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힘은 지난 8월부터 3.3기념사업회(사북민주항쟁동지회)와 함께 사북항쟁 고문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1980년 4월 사북 광부들이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을 외치며 무장 난동을 벌인 ‘사태’로 기록됐던 이 사건은 광부들의 검은 얼굴처럼 우리 사회와 역사, 지역에서 지워졌습니다. 그들을 ‘국가폭력 피해자’의 자리로 불러오는 데에는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2008년 권고)
진실의 힘은 당시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가 자행한 공개적, 전방위적, 무차별적 국가폭력에 주목합니다.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 명의 광부가 우발적으로 쏟아져 나왔고 사건 주동자를 찾기 위해 합수부는 셀 수 없이 많은 광부를 연행해 고문 조사했습니다. 피해자 재심 기록, 과거사위 조사 기록, 기존 구술 인터뷰 등 문헌 자료를 최대한으로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고문심층 인터뷰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현재’로 불러냈습니다.
우리는 사북항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누가 절대적 권력을 용인하고, 감춰내고, 책임을 면피했을까요. 그날의 고통과 절망을 넘어 사북 광부들의 삶은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소멸된 기록, 사라진 광부, 막을 내린 탄광처럼 1980년 5월 사실의 조각은 상당수 흩어지고 지워졌습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은 사금파리를 찾듯, 그날의 기억을 하나하나 모아내고자 합니다. 내년 1월 공개할 보고서에 앞서 이번 뉴스레터에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평생 잊고 싶었던” 그날의 기억을 꺼내주신 김해용 선생의 인터뷰를 싣습니다.
“종이를 한 장 꺼내놓더니 꺼먼지, 흰지 물어. 희다고 하니 주먹이 날라 오더라”
1943년생, 동원탄좌 덕대(하청) 1030항(갱도) 선산부(채탄, 굴진에서 선두에서 일하는 숙련 기술자), 경북 봉화 출신, 화전민 아버지를 둔 김해용은 국민학교 졸업 후 곧장 광업소로 가서 채굴한 원광석에서 아연을 골라내는 일을 했다. 광업소를 떠돌다 화절령 너머 덕대 1030항으로 갔다. 악착같이 일했던 김해용은 “1030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광부”였다. 여섯 식구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이 삶이던 그가 노동권에 눈을 뜬 건 직영 광부가 건넨 노동교본 때문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읽고서 그는 하청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노동을 하지만 직영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현실에 분노했다. 하청노조 대의원이 되고, 사측 편에 선 어용노조에 반기를 드는 동원탄좌 광부들과 함께 광산노조 상경 투쟁에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1980년 4월 사북항쟁 직후 김해용은 불법 집회 모의 혐의로 정선경찰서 임시 조사실로 끌려갔다.
확실한 날짜는 모르겠는데 이원갑 씨를 비롯해서 광부들이 다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날 오후 5시 넘었나. 딸내미 서이가 집 앞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낯선 사람이 와가지고는 “야 너희 아버지가 김해용이나” 물으니까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예 맞아요” 하고. “니 아버지 어딨나”고 하니 애들이 방에 있다고 했지. 그러고 나서 뭔가 이상했는지, 애들이 먼저 집으로 들어와서는 ”아빠, 아빠 이상해” 이러더라고. 누가 아빠 이름을 자꾸 물어본다는 거야. 그때 문이 확 열리더니만 “이놈 나와!” 하는 거야. 세 명이야. 사복은 아니고 경찰복같이 생긴 유니폼 입은 사람들. 옷 좀 갈아입고 간다고 하고 다시 나오니까 내 손을 등 뒤로 붙잡더니 허리끈으로 매 버려. 그러고는 길로 나가서 택시를 잡아. 내 기억에 택시가 확실해. 뒷자리에 태우더니 나를 중간에 두고 그 남자들이 양옆에 앉아. 그러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한 번씩 툭툭 때려. 운전하는 사람은 경찰 아니었어. 근데 경찰들이 나를 때려도 그 기사는 앞에서 암말도 안 해.
그렇게 고한지서로 갔지 싶어요. 갈 때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 고한지서 가더니 짚차보다 더 큰 차에 다시 태워. 나 말고도 세 사람이 더 있었어. 그때부터 “이 새끼 왜 잡혀가는지 알아?”라고 묻는 거야. 모른다 했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왜 모르냐면서 계속 머리를 쥐어박는 거래요. 아까 택시에서보다 더 심하게 때려요. 양쪽에서 막 사정없이 때려요. (웃음) 아까 택시에 탔을 적에 그냥 툭툭 건드렸는데 여기에서는 사정이 없어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 그냥 싣고 가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고 왜 안 무서워요. 둘이서 양쪽에서 때리는데 무섭지. 그렇게 해가 다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도착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 정선경찰서더라고. 정선서에 딱 들어가니까 바닥에 모포를 하나 쫙 펴 놓은 거야. 거기 엎드리라고 하더라고. 여기는 군복 입은 군인들이야. 넙죽 엎드렸더니 모포를 두루룩 말더라고. 그러더니 호스 요만한 거 가지고 얼마나 두드려 패는지 (웃음) 호스가 새까만데 수돗가에 물 대는 것보다는 조금 더 굵어. 개스 연결하는 줄처럼. 광산에 물 대고 연결하는 그런 호스인데 딱딱해. 모포에 나를 말아놓고 온몸을 치는데, 좌우간 머리만 안 때렸어. 머리는 모포 밖으로 내놨으니까.
“종이를 두고서 꺼먼지, 흰지 물어. 희다고 하니 주먹을 날려”
같이 끌려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보지도 못했어. 그렇게 때리고 나서는 다른 칸으로 가니 책상이 있고 거기 앉으라고 해요. 책상에 앉으라 하고서는 종이를 한 장 꺼내 놓는 거야. 그러더니 “이 종이가 꺼멓나 희나” 묻더라고. 종이야 희죠 이러니까 “이 자식 이게 왜 희냐”고 하면서 주먹이 얼굴로 들어오는 거라, 양쪽에서. 거짓말로 쓰라는 뜻이었겠지. 하이튼 그렇게 맞고서 진술서를 쓰는데 눈물하고 콧물이 막 나와서 쓰지도 못했어요. 맨 밑에 내 이름만 적었지. 이름은 적은 것 같애. 뭘 쓰라고 하냐면 이원갑이 하고 너거들, 대의원들 뭔 얘기를 했느냐, 뭘 조직했느냐 이거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맞은 게 하청이다 보니 동원탄좌 직영 대의원들하고 접촉할 일이 드물잖아요. 다 모르는 사람들이고. 근데 저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할 적에는 참말로 직영 대의원들만 모이지 나까지 부르지는 않거든요. 나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런 걸 자꾸 물으니까 내가 알 수 있나요. 모르죠 뭐. 나는 모른다 하니까 더 두들겨 맞은 거지. 왜 모르냐 이거야. 니가 같은 행동을 했으면서 왜 모르냐 이거지.
그 조사하는 사람은 내 옆에 바로 앉아 있었어. 옆에 앉아서 원하는 대로 안 말하면 때리는 거야. 주먹으로 사방을. 그리고 방 같은 데서 물을 맥인 거야. 물로 고문할 적에 다리 밑에다가 각목을 끼워가지고 한쪽은 책상에 걸고 한쪽은 잡아가 요래 달아놓는 거야. 머리를 여 딱 쥐고는 물을 한 주전자 계속 들이붓는 거야. 완전히 매달아 놓고 머리채를 쥐고 뒤로 젖히니까 몸이 완전히 뒤집히죠. 한 사람은 머리채를 쥐고 한 사람은 주전자로 물 붓고 그래 두 사람이 했어요. 그라면 나는 그냥 푸푸 하면서 계속 물만 먹지. 입하고 코로 물을 부으니까 배가 확 부르고 그렇게 몇 번을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정신을 잃었어요. 조금 있다가 깨어나긴 했는데 뭐 어떻게 된 건가 모르겠어. 깨어났는데 그 사람들은 옆에 그대로 있어. 그러고서도 다시 고문을 하는데 이번에는 각목으로 매 아까처럼 각목에다 매달아 놓고 여기(허벅지와 종아리를 잇는 관절 부위)를 때리는 거래요. 여기를 때리면 똑똑 소리가 나요, 똑똑. 그럼 발목까지 새까매져요. 때리면서 하는 얘기가 “너 이 자식 관절염 걸려 죽는다. 이 새끼 뒤져야 돼” 이러더라고. 죽을 수 있다는 얘기 들으니 아주 이를 갈았지. 어쨌든 살아야 되는 거 아냐. 그 사람들이 막 때리는데 내 뼈다구가 안 부러질 수 있나. 그래도 내가 결심을 대단하게 했지. 그렇게라도 견뎌야지 어떡합니까. 이를 꽉 물고 막 죽일라면 죽여라 이랬죠. 근데 그 말은 차마 못 했어. 매일 두들겨 맞으니 가족이고 뭐고 아무 생각 없어요. 그저, 어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
맨 마지막에는 내가 배운 게 없으니까 잘 쓰지도 못하잖아. 그러니까 자기들이 다 쓰고, 나는 이름만 쓰고 도장만 찍어가는 거야. 그러고는 한 놈이 와서 주먹으로 세게 때리고 나서는 “이 쥐새끼만 한 새끼가 쥐구멍 찾아 잘 찾아 들어간다”고 해. 그때 아 이제 영창은 안 가는구나 그 생각이 딱 나더라고. 집으로 갈 수 있겠다. 그래 한 20일 살고 나왔나. 며칠 있었는가도 몰라요. 하이튼 하루도 안 맞은 날이 없으니까요. 아이고 참 (눈물) 집에 오니까, 식구가 똥물을 큰 대접에다 하나 해놨더라구요. 뭐 헝겊으로 이래 덮어가지고. 원캉 아프고 죽을 지경이니까 마셨죠. 마시는데 냄새가 나는지도 몰랐어요. 벌컥벌컥 마셨어. 처음에 짭찌름하더라고. 아무 생각 없이 한 대접 마셨는데 다 마시고 나니까 온몸이 퍼렇게, 뭐라 그러나 두드러기, 그게 싹 덮어버리더라구요. 그게 똥독인데 많이 먹으면 죽는 거라. 그걸 몰랐어. 그거 마시고 좀 풀렸나 싶으면서도 온몸으로 두드러기가 나니까 나중에는 안 먹었지. 아 괴롭지. 괴로운 게 나만 괴롭힌 게 아니래요. 나온 이후에도 우리 아버지가 영월 상동에 살았는데 내만 거 왔다 가면 순경이 찾아오고 이장도 와가지고 뭐 묻고 계속 그렇게 찾아오드래요. 우리 딸래미도 학교 가면 저 엄마가 데리러 다니고 그랬어요. (눈물)
“내가 하도 모른다고 하니까, 이름이 같은 다른 김해용을 잡아 왔어”
내가 물고문을 받을 때 옆에 소리도 들리지. 죽는다고 막 고함 막 지르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뭐 아야 아야 하고. 어떤지는 못 봐. 아이고 내 정신 차리지도 못하는데 그거를. 나도 소리를 지르는 판인데 다른 소리가 잘 들립니까. 들리지 않죠. 나도 소리 지르는 판인데. 그러니 어쩌다가 한 번씩 다른 소리가 들려와도 거기 신경 쓸 수가 없지. 내가 우선 조금이라도, 한 번이라도 덜 맞아야 되는데. 아니 거짓말이라도 막 하면서 못 본 것도 봤다 그러고 뭐 자기네들이 부르는 대로 맞다고 맞다고 이러면 덜 맞겠죠. 그렇지만 나는 아는 게 전혀 없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할 게 없지. 만약에 거짓말해놓으면 계속 이원갑이 어쨌냐 그럴 건데 그게 뭔 꼬라집니까, 그게. 그 사람이 하지도 않은 걸 거짓말할 수도 없는 거고. 안 그래요? 아니 할 게 없잖아. 할 말이 없지. 본 것도 없지 들은 것도 없지. 근데 이 사람들은 그런 것만 자꾸 캐묻지. 내가 모르는데 자기네들 묻는 말에 맞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고. 그니까 더 맞았죠. 나중에 들었는데 내가 하도 모른다고 하니까 다른 김해용이를 잡아 왔다 하더라고. 나는 영월 김해용인데 강릉 김해용이라고 있어요. 내한테서 고문해서도 뭘 못 들으니까 강릉 김해용이 잡아다가 고문했다고 하더라고. 그 사람도 많이 당했다고 그러대.
고문한 얼굴 기억하냐고?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해요. 무조건 두드려 패는데. 오늘 누가 물고문하면 다음 날은 딴 사람이 오고 그래요. 사람을 막 갖다붙여. 그래도 기억나는 건 하나 있어. 사북 어데 그 지서 형사 같은데 그놈이 딱 들어온 거야. 내가 한창 물고문 받고 있는데 어떻게 물고문을 멈추더라고? 그러고 한 놈이 더 들어오더니만 “이 새끼 꿇어 않아” 이러더라고. 내가 꿇어앉으니까 허벅지에 나무판을 올려놓고는 워커발로 딥다(한껏) 밟는 거래요.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야 이 자식아 OOO이한테 다 들었다. 이놈의 새끼 잡아야 된다”고 하면서 밟는 거야. 발로 나무판을 막 문대뿌는데 어떻게든 안 밟히라고 움직일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가 홀딱 다 까지죠. 지금도 약간 흔적이 남아 있어. 그때는 두려움이고 뭐고 적게 맞는 것밖에는 생각이 안 나.
한 20일 지나고 나서, 나 말고도 한 10명은 같이 나왔지 싶어요. 내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죽 있었거든. 걸어 나가는데 멀리서 “이 자식들 주둥이 조심하라”는 그 소리는 한 번 들은 것 같아. 그때는 그런 말이 두렵고 뭐고 간에, 일단 나가니까 좋지. (웃음) 나랑 같이 나온 사람들 얼굴도 모르는데 뭔 얘기를 하겠어. 다들 자기 가족들이 와 있으니까 거기서 뿔뿔이 헤어졌지. 집 식구가 나와 있었는데 나 보려고 정선서에 여러 번 왔는데 면회는 못 했대요. 집에 가니까 이웃 아주머니하고 다 난리지. 다 몰려와가지고 가서 고생하고 왔다고 이러는 거야. 내가 안에서 어째 당했는지는 모를 거야. 면회도 안 시켜줬으니 당한 걸 어떻게 알아. 그냥 조사를 받았다는 정도만 알겠지. 나도 얘기 안 했어. 그거 얘기했다가 나중에 또 당하게? (웃음) 뭐 들어가서 어떻게 맞았네 이런 건 동료들한테도 말 안 했고. 두렵잖아. 또 잡혀가면 어떡해. 한 번 더 잡혀가면 영창 간다 이런 생각 했지.
다시 광산으로 갔어. 내가 그거 안 하면 먹고살 길이 없잖아요. 회사에서 나를 어떻게 취급할지 그런 건 전혀 몰랐고. 뭐 우리 항에 일하는 1300명 중에 한 10명이라도 같이 끌려갔으면 모르는데, 나 혼자 갔다 왔으니까 더 두렵지. 해고 시킬까봐, 일하러 오지 말라고 할까 봐. 광산으로 가니까 다들 물어보는데 그냥 뭐 잘 갔다 왔다 이래 얘기했어요.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는 두들겨 맞았다고 말했는데 처음에는 얘기도 못했어요. 누구한테도. 근데 나중에 남들헌테 두들겨 맞았다고 얘기해도 뭐 큰 큰 반응이 없어. 남의 일인데 뭐 반응을 보이고 그래요. 자세히 모르니까 그랬겠지. 내 상황을 잘 모르니까. 그렇다고 괜히 자세히 얘기했다가는 술 먹으면서 누가 그런 얘기 하더라 이러면서 자꾸 퍼지면, 또 나 붙잡아다가 난리 칠지 누가 아나.
“몸이 아파서 일 못 나가면 그 길로 바로 해고야”
그 후로는 몸이 아프잖아. 원래 광산에서는 3공수 반, 한 달에 삼일하고 반 공수를 빠지면 해고가 돼요. 근데 내가 선산부라서 일을 세게 하니까 몸이 아프잖아. 곡괭이질이 많이 한 날은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고. 어떨 때는 걸음도 잘 못 걷고. 그래 아파서 일 못 나가고, 일 나갔다가 집에 오면 드러눕고 이러다 보니, 한 달에 세 개 빠지는 건 쉽잖아요. 그럼 바로 해고를 시키는 거래요. 오늘 여기서 일하다가도 “야 니 뭐 잘못했으니까 나가” 이러면 그 길로 해고래요. 그러면 할 말도 없어요. 내가 이 사건 때문에 맞아가지고 아파서 일을 못 나가는데도 회사는 그걸 인정 안 해요. 그래서 나는 노동위원회 찾아가서 부당 노동행위라고 말한 거야. 내가 대의원했고 그때 끌려가서 맞고 한 것도 얘기했지 싶어요. 그것 때문에 몸이 아파서 못 나간 건데 해고를 시켰다고 말하니 노동위원회에서 복직 시켜주라고 했어.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딴 데 가서 일자리 못 잡아요. 딴 데 가면 전부 안 받아줘요. 서로서로 다 아니까. 근데도 아파서 못 나가는 일이 많으니 다시 해고되고, 그때는 안 된다 그러더라고. 그래도 내가 예전에 봤던 노동법 그거 없었으면 노동위원회 찾아가서 말하지도 못했지. 진짜 나 같이 (해고됐다고 따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참 그놈들 너무 했어.
남의 빚 내 가지고 트럭 한 대 사서 떠돌이 장사했지. 장사라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나는 광원 생활만 계속했는데. 뭐 빚을 갚아야 어디로 가든지 하지. 장사를 할 때도 몸이 말 안 듣는데 어떡해. 다리도 못 쓰고 그러니까 자연휴양림 여기라도 들어가서 있으라고 누가 말해주더라고. 1996년도였는데, 한 달에 얼마 주느냐고 물어보니 70만 원 준다고 해요. 돈보다도 편하게 일을 해야지. 사람 몸이 죽겠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있죠. 장사 댕기면 밥을 제때 못 먹는데 여기선 밥 제때 먹지, 걸으면서 큰 힘 안 들이고 운동하지 이러니까 여태까지 마 살고 있어요. 딴짓했으면 벌써 죽었죠. 벌써 죽었어.
“울고 댕기지 마라. 아버지 간첩이 아니니 학교 당당하게 댕겨라”
사북 이야기하는 거 올 4월에 큰 딸내미가 유투브로 본 모양이래요. 큰 딸내미는 그때 당한 일을 알거든요. 내 나오고 한 열흘 됐을 거요. 그때 사람들이 입에서 별별 얘기가 다 나왔겠죠. 그러니 애들이 그거 듣고 뭐 얘기하고 그랬을 거라. 그래서 막 우니까 엄마가 학교로 데리러 가고 그랬어. 아빠 방에 있다고 한 것도 갸고 자기가 다 기억하니까. (웃음) 사실 자기는 더 일찍 알았는데 아빠가 고통을 겪고 했으니까 말하지 않았대요. 근데 사북에 대해 더 많이 떠들고 하니까 아빠 이런 거 한다더라 하면서 얘기를 해. 딸내미는 학교 친구들이 그러는 게 자기도 제일 괴로웠다 하더라고. 맨 고 또래들이 놀림 삼아 “니 아버지는 간첩이야, 간첩이야” 이러는데 간첩이 아닌데 간첩이라고 하니까 집에 울면서 온 거야. 저 엄마는 학교에 데리러 가고 그랬지. 나는 “막 울고 그리 댕기지 마라, 아버지 간첩이 아니면 되잖느냐. 학교 당당하게 댕겨라” 이랬어. 뭐라고 얘기해. 그 쪼만한 거한테. 그때 아(이)들이 왜 그랬는지 몰라.
딸내미한테는 뭔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 못 했지. 잡혀갔다 왔다고만 하고. 고문 같은 거는, 아이고 그런 걸 어떻게 얘기합니까. 영월 상동에 사는 부모도 정선 가가지고 그렇게 고문당한 거 하나도 몰라요. 어머니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고. 그런데 내가 고향 왔다 가면 누군지도 모르는 청년들이 찾아오고, 마을 이장이 찾아와가지고 내가 뭐 하러 여기 왔느냐고 묻고 그래요. 그 순경 같은 사람들은 내가 어데 갔다 왔니, 누구를 만났니 이런 걸 묻더래요. 이장이 말하는데 아이고 그 사람이 뭔 죄를 지어가지고 여기 오기만 하면 자기한테 연락이 온다는 거라. 순경한테 연락이 온대요. 내가 거 가기만 하면. 아버지는 “너 뭔 죄를 짓고 댕기노” 이라는 거라. 죄지은 거 없습니다, 뭐 별일 아니라고 했어. 아이 힘들지. 그래서 자주 못 갔어요. 경찰들 자꾸 찾아오고 이러는데 자주 가면 신경 쓰이잖아요, 부모님은. 세상 떠날 때까지 몰랐어요. 아버지는 한 20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한 7, 8년 되고.
그때 사북에서는 이 사건으로 고문받은 걸 뭐라 했냐면, 간첩 잡으려고 했다는 거라. 사실은 간첩 잡기 위해서 전부 고문을 했다 그래. 어느 놈이 간첩인지 모르니까 그래 고문을 했다 그러더라고. 아이 나야 내보고 하는 얘기 아니니까 억울하고 어쩌고 할 것도 없지만 좋은 얘기는 아니잖애. 사실 간첩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간첩도 없었잖아요. 사실은. 그래도 내 있는 마을은 다 같이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사이는 좋았어. 딱 하나 경찰인지 뭔지, 워커발로 짓밟으면서 말했던 그 OOO이가 옆집에 살아. 통근버스 운전수였거든. 그 사람만 보면 괘씸하지. 괘씸하지만 어떡합니까. 화가 나도 뭔 말을 할 수 있나, 뭐. 맨 통근버스 운전하고 댕기는데 내가 뭐 말해봐야 회사 편인데. 내가 말해도 뭐가 되나? 얘기해봤자 나한테 해 밖에 안 돌아오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많이 당했어. OOO이가 뭔 얘기를 했길래 그랬나 싶었지. 계속 신경 쓰였어. 그 사람이 보기만 하면 속으로 저놈의 나쁜. (웃음) 그러고도 1년 넘게 옆집에 살았을걸. 근데 당뇨 걸려서 오래 살지 못했어. 죽은 지 몇십 년 됐어. 일찍 죽었어.
“지금은 아무리 얘기해도 잡혀갈 일은 없잖아요”
아니 난 요번에 사북 가서 놀랐어요. 내가 이원갑 씨한테 그랬지. 참 고생 많이 했다고. 여러 분들이 도와주셨겠지만 이원갑 씨 아니면 묻힐 뻔했잖아요, 사실은. 사북 행사를 그렇게 크게 하는 걸 처음 봤는데 기분이 좋죠, 뭐. (웃음) 저는 살라고 참말로 이를 아주 악물었던 사람이요. 살라고만 참. 한 현장에서 세 번을 해고당해 봐. 아주 기가 맥힌 일이지. 그런 나쁜 놈들이 어딨나. 그래도 나는 참말로 내 인생을 살면서 남한테 부끄럼 없이 살았습니다. 부끄럼 한 점 없이 살았는데 사실 이 사북항쟁이 사람을 더 죽였어요. 사람을 더 죽여 버린 거야. 그러나 그걸 이겨내가지고 지금은 참 잘살고 있습니다. 행복해요, 애들도 잘하지.
지금은 이런 얘기 한다고 옛날처럼 걱정되고 그런 거 없어요. 아무리 얘기해도 잡혀갈 일은 없잖아요. 잡혀갈 일은 없잖아 지금은. 계엄에서 잡아갔듯이 그렇게 잡혀가서 고문받을 일은 없잖아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솔직히 옛날 같으면 지금 이래 얘기 못 할 거야 아마. 세월이 참,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닙니까. 지금. 이래 얘기하고 나니 지금 후련합니다. 아주 후련해요.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도 안 해봤거든요. 근데 지금 이렇게 얘길 다 하니까 마음이. 불안한 것도 없습니다.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