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금기어는 ‘안전’입니다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님의 아내 김형숙 님
사려니숲길을 걸으며 청소 중인 김동수 씨. ⓒ김형숙

남편 동수 씨와 사려니숲길 탐방소에서 근무한 지 3년 6개월이 되었다. 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다면 8월 24일은 ‘사려니숲길 에코힐링체험’ 행사 시작 날이었다. 행사 기간이면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숲길을 피해 근무한다. 2년 전인 행사 때 일어났던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굳이 근무지를 벗어나 어딘가를 헤매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2018년 사려니숲길 행사가 열리는 어느 날이었다. 언론사가 주최한 이 행사 때는 사려니숲길 통제구간을 일부 개방한다. 우리가 근무하는 물찻오름도 평소에는 출입을 통제하는데 이 기간에만 특별히 개방한다. 동수 씨는 행사 전에 미리 물찻오름 코스를 올라 가봤다. 그런데 경사가 심한 데다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깔아두는 야자매트를 고정하는 철심이 올라와 있어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다칠 위험이 있어 보였다. 행사 며칠 전부터 동수 씨는 행사팀장에게 여러 가지 안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날은 팀장이 엉뚱하게 받아친 것이 화근이었다. 

동수 씨는 단지 안전에 문제가 있으니 점검을 하라고 이야기했을 뿐인데, 팀장은 ‘당신이 나에게 따지는 거냐’며 돌연 짜증을 냈다. 우리가 근무하는 곳에서 행사장 입구까지는 4km가 넘는데, 동수 씨는 ‘당신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곧장 입구로 뛰어 내려갔다. 내 힘으로는 동수 씨를 붙잡을 수 없어서 입구에서 근무하는 분에게 동수 씨가 화가 많이 났으니 팀장에게 상황을 잘 설명하고 이해를 시켜달라고 부탁하고 나도 뒤쫓아 갔다. 그때는 숲길에서 차를 탈 수도 없었던지라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동수 씨보다도 한참 늦게 입구에 도착했는데도 동수 씨는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서 근무하시는 분들도 동수 씨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나더니 동수 씨가 팔에 피를 줄줄 흘리며 오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는 깨진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그 자리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모두 무서워서 접근을 못 했고, 행사 관계자들도 모두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때 동수 씨가 숲길이 떠나갈 정도로 외쳤던 말. 

“나는 세월호에서 사람을 구하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이렇게 괴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안전하다고 해서 세월호를 탔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내가 안전에 문제가 있으니 보완하라고 했을 뿐인데 왜 내 말을 무시하냐!”

동수 씨는 깨진 유리병의 날 선 부분을 배 쪽에다 갖다 대고, 행사 책임자를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동수 씨가 더 이상 다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있는 힘을 다해 손에 들린 병을 빼앗았다. 그제야 같이 근무하는 분들이 동수 씨를 달래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응급처치를 했다. 동수 씨는 안정이 됐지만 행사 책임자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급히 응급실로 가니 유리병이 손등을 관통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신경 손상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도 나는 이 남자의 신경이 손상될지도 모를 손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깊이 남을 상처가 더 걱정됐다. 다음 날 수술을 하고 정신건강의학과에 입원해서 안정을 찾기로 했다. 나는 탐방소 담당 과장님께 전화를 해서 동수 씨 상황을 이야기하고 행사를 주최한 언론사 책임자가 사과하는 제스처라도 취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안 그러면 동수 씨는 계속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해 분노를 담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행히 과장님이 언론사 책임자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가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나는 여전히 봄마다 찾아오는 그 행사를 떠올리면 악몽을 꾼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취소된다기에 마음을 놓았는데, 다시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담당 주무관에게 우리는 행사 기간 동안 한라산 둘레길을 탐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요청했다. 지난해는 주차장에서 근무를 했는데 마주치는 사람이 많다 보니 동수 씨가 너무 예민해 했고, 옆에서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어서 힘들었다. 다행히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내려지면서 행사는 취소됐다. 일단 안심은 되었지만, 내년에 행사날이 다가오면 나는 다시 그날처럼 걱정하겠지. 

여름이 오기 전 동수 씨는 새벽마다 사려니숲길 10km를 걸으며 예초작업을 한다. 낮에 예초를 하면 길에 있는 돌이 튀어서 오가는 탐방객들이 위험할 수 있다며, 아무도 없는 깜깜한 새벽에 나가서 일을 시작해서 탐방 시간 전에 마무리한다. 사실 예초작업은 동수 씨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누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숲에 뱀들이 있어서 탐방객들이 위험할 수 있다고 스스로 하는 일이다. 어떤 때는 왜 저렇게 오지랖을 부리는가 생각도 든다. 

예초, 말벌집 제거 중인 김동수 씨의 모습. ⓒ김형숙

요즘은 정자 주변에 말벌들이 집을 짓는다. 보통은 119를 불러 말벌집을 처리하지만, 동수 씨는 그것도 직접 나선다. 119가 숲길에 오는 사이, 다른 응급 환자들을 이송하지 못한다는 게 동수 씨의 생각이다. 어떤 날은 집을 치우다가 말벌로부터 머리를 세 번이나 쏘였는데도 괜찮다고 했다. 이제는 말벌집 제거 전문가가 다 되었다. 

동수 씨는 매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일상이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차를 보거나-예를 들어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거나 차선 위반, 신호 위반 등- 숲길 앞에 불법주차를 한 것을 발견하면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충돌이 생길 때도 많다. 8월 25일은 제주에 태풍주의보가 내려 숲길이 전면 통제됐다. 그런데도 일부 탐방객들은 통제를 무시하고 숲길 안쪽까지 올라온다. 그럴 때면 동수 씨는 더욱 예민해진다. 제발 말 좀 들으라고, 사고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안전’이라는 단어가 동수 씨에게 어떤 압박감을 주는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본인은 안전하다고 말하는 세월호를 탔다. 안전하다고 믿었기에 아무 의심 없이 그 배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버스나 비행기를 타면서 나에게 어떤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의심조차 하는가. 그랬던 세월호에서 엄청난 참사를 당했다. 평생 지고 가지 못할 마음의 짐이기에 남편의 ‘안전’에 대해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된 큰딸은 지금도 겁이 많지만 어릴 때는 더 그랬다.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무서워서 쉽게 만지지도 못했다. 그럴 때는 내가 그것을 먼저 만지고, 안전하다는 확신을 준 후에 딸에게 시도하게 했다. 어쩌면 동수 씨에게도 어릴 때 내가 딸에게 했던 것처럼 안전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믿게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가, 사회가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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