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결되어야 한다 
: 생물학자의 눈으로 본 코로나 위기

이한솔 후원회원 · 생명과학 박사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실험실에서 박사 학위를 득했다. 들꽃과 새, 벌레에 이끌려 생물학을 시작했으나 돋보기를 너무 가까이 들이댄 나머지 전공 분야가 단백질 분자구조 연구에 가 닿았다. 연구자로서의 호기심과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탐구를 계속하려 노력 중이다.

생물은 주변 환경과 여러 다른 생명체와의 연결을 통해 살아간다. 인간이라는 생명체 또한, 세포라 불리는 수조 개의 개별 생명체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다. 생명체인 우리에게 있어 연결의 끊김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흔히 지금을 ‘언택트 시대’라 부른다. 

이전에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만 이루어졌던 많은 일들이,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덕분에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지 않고도 가능해진 보다 진보한 세상. 가까이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마주하고 목소리의 떨림을 주고받던 낭만이 점점 사라지고, 차가운 모니터 화면을 통해 얼굴을 보며 스피커 진동판을 통해 전해지는 음성을 듣는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진정 인류의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불행이 아닌가 하는 철학적인 의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 고전적인 낭만들이 사라지게 두지 않으려 끊임없이 애써왔다. 우리의 삶은 만나고 연결되어야 살아지기에.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도래한 언택트는 진보를 좇는 인류의 의지로 얻어낸 것도 아닌, COVID-19라 불리는 신종 질병이 초래한 못(un-) 만남(-tact), 두려운 단절과 죽음의 시간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COVID-19)가 세계적 재난이 되어 모든 만남을 끊어내고 있지만, 정작 이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SARS-CoV-2)는 아이러니하게도 숙주인 인간 사이 만남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존재다. 신종 바이러스 SARS-CoV-2의 모태인 코로나바이러스는 본래, 호흡기를 통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 기침과 재채기를 동반하는 ‘감기’라는 증상을 매개로 끝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옮겨가며 인간 곁에 오랜 시간 머물러왔다. 그러나 여러 숙주를 오가며 적응에 적응을 거듭하던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스(SARS)나 메르스(MERS)와 같이 치명적인 형태로 몇 번 변모했고, 이제는 인류사에 전례 없이 강력한 단절을 초래하는 위험한 바이러스가 되어있다.

만남과 연결을 통해 생존하는 바이러스, 그리고 가짜뉴스

바이러스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숙주를 옮겨 다닌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터전은 동물의 세포 내부이다. 숙주의 세포 속에서 충분한 복제를 마친 후 숙주의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 바이러스는, 속히 자신과 잘 맞는 새로운 숙주를 만나야만 생존할 수 있다. 그곳을 벗어나 숙주와의 연결이 끊긴 채로 시간이 흐르면 바이러스는 이내 분해되어 사라지고 만다. 헌 숙주의 몸을 떠난 뒤 말라 죽지 않고 운 좋게 새 숙주의 호흡기로 들어가 세포에 가 닿더라도, 새로 만난 숙주가 하필 다른 종의 동물이라면 바이러스의 생존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러다 간혹 미세한 유전적 차이를 통해 새로운 동물종에 대한 적응력을 갖춘 개체가 살아남으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들이 생겨난다. 

평범한 감기 정도의 증상을 일으키던 기존의 코로나바이러스가 높은 치명성과 전염성을 동시에 갖춰서 벌어진 지금의 끔찍한 사태가,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인간의 역사보다 더 오랜 기간 수많은 만남과 연결 속에서 실패를 딛고 일구어낸 유례없는 쾌거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쾌거는, 높은 체온을 가진 박쥐의 몸속에서 강한 생존력을 획득한 일부 코로나바이러스가, 또 다른 새로운 변이를 통해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는 형질을 얻음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대체적인 추론이다. 한편으론 유전자 서열분석 결과로 추정컨대, 알려진 것과 달리 최초 발생지가 우한이 아닐 가능성이나, 박쥐 외의 다른 중간 매개체의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들도 제시되고 있다. 

ⓒ게티이미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과학적 근거들을 충분히 살펴보지 않은 채 개개인의 인상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판단한다. 심지어 우한발 신종 바이러스가 생체무기 개발의 결과물이 아니냐는 의심은, 이미 전세계적인 팬데믹으로 확산되어 최초의 감염원을 파악하는 것에 대한 중요도가 관심 밖으로 밀려난 현재 시점에서는 철 지난 음모론처럼 느껴질 정도임에도 여전히 종종 대중들 사이에 머리를 디민다. 그 외에도 마스크 착용이 바이러스 차단에 별 도움이 안 된다거나, 생강차를 자주 마시면 바이러스가 예방된다거나, 헤어드라이기로 옷을 말리면 바이러스가 죽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수없이 많은 가짜뉴스가 손과 입을 통해 꾸준히 눈으로 귀로 전해진다. 

이런 류의 가짜뉴스에는 그 뒤에 “저명한 과학자” 혹은 “해외 유명 연구기관” 따위의 수식이 따라붙어 사람들을 더 혹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그 사실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기보다 전문가라고 언급된 미지의 존재들의 권위를 쉽게 인정하고 믿어버리는 것은, 해당 명제와 관련된 전문지식이나 논문에 접근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과학자” 혹은 “연구기관”이라는 단어가 갖는 고립된 인상도 한몫한다. 

만남과 연결을 통해 발전하는 과학, 그리고 진실

하지만 과학이야말로, 고립이 아닌 수많은 연결과 만남을 통해 발전한다. 태권브이 카프박사 같이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연구에 미쳐 있는 괴짜 과학자 몇몇이 골방에 틀어박혀서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곤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각자의 영역에서 알아낸 작은 깨달음을 재빨리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스스로도 다른 이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을 신속하게 수집하여 자신의 연구에 반영하는 것이 과학자 집단에 속한 개개인에게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다. 과학연구는 그렇게 연속적인 만남과 연결을 통해 끊임없이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는 과정이다. 

바이러스가 수많은 숙주 사이를 오가며 진화했듯, 연결과 만남은 변화를 낳는다. 학계의 정설을 부정하는 결론이 제시되더라도, 비록 시간이 걸릴지언정, 관찰내용과 실험설계가 신빙성 있고 합리적인 연구 결과는 동료집단의 검증을 거쳐 얼마든지 기존의 학설을 뒤집을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참신한 연구 결과라 하더라도 그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 의심스러움이 있다면 얼마든지 비판받고 재고될 수 있다. 

과학의 아름다움은, 과학을 하는 모두가 진실을 추구하면서도, 진실이라 믿고 있던 개념에 대해 일어나는 변화를 언제든 인정하기로 철저히 합의했다는 데에 있다. 과학에서 정답이나 진리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자들은 그저 인류의 지식이 거기에 한없이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뿐이다. 그 합의를 저버리고 자신의 주장이 정답임을 강변하거나, 권위를 근거삼아 다름을 쉽게 틀림으로 속단하고 무시하는 일은, 소중한 연결고리를 끊고 홀로 외로워지겠다는 어리석은 외침이다. 

과학 연구에서는 진실이라 생각되는 명제를 진실이라고 단정 짓는 것,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다가가는 접근법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맞는 이론”, “되는 기술”이라는 맹신 아래 강행된 연구 프로젝트는 꽤 오랜 노력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오류가 드러나게 되고, 연구 책임자 개인의 커리어는 물론 그 맹신에 희망을 걸었던 모두에게 시간적 물질적 타격과 좌절을 안긴다. 이를 막기 위해 연구자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감각이 주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끊임없이 자신의 연구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연결은 여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결되어 수시로 소통하는 타인의 시선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개인이 오류의 늪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는 중심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과학연구의 속성은 자연의 법칙 혹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 연구대상이라는 점만이 다를 뿐,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끊임없이 다투고 토론하여 합의를 도출해간다는 점에서는 다른 어떤 분야의 학문이나 사회적 문제 해결 과정과도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객관적인 사실을 넘어서 주관적인 견해, 충돌하는 다양한 가치관들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어려움에 봉착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분야이든 혹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든, 진실과 해답에 다가서는 방식에서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섣불리 진실이라 규정하기 전에 더 많은 분야, 더 많은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다각적인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작금의 코로나 위기와 같이 우리 사회 다방면에 얽히고설켜 영향을 끼치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결의 얽히고설킴이 문제해결의 시작일 수 있다.

연결이 만들어주는 해법

크고 작은 변이를 가진 코로나바이러스들이 생존경쟁을 벌여 그중 일부만이 인간 몸속에서 살아남았듯, 각기 다른 문화와 시스템을 가진 국가들이 각국의 방식대로 코로나바이러스의 광풍을 견뎌내고 있다. 인간사회가 이를테면, COVID-19에 의한 생존경쟁을 벌이는 중인 것이다. 

여러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대처는 여러모로 괄목할 만했다. 전 국민 가택연금에 가까운 수준의 봉쇄조치를 내린 나라들이나, 마스크 착용조차 개인의 자유에 맡기기를 요구하는 시위가 허용되는 나라들의 대처법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일견 적절하고 효과적인 절충안을 찾은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견이 많을 이러한 평가 또한 현재까지 나타난 현상에 대한 판단일 뿐, 그 조치들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보다 더 선제적이고 과감한 조치가 필요했던 것은 아닌지, 동선 공개와 같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조처가 부지불식간에 폭력적인 인권침해를 초래한 것은 아닌지 등등, 곰곰이 따져볼 여유 없이 시행된 여러 정책들이 어떤 부작용을 낳을지는 지금 알기 힘들다. 최근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전공의들의 집단휴진과 같은 이슈들은 의사들이 반대하는 정부 정책의 실효성이나 진료 거부의 당위성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의료계에 가해진 과부하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두려운 일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한국의 코로나 대처방식에서 나타난 성공적인 면모가 많은 부분 연결과 소통에 기인했다는 점이다. 5년 전 메르스 사태 때와 달리 정부는 세세한 정보들을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했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통의 노력을 해왔다. 또한 그것이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과 초고속인터넷 덕분인지 또는 아직까지 다양성보다는 일치감을 편안한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국민 정서 때문인지는 몰라도, 확진자 동선과 같이 정부에서 제공하는 코로나 관련 정보가 시민들 사이에서 빛의 속도로 공유되었고, 사회적 거리두기 규칙과 같은 정부의 시책들도 비교적 순순히 합의되고 지켜지고 있다. SNS를 통해 가짜뉴스가 빠르게 확산된다고는 하나, 그에 대한 팩트 체크 역시 비슷한 속도로 뒤따르며 논란이 뜨겁게 일었다가 식기를 반복한다.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이 비록 끊어짐의 위기에 처했지만, 온라인으로나마 한시라도 끊어지지 않으려 하는 노력이 신종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COVID-19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도 여느 때보다 긴밀히 연결되어 소통하고 있다. 작년 12월 우한에서 첫 대량발생 보고가 접수된 지 불과 2주만에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자 지도 분석이 끝나 그 결과가 모두에게 공개되었고, 누구나 접근 가능한 단백질 분자구조 데이터뱅크에는 현재까지 300개가 넘는 COVID-19 관련 단백질 구조정보가 축적되어 있다. 지난 9개월 동안 각종 저널에 게재된 COVID-19 관련 논문 수는 현재까지 12만 편이 넘었으며, 과학자들은 보다 빠른 정보교환을 위해 COVID-19 전문 아카이브나 프리프린트 논문 공유 사이트, 심지어 개인 SNS를 통해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데이터와 분석결과들을 공유하고 있다. 

풀어야할 과제는 여전히 산더미 같지만, 이런 노력들 바탕으로 COVID-19 치료제 개발 연구가 쉼없이 이뤄져 동물실험단계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보이고 있고, 백신의 경우 현재 9종류의 후보군이 임상 3상 실험 단계에 진입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이 신종 바이러스의 본질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을지, 개발중인 백신과 치료제 후보들이 효과적인 약물로 완성될 수 있을지 정확히 알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겠으나, 끊임없는 소통의 노력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정말로 다시 만나려면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만남과 연결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점이다. 그 규칙은 기본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전제로 한다. 일방적인 만남은 폭력이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만남은 위험하다. 생존을 위함이라고는 해도 바이러스가 인간을 만나는 방식은 결국 우리에겐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바이러스의 폭력일 뿐인 것처럼. 혹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섬세한 연결의 규칙을 지키면서 긴밀히 기능하는 수많은 세포가, 그중 하나라도 연결의 규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면, 일순간 암세포로 화하여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당분간 모임을 멈추고 마스크를 착용하며 불편한 일상을 감내하는 것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 우리의 연결을 지속하기 위해 합의한 최소한의 규칙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모두의 안전을 위한 합의로부터의 연결을 끊어내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는 자신 스스로를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 암적 존재로 발화하겠다는 우스운 천명과도 같다. 그 이유가 과학에 대한 불신이든, 정부에 대한 불호이든, 종교적 개인적 신념이든 무책임한 귀찮음이든 뭐든 말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 주권 회복을 기념하는 날에,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일로 여겨야 할 집단이 보여준 행동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들이 보란 듯이 철저히 규칙을 파괴한 여파로 우리는 또 한차례 커다란 단절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타자화하기 쉬운 특정 집단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는 주변 혹은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그 규칙을 어기는 크고 작은 사례들을 본다. 그 작은 단절의 사례들이 모여, 큰 위기가 되어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주지해야 한다.

'연대'를 통해 새로운 삶을 도모할 수 있는 힘이 샘솟기도 한다. ⓒ 영화 <로마>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연결되고 싶어 한다. 연결됨의 욕구는 생명체인 인간의 본성이다. 코로나로 인해 강제로 맞이한 언택트 시대에, 줄곧 사람들 사이에 단절을 야기한다는 우려를 낳았던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오히려 사람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라도 이루고픈 연결에의 욕구가 바로 생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이전과 조금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나마 꾸준히 연결될 것이다.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닌 전 세계의 수많은 누군가가 만나지 못해도 연결되는 방법을, 바이러스를 파훼하는 방법을 쉼 없이 찾고 있기에.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닌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는 반드시 해낼 것을 믿으며, 연결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정한 연결의 규칙을 지키며, 그리고 끝없이 만남을 갈구하며, 그렇게 우리는 연결되어야 한다. 이 사태가 끝난 후 맞이할 포스트 코로나 시대, 많은 것이 변한 후에도, 우리가 연결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