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을 잃고 ‘김용균 보고서’를 얻다

전치형(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연구자, 기자, 시민들 모두 비슷한 물음을 가지고서 과거의 대형 사고와 재난 사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는가? 왜 우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차례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했는가? 

세월호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겪었던 참사의 기록을 들춰보려 했던 사람들은 곧 과거의 기록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당시 언론 보도를 찾아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구체적 참사에 대한 자세하고 종합적인 보고서를 찾는 것은 훨씬 어려웠다. 인터넷 이전 시기에 발간된 보고서들은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으로 쉽게 볼 수 없었다. 시중에서 유통, 판매할 수 있는 책으로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점에서 찾을 수도 없었다. 많은 보고서들이 정부기관 자료실 한 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터였다. 

이런저런 경로로 구한 보고서들을 앞에 놓으니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이 보고서들은 도대체 누가 읽으라고 쓴 문서인가? 참사 이후 누군가가 이 보고서를 읽음으로써 과연 참사의 실체를 파악하고, 문제점을 지목하고,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보고서들은 ‘국민’ 또는 ‘시민’을 독자로 상정하고 있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사의 진상을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쓰여진 문서라고 볼 수 없었다. 참사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수습과 복구의 성과를 내보이기 위해서, 읽고 토론하기보다는 적당히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 같은 보고서들이 많았다. 우리에게는 참사를, 죽음을 낱낱이 시민에게 ‘보고’하는 제도와 문화가 없었다. 

2016년 6월 말 정부가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로 종료한 조치의 가장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첫 공식 보고서가 나올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참사 후 2년이 지나도록 국가의 이름으로 발간한 세월호 종합보고서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2016년 3월 ‘진실의 힘’에서 발간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 정부 공식 보고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2017년 봄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면서 꾸려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침몰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하나로 모아내지 못한 보고서를 내고서 2018년 8월 활동을 종료했다. ‘내인설’과 ‘열린안’ 두 가지로 발간된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가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유일한 공식 세월호 보고서다. 세월호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함께 조사하고 있는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내놓을 보고서를 기다리고 있는 2019년 현재, 세월호 가족과 시민들은 여전히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김용균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될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는 이처럼 열악한 한국의 보고서 역사에서 중요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김용균 보고서’는 사건의 배경과 원인과 과정을 분석하고, 사건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제시한다는 보고서의 기본 기능에 충실하고자 했다. 좋은 보고서는 사건을 기록하고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한 시대의 증거가 된다. 좋은 보고서를 내는 것은 또한 남겨진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일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자식, 친구, 동료를 잃은 이들에게 그 죽음의 원인을 낱낱이 설명하지 않고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다그칠 수는 없다. 널리 읽히고 오래 기억될 보고서 없이 사건의 종결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고서의 발간은 사건을 조사하고 교훈을 얻는 작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김용균 보고서’는 김용균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마무리가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비롯된 반성과 변화의 시작이어야 한다. 보고서의 진짜 역할은 동료 시민들이 보고서를 집어 들고 읽을 때 비로소 수행된다. 보고서에 담긴 조금은 어려운 언어와 건조한 숫자가 한 청년의 삶과 죽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김용균 보고서’를 읽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배우고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보고서를 읽고 토론함으로써 실천할 수 있다. 함께 읽고, 학습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김용균 보고서’는 비로소 이 사회가 슬픈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청년 한 명을 잃고 우리는 보고서 하나를 얻었다. 청년을 잃지 않고 보고서 따위 쓰지 않아도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죽지 않았어도 될 청년의 죽음 앞에서 보고서 하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그의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수많은 다른 죽음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용균의 죽음을 조사하고 보고하지 않았다면 속절없이 또 닥쳐왔을 누군가의 죽음을 막아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