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전날 일본에서 서울로 날아오신 이철 선생님 재심재판이 열리는 날입니다.

1975년 재일교포 간첩 사건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던 이철 선생님은 39년 만에 법정에 서니, ‘재판 받았던 무서운 기억이 되살아나서 … 가슴을 짓누’르고, ‘두 다리도 더 떨리는 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철선생님은 이석태변호사, 장경욱변호사와 피고인석에 앉아 계십니다. 박스 가득 공판기록, 증거들이 책상 한 가운데 정갈하게 쌓여있습니다. 방청석은 이철선생님을 응원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법정 특유의 긴장감이 공간을 가득 메웁니다. 판사들이 들어올 때, 법정 안 모두가 일어섭니다. 자리에 앉습니다. 모두가 판사를 바라봅니다. 고통의 기억의 끝, 그리고 정의를 위한 시작. 이철선생님 재심재판의 시작입니다.

이철선생님의 진술서

진술에 앞서 재심의 기회를 주신 판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 서게 되니 오래 전에 재판 받았던 무서운 기억이 되살아나서 저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두 다리도 더 떨리는 것 같습니다.

그 때부터 39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27세 청년이었던 저도 이제 백발이 가까운 67세의 노인이 되었고, 한을 품고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살아 계셨을 때의 연세를 훨씬 넘었습니다. 저도 이제 언제 죽어도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으니, 제가 죽어서 저승의 부모님을 뵙기 전에 판사님들깨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일본사회에서 민족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이야기나, 많은 동포유학생들의 간첩사건이 잔혹한 고문으로 날조되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재심사건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사건 또한 40일 간의 무자비한 고문을 통하여 꾸며졌음은 종전에 재판부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상세히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그 점에 대해서는 반복을 피하고, 저의 부모님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제일 존경하고, 또 어머니를 누구보다 공경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재심에 임하면서 특별히 저의 부모님 사진을 가슴에 담아 모시고 왔습니다. 저는 67세가 되도록, 이 나이까지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버지, 어머니께 늘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느껴 왔습니다. 부모님은 평소 병원과 약을 모르고 살아 오셨는데, 저의 아버지는 53세, 어머니는 57세 장년의 한창 나이에 제 사건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판사님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이 재심을 통해서, 저의 억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며 애통해 하셨을, 저의 아버지,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 또한 출소한 뒤에 13년 동안 기다려 준 약혼녀와 결혼하여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로 있습니다만, 저의 부모님이 저를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키워 주셨는지 아버지가 되어보니 비로소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어릴 때 더러운 한국인, 냄새나는 조선 놈은 저리 가라 는 등 민족적 차별을 받아서 울며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너희들은 한국 사람이다. 옛날의 조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안아 주시며 달래 주셨습니다. 또 해마다 1년에 한번, 어린 6남매를 다다미방에 앉혀 놓고, 안중근 의사와 안 의사의 부인, 자제분들의 사진을 여러 장 펴 놓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희들의 민족애를 고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부터 안중근의사와 부인 마리아의 이름은 아버지께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당시부터 어린 마음에 ‘이름이 마리아라니, 한국여자들의 이름은 다 그러한가?’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민단창단 초기 때부터 열심히 활동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민단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 날에는 저희들을 사무실에 데리고 가시곤 하셨는데, 저는 거기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며 어른들을 따라 애국가를 부른 기억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모국에서 무슨 중요한 일이 생기면 여유가 많지 않은 형편인데도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시곤 하였는데, 그것 때문에 어머니하고 종종 다투시던 일도 기억납니다. 또 아버지는 민단 일을 열심히 하시면서도, 저희들에게 “박정희는 믿지 마라. 그 사람은 공산주의자니까, 언제 김일성한테 나라를 팔아먹을지 모른다.” 라고도 말씀하실 정도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셨습니다.

그런 사람의 아들을 잡아 가서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몸서리나는 간첩으로 만들어 사형 선고까지 받게 하였으니, 그 어떤 부모인들 과연 제 명을 다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검사가 사형 구형을 하면서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악질이니, 이 사회에서 영원히 말살되어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내 나라에서 살고 싶어서, 배우고 싶어서 조국을 찾아온 순박한 모국유학생이 도대체 무슨 나쁜 일을 하였기에 ‘악질’로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하는지, 또 평소 누구보다도 나라 걱정을 하며 선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이 도대체 저를 어떻게 키웠기에 제가 이 사회에서 영원히 말살되어야 하는지,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검사님께 물어 보고 싶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순수한 열망으로 모국을 찾아온 저희들 재일동포 학생이 아니라, 그 당시에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게 이 사회를 통치하던 군사정부에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연행되어 간 뒤, 두 달 있으면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있던 저의 약혼녀마저 어떤 괴한들한테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저의 아버지는 쓰러 지셨다가 저와 약혼녀 두 사람이 서울구치소에 같이 수감된 바로 그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처음 재판 받으러 법정에 가서 꽁꽁 묶인 채로 버스를 내리는데, 어디선가 “철아, 너 아버지 돌아가셨다! 너 걱정하면서 돌아가셨다! 너 알고 있냐?” 하는 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었습니다.

공판 첫날 하루 종일, 그리고 그 뒤, 오랫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는 말 이외는 다른 어떤 것도 저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공판 개시 후 상당 기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임한 것은, 재판이 끝나면 곧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하던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나, 검사 신문 시 ‘언제쯤 집에 갈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저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가게 될 거’라고 한 검사의 말을 어리석게 믿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 제 혼이 완전히 나갔던 것입니다.

또 저의 어머니의 경우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내 아들은 간첩이 아니라고 하시자, 검사가 ‘아들을 간첩으로 키워 놓고 무슨 제대로 된 어미냐’라고 힐난하여 큰 모멸을 받으신 뒤, 병을 얻어 3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제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런 탓에 저는 제 부모님은 불의한 국가권력에 의하여 제 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재심을 통하여 너무나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한을 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재판장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제는 사실 징역살이 13년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다 흘러간 이야기고, 저 또한 그 혹독한 시대에 고생한 이름도 모르는 많은 희생자들 속의 한사람으로 받아들여 체념할 수 있습니다. 징역살이 13년은 육체적으로 참으로 고단한 세월이었지만, 저는 그 긴 시간 동안 다행스럽게 우리나라의 귀한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라 사랑하다가 감옥에 들어온 많은 청년학생들, 민주회복과 민족분단을 극복하려고 애쓰시다가 들어오신 어르신들, 여기서 굳이 그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 없이 그 분들을 감옥 안에서 만나게 된 것은 저의 인생의 큰 행운이었고, 그 분들로부터 배운 것은 제 인생의 커다란 보배로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분들과 함께 징역살이를 같이 함으로써,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의 고난과 고통, 민족분단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쪽이 뿌듯하고 큰 기쁨마저 느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저의 청춘은 과거의 재판으로 산산 조각이 나버렸습니다만, 그 뒤 그와 같은 고귀한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현재 동생의 회사가 맡아 하는 건축 현장에서 전기 배선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작업 중 떨어져서 등뼈가 부러지는 등 크게 부상을 입은 일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다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저에게 이 재심은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부디 저희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시고, 제가 저승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재심을 열어 준 판사님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4년 11월 28일

피고인 이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