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 교수)

뉴욕에서 기차로 한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은 한국유학생들을 포함해 여러 나라의 국제학생은 물론 미국에서도 총 6만명의 재학생을 망라한 가장 다양한 대학중 하나로 꼽힌다. 아시아 언어 문화과에서 재직하면서 한국 현대사 수업을 하면 분단과 전쟁, 남북사이를 중점으로 다루게 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재미동포 학생들은 통일은 가능한지, 또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는지, 통일과정에서 겪게 될 이슈들은 무엇인지 토론하곤 한다. 한류가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미국에서도 그 붐의 효과를 느낄 수 있는데 학계에서도 한국어 수업이 그 어느 언어 수업 보다도 인기가 높다. 요즘 수강생을 모집하기가 힘들다는 인문학임에도 불구하고 문학, 문화, 역사 등을 포함한 소위 한국학 수업도 학생들이 꾸준히 선호한다.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학생들은 흔히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익숙해 하지만 정작 한류에 관심을 갖고 있음에도 남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남북사회의 차이를 단순히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또는 인권이 보장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호기심을 불어넣기 위해 좀더 친숙한 곳에서 부터 문제제기를 한다. 뉴욕 지하철을 타 봤느냐고 물어본 후 지하철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어떤 광고 또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지 기억해 보라고 한다. 뉴욕 지하철에는 수상한 ‘물건’을 보면 신고하라는 포스터를 볼 수 있는데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지적하는 이유는 아마도 미국의 오랜 인종차별 역사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인종’이라는 규범으로 식별하여 위계적으로 ‘질서’를 갖추고 백인우월주의를 유지하려한 미국 사회의 오랜 역사는 어떤 사람이 ‘수상’한 것이 객관적인 관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각종 사회적 위계 질서와 권력관계로 부터 나타나는 선입견이라는 비판을 가져왔다. 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여러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꾸준한 투쟁으로 이뤄낸 미국 사회운동 중 하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9.11 테러가 미국 사회를 뒤흔든 후 중동 배경의 사람들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의심을 받는 사람들은 미국 주민들로 부터 또는 당국으로 부터 받을 비난과 박해를 두려워해야 했고 실제로 아무 죄 없이 구금되거나 취조를 당한 사례도 많다. 이런 미국 내의 상황도 9.11 이후 태어난 요즘의 일반 대학생들에게는 역사로 밖에 모르기 때문에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직접적인 미국의 경험을 상기시킨 다음 서울 지하철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안내 방송 또는 포스터를 소개한다. “간첩, 좌익사범, 국제범죄, 테러, 산업스파이, 사이버안보위협 신고”를 권고하는 내용이다. 테러, 국제범죄, 산업스파이나 사이버안보는 미국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에 익숙할 수 있지만 ‘간첩’이나 ‘좌익사범’은 한국 현대사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1945년 분단으로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하고 상반되는 정책과 제도를 지원함으로써 결국 6.25내전을 치르게 된다. 양쪽은 상대방을 ‘적’으로 그리고 상대방의 ‘사상’이라고 간주되는 이념들은 ‘이적’으로 처벌하게 되는 그런 지속적인 전쟁 속에서 살게 되었다.

올해는 6.25 휴전협정을 맺은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적을 사람이 아닌 괴물로 상정한 냉전과 맞물린 6.25전쟁은 아직도 정전협정에 명기된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지 못했고 그럼으로 인해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다. 언젠가 부터 ‘좌익사범’은 ‘우익사범’에 대한 의문점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인지 ‘이적사범’으로 바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까지도 ‘간첩’과 ‘이적사범’ 등을 신고하라는 안내방송은 일상으로 녹아 있어 그 이면엔 어떤 진실이 있는지, 어떻게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무자비한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되고 사형까지 당했는지 안내방송을 문제삼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상냥한 목소리 뒤에는 무시못할 국가권력이 있다. ‘간첩’을 선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이적사범’을 색출하겠다는 공식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자유민주주의를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를바 없다.

그 상냥한 목소리가 무시무시함을 품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시민의 안식처, 관광객의 휴양지로 평온함을 선사하는 남산은 군사독재 시절 안기부가 자리했던 곳이다. ‘간첩’과 ‘이적사범’을 상대로 끔찍한 고문이 자행된 곳이고, 그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여전히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공원으로 둔갑해 있다. ‘국가안보’를 위해 한국정부는 미군의 주둔과 그로 인한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미군기지를 철거하기는 커녕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다. 말할필요도 없이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인권을 탄압하는 것은 이북도 마친가지다.

이렇게 일상속에서 전쟁 아닌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반면 진실과 정의를 위한 운동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투쟁도 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힘은 국가폭력에 맞서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힘, 아무리 칙칙한 어둠속에서도 단 한 가닥의 빛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희망을 보여주는 <진실의 힘>의 꾸준한 활동은 우리 모두에게 일상속에서 지나쳐 버리지 말고 귀기울여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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