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숙,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님 아내│

동수 씨의 취미는 영화 보는 것이다. 극장에 새로운 영화가 상영되면 무조건 상영 첫날 봐야 할 정도로 영화광이다. 영화에 대한 내용도 잘 기억한다. 나는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면 보지를 않는데 지금은 동수 씨 혼자 영화를 보러 갈 수 없으니 같이 따라가서 봐야 한다. 나는 액션이나 무협 장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영화를 보다가도 정말 말 그대로 잠을 잔다. 특히 시리즈로 나오는 것들은 이해를 아예 못 하니 정말 지루하다. 동수 씨는 집에서도 시간만 나면 영화를 보는데 재탕도 모자라 삼탕까지 해서 보고 또 본다. 그래서 동수 씨가 장거리 버스를 타거나 비행기를 탈 때는 영화를 다운받아서 보게 해준다. 그래야 다른 것에 신경을 안 쓰고 예민해지지 않는다.

또 다른 취미는 마라톤이다. 동수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선수로 활약했고 졸업 후에도 모교에서 후배들 가르치는 코치 생활도 여러 해 했다. 결혼한 후에는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해서 열심히 운동하고 생활체육 코치와 심판, 이사도 겸임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화물 기사 일을 할 때도 틈만 나면 전국에 있는 마라톤 코스를 달리곤 했다. 오죽하면 세월호에 빠진 화물차를 건져보니 온통 동수 씨 운동복과 운동화뿐이었겠는가.

김형숙
고등학교 때 마라톤 선수였던 동수 씨. 화물 기사 일을 할 때 틈만 나면 전국의 마라톤 코스를 뛰었다.

지금 동수 씨는 달리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 얼마 동안은 미친 듯이 달리기만 했다. 한여름에 겨울 패딩을 입고 도로 한복판에서 20km 이상 달렸다. 어떤 날은 약속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약속 장소로 도착하지 않아서 전화했더니 산 쪽으로 올라가 버려서 차로 데리러 간 날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온전한 정신으로 달린 것 같지 않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어떤 계획도 없이 달리기만 했을 것 같다.

3년 전 사려니숲길에 처음 근무했을 때는 매일 숲길을 달리고 나무와 풀들을 보러 다니고 고사리 꺾는 철에는 새벽부터 나가서 고사리를 엄청 꺾어 오곤 했다. 꺾어 온 고사리는 지인들에게 모두 나눠준다. 한동안은 약초에 관심이 많아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몸에 좋다는 것들을 캐어 약술을 많이 담갔다. 한 달에 담그는 술값만 해도 어마무시하게 들어갔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본인이 복용하는 것도 아니면서 주변에 잠 못 드는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에게 효과가 좋다며 나눠주는 것이다. 가지러 오는 사람들이 미안한 마음에 담글 술을 직접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 동수 씨는 더 이상 약술을 담그지 않는다. 사람들이 또 언제 담느냐고 물어보면 알았다고는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식물 가꾸는데 관심을 많이 가졌다. 돌들을 주워오고 썩은 나무들을 구해다가 거기에 다육식물들을 심는다. 쓰지 않는 화분들을 주워서 나무들을 심기도 한다. 식당에 가서도 빈 화분이 있으면 얻어 와서 나무들을 심는다. 겨울이면 미니 하우스를 만들어 화분들을 안에다가 놓기도 했다. 잘 가꾼 식물과 다육식물들은 또 지인들에게 나눠준다. 텃밭에도 채소들을 종류대로 심었다. 매일 물을 주고 대를 세워주고 풀을 뽑고 가꾸느라 여름에 퇴근하고 캄캄해질 때까지 집 안으로 들어오지를 않았다. 지금 동수 씨는 식물도 다육식물도 가꾸지 않는다. 주인을 잃은 텃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얻어온 농기구들만 자리를 잡고 있다.

김형숙
동수 씨에게도 다육식물 심고 가꾸기에 열정적이던 때가 있었다.

2년 전 어느 날 숲길에 들어오다가 어린 들개 한 마리가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에 지인들이 트라우마에 반려동물을 키워보는 것이 좋다고 권하는 때라 집에 데리고 가서 키우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되고 갈등이 생겼지만 동수 씨가 그러고 싶다 하니 동의를 했다. 사려니숲길에서 데려와서 ‘려니’라고 이름도 지어줬다. 원래 아이들과 동물들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정이 많은지라 엄청 예뻐하고 잘 돌봐줬다. 그리고 1년 후 한 마리를 또 데려다가 키우겠다고 했다. 숲에서 돌아다니면 유기견으로 신고 들어가서 잡아가 버리고 려니도 혼자 외로우니까 같이 키우자는 것이다. 갑자가 계획에 없던 일이라 일주일을 고민하고 둘이서 잘 지내기에 월든삼거리에서 데려왔으니 ‘월든’이라고 이름 짓고 입양을 했다. 본인이 산책시키면서 운동도 하겠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려니, 월든이가 보고 싶어서 퇴원을 빨리해야겠다고 한 남자이다.

하지만 지금 동수 씨는 려니와 월든이를 산책시키지도 않고 돌보지도 않는다. 하물며 얼마 전에는 다른 데로 입양을 보내자고도 했다. 월든이가 자주 탈출을 해서 옆집과 조금 갈등이 생겼을 때는 누가 트라우마에 반려동물 키우는 것이 좋냐고 했냐며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며 다시 숲길에 가서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본인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두 녀석 신경 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날 그랬던 것이 미안한지 말 못 하는 동물이 무슨 죄가 있냐며 안쓰러워한다. 그리고 녀석들이 워낙 동수 씨에게 애교를 부리니까 입양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나와 딸들은 또 언제 입양 얘기를 꺼낼까봐 조심스러워 산책도 우리끼리 시키고 마당에 똥들도 우리가 치운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하는데 내 남편의 취미도 수시로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아직은 다음 취미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처음 동수 씨의 트라우마 증세는 분노였다. 왜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는 울부짖음에서 시작했다. 치유의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또 다른 분노의 방법으로 자해를 했다. 심리상담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병원에서는 점점 독한 우울증약을 처방해줬다. 지금은 원내 처방 약만 먹는다. 원내 처방 약이란 마약 성분의 약들일 것이다. 온 몸을 약으로 누르다 보니 분노 자체는 사라졌지만 무기력이라는 새로운 병명을 안겨 줬다. 분노로 표출을 안 하니 나로서는 덜 조바심을 내지 않아서 좋지만 정작 본인은 얼마나 답답할까. 그렇게 중독처럼 달리던 마라톤을 안 하게 되는 것도 약들이 동수 씨 근육마저도 죽이기 때문에 힘이 받쳐 주지 못해서다.

매사에 자신 있었던 우리 집 가장 동수 씨의 모습은 일상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중간에 목공을 배우겠다고 이런저런 공구들을 사놓고 딸의 침대를 직접 만들어 주겠다고 하며 합판까지 사놓고는 손을 놓고 있다. 양말목 공예도 한때는 하루 열 개도 만들었는데 요즘은 겨우 옆을 꿰매는 것만 한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흥미도 없어 보인다. 가끔 지인들 만나 얘기를 하거나 식사를 할 때도 너무 말이 없고 호응이 없으니 내가 미안하고 무안할 때도 있다. 그나마 세월호 이야기 나올 때만 입을 연다. 무기력증이라는 무서운 벽 앞에서도 세월호 하나만은 놓지 못하는 그 남자의 모습이 몹시도 아프다. 오히려 예전에 무언가에 미쳐있을 때가 더 좋았고 그리워진다. 그때는 동수 씨가 살아있다고 느껴지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정말 살아 움직이는 송장 같다. 무엇을 의논해도 본인은 잘 모르겠으니 나보고 다 알아서 하라고 한다. 지난 연휴 사흘 동안은 집 밖은 고사하고 안방에서도 나오지를 않는다. 오죽하면 딸이 셀프 자가 격리를 하는 아빠라고 했겠는가.

김형숙
2년 전인 2019년에는 마라톤 41.6km을 완주했다.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동호회원 사람들과 함께 한 덕분이었다.

우리가 근무하는 사려니숲길은 며칠째 폭설로 탐방소에 올라가지 못해 양쪽 입구에서 번갈아 가며 일한다. 근무지에 정착을 못 하니 마음도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내린 눈이 다 녹아 우리의 원래 근무지인 물찻오름 탐방소에 정착하는 것처럼, 동수 씨의 좋은 취미도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본인 건강에도 좋고 이웃과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면 더욱더 좋고 말이다. 물론 다른 것으로 또 움직여도 상관은 없다. 세상은 넓고 동수 씨가 가질 취미는 너무나 많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