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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못한 말 “아빠, 무죄예요”

스물한살에 겪은 아버지의 사건은 내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감정이 조절되지 않을 때가 꽤 있다. 예전에 방송에서 ‘전두환의 전 재산이 29만원이라 과징금을 납부하지 못한다’는 뉴스를 보고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얼마 전 종합편성채널에서 보도한 ‘5·18 때 간첩이 수백명 암약했다’는 이야기를 직장 동료가 식사자리에서 전해주는데, 그 자리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성격은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직장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소한 것이라도 견딜 수 없다. 동료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흥분하기도 한다. 남편도 내 의사표현이 너무 분명하고 강해서 힘들 때가 있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비슷한 일을 겪은 조작간첩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면 긴 말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막힌 일을 겪은 사람은 우리 가족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뒤 가족들마저 돌아서고, 출옥하고 홀로 남겨진 사람도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도 가족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이전에 하지 못했던 얘기를 서로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상처가 있기에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는 치유자인 셈이다.

요즘도 가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다. 꿈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날 보고서 환하게 웃고 등을 토닥여준다. 그런 아버지께 아직 못한 말이 있다. “아빠, 무죄예요.” 꿈에서라도 그 말을 꼭 하고 싶다.

2014.3.21. 한겨레신문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93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