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는 항상 생기 넘치고, 밝은 모습이었다. 짙은 눈웃음과 인자한 미소로 손주들을 예뻐하시던 할머니의 품은 항상 따뜻했고, 한복 곱게 차려입으신 할머니에게선 항상 꽃향기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날의 할머니는 달랐다. 1980년 5월의 그날처럼, 할머니의 말에는 슬픔과 분노가 있었고 깊은 탄식, 그리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괴로움이 있었다. 진행자님이 표현하신 “의분”이라는 단어가 정말 들어맞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또 조심스럽게 그날의 일들을 이야기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엔 감출 수 없는 떨림이 있었고, 어느새 그곳에 앉아있던 우리 모두는 그날 그 시대에 와 있는 것처럼 할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 같았다.
할머니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할머니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청중들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할머니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 현장에서 생생하게 내 피부로 전달되었다. 할머니의 손자로서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피어나기도 하였다.
일찍이 할머니가 그날의 일에 대해 이렇게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난 듣지 못했다. 가족 모두가 가슴 깊이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를 비롯하여 나의 이모들과 삼촌도 구태여 그날의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의 광경, 할머니의 언어와 이모의 언어 그리고 또 다른 고통을 가진 청중, 아니 동료들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은 나에게 굉장히 큰 인상을 남겼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며 대화라고 생각한다. 세대 간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 현시대에, 단순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료로서 전한 할머니의 말들은 우리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누구보다 정의를 위해 열심히 뛰었던 할머니는 운동가의 언어로 우리에게, 아니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과연 지금의 우리는 “정말 잘 지내고 있느냐”고.
김홍덕(안성례 선생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