요한 : 찾아가서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하원차랑 : 검찰이라면 보안사령부에서 허위로 조서를 꾸몄는 것을 진실하게 조사해서 밝혀줄 줄 알았었는데 검사는 더 나쁜 놈이더라구. “이 새끼야! 보안사에서 이야기 한대로 여기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안 하면, 다시 보안사에 끌고가서 조서 새로 할꺼다.” 보안사 직원이 검찰서 조사 받는데 그 옆에 있더라구, 그러니가 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 고문! 우리 여기 계신 분들도 고문을 받았지만, 그 고문은 그것은 사람이 저 소나 돼지 잡는 백정이 아니라 사람잡는 인백정이라, 내가 봤을 땐 말이죠. 나는 교도소 출소 해 가지고 가정파탄이 오고, 그래서 내가 6개월 가깝게 병원에 입원했는데, 일종의 그 후유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병원에 와가지고, 그 병원 침실에 누워있는데, 와가지고 사상전향에 도장 찍으라고 형사 둘이 왔더라고, 빵 한 봉다리 사들고.... 내가 손발이 말이 안 들으니까, 그 때 나는 못한다 했지요. 그래도 억지로 손 끌어다 찍진 안하대. 나는 지금도 아닌 말로 사람으로 말하면 ‘처녀의 순결성’ 이라고 할까 이런 것 맨치로 전향 안 한 것을 내 마음속의 하나의 ‘신조’ 로 생각하고 있어요.

문요한 : 무엇이 선생님을 목숨보다 더 전향을 귀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나요?

하원차랑 :(약간 흥분해서 높은 목소리로) 내가 간첩 안 했는데 간첩 했다니까 그럴 수 밖에 있나요? 내 속으로 어떤 때는 그런 생각도 해 봤지요. 다른 사람은 일찍이 내 보내준다고 하면 일찍 나가기 위해서도 사상전향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너무 고지식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보지요. 그런 생각을 해 본적도 있었지만도 그것은 순간적인 잠시의 생각이고...

문요한: 그만큼 정직이나 신념 그런 걸 중시하시는데 처음엔 그게 폭력에 의해서 강요에 의해서 자백을 했다라고 허위자백을 하신 거잖아요?

하원차랑: 허위자백을 한 것이 아니라, 즈그가, 보안사령부에서는 즈그 부르는 대로 쓰잖아요. 즈그 부르는 대로. 물으면 즈그 부르는 대로 답 쓰고, 찍으라 하면 찍고, 안 찍고 배길 그게 없잖아요. 우리 여기 선생님들 전부 다 그런 고문을 당했지만은, 고문! 처음에는 겁도 겁이고, 즈그들 시키는 대로 하니 사람정신이 그로기 상태인데, 방법이 없잖아요. 도장 안 찍고는. 고문 받고, 처음 며칠간은 버틸 수 있지만 좀 지나면 버틸 수 있는교? 못 버티니까 그때는 그로기 상태지요.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

문요한 : 어떤 순간이나 어떤 고문에 그런 포기를 하셨던 것 같은세요?

하원차랑 :여러가지 고문할 때부터 이거는 싸워도 안된다. 즈그 하는대로 끌려가야지 살아남으려면 즈그 하는대로 끌려가야지.. 그것 견디는 장사 없습니다. 그 견디는 장사 있으면 누가 있겠는교?

문요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런 장면이랄지 그런 기억이 있으신가요?

하: 고문 받았을 때, 제일 의사가 왔을 때 그 장면은 안 잊혀지지요(모두 탄식). 거꾸로 매달아놓고 사람 까꾸로 매달아놓고, 손 묶고 수건대고, 고춧가루 퍼 넣을 때 실신하대요. 그러니까 눕혀놓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가 의사가 왔더라구요. 폐에 물이 들어간 것 같다고.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내 귀에 얼핏 들려요. 사람 돌리는 것 까지는 기억이 나요.

문요한 : 그 때 내 자신을 다시 떠올리시면 어떤 마음이 좀 드세요? 고문 받고 그럴 때.

하원차랑 : 그것보다도 막상 교도소서 출소해가지고, 오늘 나가면 충청북도 단양 꽃동네로 보낸다고, 꽃동네 가도 좋으니가 나는 전향 안 한다 이랬거든요. 그런데 막상 아침이 되니까 아침에 옷 보따리 들고 교도소 문 앞을 나가게 됐는데, 내 생각에는 꽃동네 간다고 하면 누가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내 혼자 턱 나간다하니 보따리를 들고 ,턱 나가니까 그 우리 갔는 마누라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니 우찌 왔노? 날 꽃동네에 데리러 간다 하는데 사람이 안 온다.” 그러니까 ‘꽃동네는 무슨 꽃동네냐고, 집에 갑니더’ 이카더라구. 심적인 타격은 거기서 제일 많이 입었어요. 사람이 옷을 입으면 허리끈을 매야 마음이 든든 안 합니까? 그런데 열차를 타고 대전역까지 왔다가 부산 집에까지 왔습니다. 오니까 내가 살던 집도 다 팔아먹고, 내가 살던 집도 아닌데 데려다놓고 하는 말이, 그때 심적인 타격이 제일 큽디다. 남편은 누구든지 마누라를 태산같이 믿는 거 아닙니까? 딱 오니까 나는 당신의 마누라가 아니라는 거야. 당신의 마누라가 아니니까 나를 마누라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거야. 집에 데려다놓고 나가버리더라구요. 이제 내가 밥 끓여먹고, 교도소에 있을 때는, 밥 세 그릇이라도 착착 주는 거 먹었지만은, 이제 내가 끓여먹으니... 이야기라서 그렇지, (출소하고)오는 그 날의 이야기인데, 다른 사람은 교도소 갔다 오면 보신도 시키고 뭣도 시키고 이러는데 그날 저녁부터 내가 밥을 끓여먹어야되는 입장이니, 그럴 때 심적인 타격이 제일 크지요. 당신은 빨갱이니까 아무데도 갈 생각말고, 그카는 거예요.

문요한: 그때 심정이 좀 기억나시나요?

하원차랑: 지금 말하는 것이 그때 우리 마누라가 하는 소리입니다. 당신은 빨갱이니까 아무도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는 거요.

문요한:그때 심정이 좀 어떠셨어요?

하원차랑:그거는 지금 말로써, 지금 속에 응어리고 뭣이고, 자기가 결혼해 사는 마누라를 믿고 사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할 때는 어떻겠어요. 그래서 내가 노가다 일이라도 해야 살아야한다! 아무리 기술이 있지만은 돈이 없는데, 살겠습니까? 그래서 인제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교도소 징역 살고 나가니까 면허증도 전부 죽어뿔고 적성검사 안 받았으니까, 재소증명서 떼다 가면 해 준다지면, 재소증명서 떼가는 그것도 없고, 그래서 남의 집 일 좀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지요. 그게 (출소)4일 후의 일입니다.

가족들, 어머니.....

문요한: 전향 안하고 계셨을 때는 가족들이 나한테 어떻게 해줄꺼라고 기대를 하셨나요?

하원차랑: 나가면 내가 잘 해야지 이런 생각도 가지고, 설마 그 전에 조금 벌어놓은 그거는 까먹어도, 다 까먹지는 안 했겠지. 이래 했는데 몽땅 다 날라가고, 남의 집 그 아래채 방 두개 얻어가 남의 집 셋방 살고 있더라고요. 다 날라가고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그러니 막막하지요. 고향 영천에도 자주 가지 말고, 가도 빨갱이라고 안 좋아 하니께네 가지말라고. 그래서 내가 한 4년 넘게 안 갔어요. 우리 어머니 산소에 가 보고 싶을 때는, 내 혼자 저녁에 가 가지고 어머니 내 왔소. 들여다보고 오고 이래했지요. 세월이 좋아지고 그 이후에는 참 내 마음대로 들랑거리고 살아생전에 못했던 거, 우리 어머니 산소 잘 만들어놨지요. 나 때문에 혼자 속눈물을 얼마나 흘렸겠느냐? 자식으로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요한 : 어머니가 복역 중에 돌아가셨는데...... 어떠셨던 걸로 알고 계세요?

하원차랑:(큰 목소리로) 빨갱이 아들! 심적으로야 좀 했겠습니까? 모친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요. "야야~ 교도소서 시키는 대로 하면 집에 일찍이 보내준단다. 야야 ~도장찍고 일찍이 나오너라.“ 이카더라구요. 교도소 와 가지고... (침묵) 내가 교도소 가고 난 뒤에 우리엄마가 얼마나 속으로 심적으로 고통을 받았겠느냐? 엄마요, 내 돈 벌은 거 가지고 엄마 산소라도 내가 좀 잘 해 드려야 되겠다. 지금도 어무이 산소에 가면 어떤 생각이 드냐면 ‘야야 인자 오나?’ 이칼 정도로 마음속으로 ‘엄마 내 왔소.’라고. 산소도 내 마음에 들도록 해 놓고 나니 기분이 좀 좋지요. 어차피 어쩔 수 없지만.

허! 빨갱이라고 얼마나... 제 고향이 경북 영천인데, 처음에 거길 가도 사람들이 암 말도 안 하더라니까, 몇 년동안은 그래가 저녁으로 우리 모친 산소에 저녁으로 내 화물차 가지고 저녁으로 갖다 대 놓고 우리 어머니 산소에 가 어무이 내 왔소 이카고. 우리 모친이 담배를 피웠는데 담배를 하나 놓고... 지금 제일 후련한 것이, 참 내가 유복자거든요. 부끄러워서 이야기 안할라켔는데, 내가 쪼매날 때 우리 엄마한테 뚜드려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왜 맞았느냐? 애비없는 호로자식 이야기 안 듣게 한다고 많이 뚜드려팼는데, 그랬는데 반만이라도 후련한 것이 약 한 첩 못 써드리고 했지만은 우리 모친 산소를 번듯하게 해 놓으니까 마음이 좀 후련하더라구요. 우리끼리 만나면 과부가 과부심정을 안다고, 홀아비가 홀아비 심정을 안다고 말이죠. 우리 다 같이 고통을 겪었던 사람은 우리 속을 다 알거든, 이런데 와서 이야기를 하면 후련하지요. 다른 데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암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기고, 우리끼리 이야기 하면 마음이 후련하지요.

문요한 :돌아보면 누구한테 가장 좀 미안한 마음이 드시나요?

하원차랑 :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지금 살고 있는 우리 할멈이지요. 왜 그러냐? 내가 거짓말로 살고 있으니까. 아직까지 교도소 갔다오고 이런 걸 모르고 있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지금까지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해서 속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미안한 생각이 내 속으로 들어가지요. (재심)공판이 끝나고 나면은 사실대로 이야기를 할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차피 처음에 이야기 안 했는 거, 중간에 이야기해봐야 뭐하고 해서 지금까지는 그냥 지내고 있지요.

내가 살아야 된다, 이 생각만 가지고 살아왔지요. 그러나 그래도 가족들이니까...

문요한: 일 속에서 과거 힘들었던 것을 다 잊고 지내려고 하는 거네요.

하원차랑 : 우리 거기 갔던 사람들이야 우쨌든 간에, 거기 거쳐가지고 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을 누구나 내남 할 것 없이 전부 다 고통 속에서 시련을 겪고 살지요.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해 본 사람들이라야 우리 마음을 알지요. 하루 속히 더 좋은 세월이 와서 그러한 때가 오면 좋겠고 그렇지요.

문요한 :아까 그 안에서 고문당하고 복역하셨을 때 보다, 나와서 심적 타격을 겪으셨던 게 절망, 깊은 좌절을 주셨던 것 같은데, 그걸 또 어떻게 이겨내실 수 있었을까요?

하원차랑:(힘주어) 내가 살아야 된다. 이 생각 가지고, 오로지 돈 버는 데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고 그렇진 않지만 거기에 낙을 붙이고 생활했지요. 마누라꺼정 없는데, 돈이라도 있어야 새로운 마누라가 생겨도 생기지 개뿔도 아무것도 없는데 누가 와 가지고 살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래 갖고 내가 기술이라도 있고, 이거라도 있을 때, 내가 살아야한다. 그 생각으로. 그래야 내가, 내가 살음으로써 아들도 내한테 오고, 내가 돈을 벌음으로써 아들이 내한테 오고 하지. 안 그러면 누가 나한테 오겠느냐고 그런 생각으로 돈 버는 데만 치중해서 살았지요.

문요한: 다시 가족들을 받아줄 마음이 있으셨던 거네요.

하원차랑: 내가 받아줘야지 누가 받아줍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배운 게 일 밖에 없으니까, 일 밖에 더 있습니까? 일에 낙을 붙여가지고, 우야든지 내가 살아야 된다 그래 살았죠.

문요한 : 아까 버팀목이란 표현을 쓰셨는데요. 이준호 선생님 들으시면서 마음이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이준호: 밀양갈 때는 집사람이랑 같이 가서, 사실 새 사모님 뵈면서 이야기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막으시더라구요. 내가 재판 끝나면 얘기 할 테니까 참으라고, 그래서 얘기 못하고 나를 노동운동하다가 무죄받은 걸로 얘기하더라구요.(모두 웃음) 하여튼 잘 사는 것 보니까 제가 좋더라구요. 나와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그 말 듣고, 아 얼마나 선생님이...... 개도 매어놓으면 달라지쟎아요. 사람도 가둬놓으면, 한 밖에 없는데 한으로 살다보니까. 선생님은 옆 옆에 있었는데 서로 쳐다보고 지나가다 쳐다보고, 주로 일을 많이 했어요. 떼 써가지고 나가서 하는 거지요. 내 보내 주나요? 교도관 입회하에 파고, 케일 심어서 다 나눠서 고추장 찍어 먹고 그랬는데, 그 당시에 선생님이 의지가 강하고, 나는 부인이 그렇게 나간지 몰랐죠. 내 생각만 하고 저렇게 자기 신념을 지키고 나갔으니까, 나같이 사는 줄 알았지. 또 자녀들도 셋이 다 공부를 잘한다고 그때 자랑하더라구요. 애들이 아버지도 없는데 공부를 잘 한다해서 참 잘 뒀다, 그랬어요. 부인이 그 정도인 줄은 몰랐죠. 놀랐어요. 내려가서 보고 새로 오신 부인이 얼굴도 예쁘고 참 잘 얻으셨더라구요. 기분좋게 올라왔는데, 지금도 마음속으로 말을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아까 그러잖아요. 미안하다고 , 재판이 잘 되고 그래서 힘들게 세상을 살아오셨는데, 지금 칠십이 넘으셨는데 남은 인생 정말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하원차랑: 말이라서 그렇지 말이죠, 가정이 하나의 버팀목인데 가뜩이나 사회생활에 벙벙하니 아무것도 모르는데 가정마저 날라가불고 없으니까 말로 표현 못해요. (침묵) 참 그거는 지금 이야기지만, (출소)4일 만에. 먹고 살 것이 있어야지 당장 아무것도 없는데 4일 만에.... 그때 나올 때가 나이 오십인데, 장비하는 사람한테 가 가지고, 서투른 기사 어디 구하는 데 없냐고 물으니까, 포크레인 기사 어디 구하는 데 없냐하니까 그 사람이 마침 일당을 얼마주면 되는데요? 일하는 거 봐서 주소. 구하는데 있으면 말해달라고. (모두 탄식) 보수동 딱 걸어가니까 노가다 일이 일곱 시에 시작 안합니까? 일곱 시에 시작하니까 일곱시 전에 내가 거 갔다고 그래서 그 사람 따라가니까 낙동강 가에 장입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포크레인 보니까 아주 옛날꺼라. 거기에서 밥줄이 떨어질까 싶어서 말이지 부지런히 땅을 파 줬어. 그리고 오늘 내가 사실은 돈이 하나도 없는데, 오늘 돈을 줘야 내일 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오겠다 이랬지. 그 9만원을 받으니까 부산시내 부자보다 내가 더 부자같다 안 합니까? 담배도 한 갑 살돈이 없었는데, 버스 탈 돈이 없어서 보수동까지 걸어갔다니까요.

그 뒤로 병이 났지요. 병원 나오니까 그 사람이 일 잘한다고 다시 일 시켜주더라구요. 그래 뭐 만만한 게 노가다 하는 사람은 그것 밖에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인제 98년 때는 갔던 마누라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한번 집을 나간 여자는 두 번 다시 안 나간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 아닙니다. 델려면 찬물에도 덴다는 속담이 안 있습니까? 살다가 또 나가면 우짤낀데? 난 안한다, 그래 버텼습니다. 교도소서 나와 가지고, 교도소에 있을 때 보안부대 고문하는 거 그거 이상으로, 교도소서 나와 가지고 더 심적인 타격을 많이 입었습니다. 교도소에 있을 때는 하루에 밥 세 그릇 주는데, (모두 웃음) 참 나와 가지고 가정이 없으니까 이건 막연하더라구요. 우리 동료들 중에 교도소 출소했을 때, 가정을 떳떳이 꾸려나갔다면 그 여자에게는 표창장 줘야 돼. (침묵) 나와서 더 고생을 했다니까요. 충격으로.

교도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문요한: 고문이나 집안 풍비박산 되고 그때를 떠올리면 누가 제일 원망스러우신가요?

하원차랑:제일 원망스러운 건, 우리 본 마누라가 제일 원망스럽지요. 왜 그러냐 돈 다 날리고, 지 좋은 소리 못 듣고, 나는 그 가정이 깨진 것에 대해서 제일 타격을 입었지요. 그러니 지금 우리 본마누라가 제일 원망스럽지요. 그래도 살자꼬 자식을 봐서 네가 그래도 되겠느냐고, 이야기 해도 뭐라고 하냐면 돌았나? 이러더라구요. (한참동안 말을 못 이음) 가정이 없어져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릅니다. 딱 출소해가지고 그날부터 당장 가정이 없어져버리면 그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교도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타격은 말도 몬한다.

문요한:누구를 원망하고 사신게 아니라 스스로 다 삭이고 사신거네요. 28년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쭉 해오셨는데요. 그 일로 인해서 내 인생이 좀 어떻게 변했다.라고 느껴지시나요?

하원차랑 : 지금 생각하면 출소 이후에 그 전보다 더 마음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없어져버렸으니까, 그걸 제일 많이 생각했지요. 그런데 여러 가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우선 제 호구지책부터 해결하고 봐야했으니까. 마누라가 있었으면 마누라한테 조금 기대고 이야기라도 좀 하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게 없어져뿌니까, 오로지 내가 살아야된다라는...

김태룡 :어려운 환경에서 버텨주신 선생님 너무 고맙구요. 대표해서 꽃다발 드리겠습니다. 참 뭐, 저는 지금 생활이 변변치 않아서 하원차랑 선생님이 처음에 나와서 절박했던 심정 그런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걸 극복해서, 굳은 의지가, 나도 저렇게 살면 살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고, 참 굳세게 살아주신 게 저희들한테는 귀감이 되서 한없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임 있을 때, 많이 모이고 다 같이 듣고. 어제도 그런 얘기 했어요. 치유모임에서 그분들의 아픔을 얘기할 때 내가 아픔이 사라지는 듯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 소리를 들으니까 그 아픔이 무너지고 내 아픔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저분의 고문과 감옥살이를 능가하는 아픔을 나와서 느꼈다, 눈물없이 얘길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얘길 들으니까 내가 아프다는 소리를 못하겠어요. 그리고 또 그런 의미에서 내가 또 힘이 생겼으니까, 함께 바라보는 우리 선생님도 저희들 바라보면서 더 힘이 생겨서 앞으로 더 행복하게 건강하세 사셨으면 좋겠다.

김장호 : 하원차랑 선생님 얘기를 듣고 제가 동병상련의 느낌을 많이 가졌습니다. 말끝마다 하는 소리가 고문 받을 때 교도소에서의 고통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고통은 출소이후입니다. 그건 말을 할 수 없는 거지요. 저도 경험이 있는데 우리말에 기가 막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진짜라는 걸 그때 내가 깨달았어요. 기가 막히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 만큼 출소이후에 생활은 그만큼 기가 막힌 일들이라는 겁니다. 이게 교도소서 거꾸로 매달린 게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이 출소 이후의 생활이거든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 트라우마라는 것이 굉장히 오래 가거든요. 사람마다 개성마다 환경마다 다르겠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틀에 박힌 생활을 계속 하고 있었거든요. 진실의 힘 처음 나와서 얼굴을 처음 내밀게 된 거예요. 여러가지 일들이 많은 거예요. 이것이 진짜 고통이죠. 이런 것들을 빨리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빨리 힘을 합쳐서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힘써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잘 살음으로 해서 그것을 해소해나가는 과정이거든요. 하 선생님은 아주 훌륭하십니다.( 모두 박수)

하원차랑 : (담담하고 안정된 목소리로) 사람이 어려운 환경에 처할수록 자기 마음을 굳건히 가지고 생활하면은 그 끝은 좋은 끝이 보인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환호와 박수. 모두 웃음, 그리고 한동안 침묵>

문요한 :오늘 네번째 맘풀이 시간이었는데 좀 어떠셨습니까? 아까 제가 처음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선생님의 상처를 우리 같이 나누면서 내 마음의 상처도 덜어지는 혹은 내 영혼이 좀 더 맑아지는 경험하지 않으셨을까 싶네요. 오늘 어떤 책을 읽어보니까 ‘고민하는 힘’이라는 책이었는데요. 거기 그런 얘기가 나오더라구요. 행복은 혼자서도 느낄 수 있는 거지만 희망은 함께 하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거라 얘기를 하더라구요. 선생님이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고 양심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이준호 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이 계셔서 큰 희망이 되지 않았을까 싶구요. 나와서 심적인 타격이 큰 것은 누군가 함께 의지가 될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무너지고 혼자만 남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큰 절망에 빠지셨던 건데요. 그래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오셨구요. 오늘 우리가 이 속에서 다시 또 앞으로 더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같이 꿈꾸는 게 더 좋구요. 저는 잘 모르지만 꽃이 봄에만 피는 게 아니잖아요. 봄여름가을겨울 꽃이 사시사철 피듯이 앞으로 살면서도 꽃이 더 많이 폈으면 좋겠구요. 선생님 말씀 들으며 제 스스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났구요, 양심을 지키겠다는 굳은 신념! 존경의 마음이 우러났습니다. 박수 치면서 끝낼까요? <끝>녹취:최영아

*진실의힘 소식지 제6호(2011.5.20. 발행)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