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화를 보냐?”, 고 물으신다면...

유지나(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진실의 힘’ 선생님들과 영화보기를 하자는 권유는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영화치유 자격을 검증받은 적이 없기에 몽롱해졌던 것 같다. 특별하게 할 건 없고 평소처럼 하면 된다는 말에 뛰어들기로 했다.

순간, 영화보기와 삶의 고통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수업을 하다보면 영화제목, 감독 이름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아 헤맬 때가 있다. 그러면 즉각 답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나는 그런 친구를 ‘걸어 다니는 영화사전’이라고 부른다. 그 친구들은 영화광들이다. 언제 그렇게 영화를 봤어요?, 라고 물으면,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 이라고 한다. 엄청 영화를 보노라니 영화광이 되었고, 결국 영화전공까지 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곤 한다. 내겐 참고자료가 되어주니 매우 고마운 친구들이다.

고통의 사유는 저마다 다르다. 소녀가장이 된 아픔, 실연의 고통, 죽음까지 생각해야 했던 절박함... 너무 괴로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책도 읽히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기도 싫을 때,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멍하니 홀로 영화 보는 것이었노라고 ‘영화와 고통’의 관계를 고백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영화에 빠진 것도 그렇다. 유전적이기도 하지만 (아버님이 감독이시니), 영화제작과 검열로 경제적 몰락을 겪은 가정사나 군사독재시절 숨막히는 공기를 견디기 힘들어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삶을 구경하는 맛에 나도 영화중독이 된 것 같다.

그래, 그런거야. ‘허구’여도 영화는 다른 세상, 다른 삶, 다른 욕망을 구경하며 자신의 삶을 거리두고 보게 만드는 좋은 도구야. 그런 생각이 들 무렵 만난 채플린의 명구는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런 그의 안목이 삶의 아픔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최고의 코미디를 만들어내게 한 것이리라.

영화란 매체의 속성을 공부하노라니 영화야말로 우리 삶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매혹을 가진 매체이다. 이를테면 잠재의식에 머물러도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상상계 기억 복원의 장이다. 잃어버린 욕망, 아픔의 잔영, 즐거움에 대한 추구...그런 것들이 의식을 갖고 꾸는 꿈과 유사한 영화보기 몰입에서 발생한다.

게다가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하면 소통의 코드가 잡힌다. 그 사람의 기질, 취향, 염원, 가치관이 영화감상을 매개 삼아 술술 풀려나온다.

그래서 영화를 같이 보고 이야기하기에 깊이 빠져들수록 세상과 인간 이해의 장이 화통해진다. 영화세상과 현실적 삶의 세상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기서 문제가 걸리고 욕망이 소통되면서 자신의 삶을 거리 두고 성찰하게 되는 놀이가 생겨난다. 하위징아가 말하는 ‘호모루덴스’, 즉 유희정신이 살아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상처와 고통을 녹여가기 시작한다. 시련이 인간을 키우는 놀이의 힘은 오래된 와인처럼 씁쓸달콤하게 그윽한 맛으로 농익어간다.

선생님들을 영화로 만난다. 영화라는 또 다른 세상과 접속하며 우리 삶을 돌려본다. 고통은 지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묵직한 앙금이 남아있고 앞으로도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단 그걸 에너지 삼아 다른 관점에서 잠시 돌리며 맛들어지게 빚어내는 놀이정신이 관건이다. 나는 선생님들과 그런 놀이를 하고 싶다. 이런 놀이를 선생님들과 두 계절 하노라니 몸풀기가 슬슬 되는 것 같다. 나는 즐거워서 이 놀이를 한다. 애초에 내게 이 일을 제안하며 감동받을 것이라고 끌어들이신 박성희님, 송소연님, 조용환변호사님, 날 잘 꼬드기신 것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인덕마저 느껴진다.

같이 영화보고 이야기하는 전초전으로 선생님들이 직접 차려주신 밥상, 떡국, 미역 옹심이, 직접 잡으신 물고기로 차린 음식은 ‘바베트의 만찬’이다. 그간 잊고 살았던 영화, 그건 여유있는 이들의 오락이나 데이트용이라고 젖혀두셨던 영화를 같이 보며 감흥을 느끼고 감상을 나누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잊어버린 상상계 소년의 잔영이 떠오른다. 저와 같이 영화보노라면 “삶이 가벼워진다”라고 전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덜어준다. 영화 보러 해질 녘 모여드시는 선생님들의 살아나는 얼굴에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을 바친다.

“세월은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추락할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60세든 16세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

영감이 끊어지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20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80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일 것이다. ”

  1. 영화산책에 함께 하는 구명서 김양기 김장호 김태룡 김철 박근홍 서경윤 안금자 이준호 임봉택 최양준 편복희 석미혜 유현미 님께 감사드리며,

2.. '진실의 힘'에 같이 오겠다고 자원해 준 사랑하는 제자들, 문정미, 이수진, 이다솜에게 이 기회에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