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가져다 준 용기, 편지
‘소설 쓰는 사람’을 꿈꾸는 임근규 선생이 ‘진실의 힘’으로 편지를 보내온 건 2017년 겨울이었다. 밤마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이 촛불 시위로 들끓던 때였다. 그가 쓴 편지는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 깊은 곳에다가 꾹꾹 눌러놓은 것 같았다.
“켜켜이 쌓인 세월 속에서도 잊을 수가, 잊을 수가 없어 너무너무 억울하고 답답한 나머지 더는 참을 수 없겠다는 마음에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제게 일어났던 과거의 일들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 드리오니 부담은 전혀 갖지 마시고 들어 주시기만 해도 감사한 마음이겠습니다.”
‘들어 주시기만 해도’ 라는 말에 이끌려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는 1986년 11월 12일 이른 아침 일어났던, ‘소름이 돋는 끔찍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자신을 태운 차가 “커피 색깔의 포니 2”라던가, 첫 조사를 받았던 곳이 ‘507보안부대’라던가, 그곳의 간판이 <충남기업사>라는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그는 잠자던 안방에서 느닷없이 연행됐다. 곁에는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과 딸이 함께 자고 있었다. 우당탕 대문을 열고 쳐들어온 그들이 ‘떼강도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전 507 보안대 소속 수사관들이었다. 그곳은 입구에 <충남기업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지만, 야구방망이와 곡괭이 자루 등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고문실이었다. 운동권 학생도 아니고, 반정부 인사도 아니었지만, 시도 때도 없는 매질과 고문으로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대학생들에게 허위사실을 유포”한 반국가사범이 되고 말았다.
241일의 감옥살이는 짧았는데, 출소한 뒤 삶은 오히려 위태로웠다. ‘간첩’, ‘국가보안법 전과자’라는 이력은 자신의 노력, 헌신, 땀, 눈물을 단번에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았다. 노력해도, 또 노력해도 삶은 단 한번도 자신의 과녁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2004년 12월 혈혈단신 중국 땅으로 건너갔다. 다시는 이 땅을 찾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고향이란 고통과 모욕과 슬픔만 안겨준 곳이었고, 꿈마저 잡아먹은 곳이었다. 그런 그에게 2년 전 급성 당뇨가 찾아왔다. 근처 병원을 찾았으나 치료가 어렵다는 부정적인 말만 들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싸뒀던 보따리의 끈이 슬쩍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걸까. 죽기 전에 이것만은 내가 풀고 가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때마침 고국에서는 날마다 촛불 시위 소식이 들려왔다. 작은 촛불은 어둡고 한없이 추운 길림 땅, 임근규의 마음 속까지 번져왔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임근규의 삶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그날의 기억에서 도망만 다녔던 임근규 선생은 영하 2~30도를 기록하는 꽁꽁 언 겨울의 땅에서 손에 힘을 주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억울한 과거를 풀어볼 수 있을까요?”
막걸리와 보안법
곧 답장을 보냈다. “한국으로 오세요!”
겨울이 지나고 2018년 봄과 함께 임근규 선생이 서울에 오셨다. 우선 남아있는 사건의 기록을 찾아야 했다. 당시 상황을 증언해 줄 사람들도 찾아야 했다. 검찰청과 국가기록원을 오가며 기록을 찾아다녔다. 공소장이나 판결문을 토대로 기억을 더듬어갔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답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선생이 겪은 일은 그 당시 안기부, 보안사, 대공분실 등 수사기관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허위자백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이들이 대부분 겪었던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공소장과 판결문에서 문제 삼고 있는 발언들 모두 대학가 술집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는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과 가끔 술을 마셨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 사건이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져온 군사독재정권은 국민의 입과 귀를 꽁꽁 틀어막았다. 그것의 법적 기제가 바로 국가보안법. 술자리에서, 홧김에, 혹은 농담으로 내뱉은 말을 국가보안법이라는 그릇에 주워 담아 구속하고 감옥 살리고 했던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면전에서 철거반원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 운운한 것은 북괴의 학정을 겪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북괴에서는 대한민국보다 나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될 것이고 그곳에 가서 살아보겠다는 의사도 내포된 것이라 할 것이어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해당된다."(대법원 1970년 8월31일 선고, 70도 제1486호 사건)
국가보안법 제7조는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를 처벌하는 조항인데, ‘찬양 고무’라는 애매모호한 내면적 행위를 형벌로 처벌한다는 점이나 그 적용 범위가 자의적이고 무한 광대하다는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비판을 받아왔다. 올해 7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건재하다. 임근규 선생을 처벌한 말은 “광주사태 시 청년들이 군사팟쇼정권에 대항하였는데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2.000여명을 죽였다”거나 “하루빨리 미군을 쫓아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말을 북한방송을 통해 들었고, 이를 술자리에서 전파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 고무 동조’했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나눈 이 말이 북한을 찬양했다는 어떤 연관성을 찾기도 어렵지만, 광주 시민을 학살한 이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술자리 대화가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어떤 경우는 이런 말들이 ‘국가기밀’로 돌변하기로 했다. 임근규 선생은 그나마 형량이 약한 ‘찬양 고무죄’에 걸려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인가.
보안사, 민간인을 불법체포하여 고문 조작
곧장 서울로 오신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며 의문은 한가지로 모아졌다. 민간인을 수사할 권한도 없는 보안대는 임근규를 어떻게 알고 잡아갔을까? 왜 임근규만 구속됐을까?
충남 예산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임근규 선생은 “동네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으나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서울로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왔다. 그 뒤로 이어진 고행은 성인이 되도록 이어졌다. 스물세 살 때 만난 여성과 결혼한 뒤로 일이 잘 풀려나갔다. 이제 좀 살겠다 싶으니 가슴 깊이 눌러둔 꿈이 살아났다. 소설을 쓰고 싶다! 닥치는 대로 소설을 읽었고, 돈이 모이면 서점부터 달려가 책을 샀다. 언젠가는 소설을 쓰리라, 생각했다. 가난하고 힘없던 소년 시절을 버티게 해준 꿈이었다. 마침 중앙일보사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서 이호철 선생이 소설창작교실을 열었다. 그 길로 서울을 오가며 세상에 대한 관심도 넓어져 갔다.
어느 날 임근규 선생은 자주 가던 다방에서 열린 대학생들의 시화전을 보게됐다. 순수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쓴 젊은 대학생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마음 속 깊은 갈증과 문학에 대한 동경을 풀어냈다. 소설과 시를 사랑하는 젊은 학생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문학을 이야기할 때는 너무나 행복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책 읽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토론했다. 그 대학생들이 서서히 군에 입대하면서 술자리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끌려간 것이다.
끌려간 곳에서 혁대도 없는 빛바랜 군복으로 갈아 입혀진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끌려가던 순간이 마치 오페라의 서막처럼 이어질 일들을 예고한다. “운동권 학생도 아니고, 반정부 운동을 하던 사람도 아니었던” 임근규 선생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철제 의자에 손이 묶인 채로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매질을 당해야 했다. 고문실에는 빳다와 곡괭이 자루, 포승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는데, 보안대라는 명칭도 무섭고, 군복입고 사정없이 휘두르는 그들의 매는 악몽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학생들에게 술을 사주며 북한을 찬양하는 말을 했고, 그 이야기는 모두 북한방송을 듣고 안 것’이라고 자백하는 것이었다. 술 마시며 함께 온갖 이야기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특별히 정치나 사회 이야기를 주제로 나누지는 않았다. 그가 부인하자 그 대학생 후배들의 진술서를 보여줬다. 군 입대한 후배들이었다. 말도 안되는 내용들로 채워진 진술서. 그러나 임근규는 서운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군에 입대했던 그 후배들이 자신처럼 당한 끝에 자신이 이곳으로 끌려온 것임을 직감했다.
“너 혼자 아니라고 해봤자 소용없다”는 수사관들의 협박 반 회유 반, 결국 그들의 말대로, 불러주는 대로 적어줬는데, 나중에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공소장에 버젓이 올라왔다. “북한방송을 들었다”고 거짓자백했다. 문제가 된 발언인 ‘광주 시민들 2천여명이 죽었다’는 얘기는 시중에 공공연하게 떠돌던 말이었다. 공소장이나 판결문에 나온 대화들이 북한방송을 들어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방송을 들은 적도 없는 임근규 선생은 고문을 면하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진술서를 작성한 뒤에야 보안대에서 충남경찰청 대공분실로 옮겨졌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자신들의 민간인에 대한 불법 수사를 감추기 위해 구속영장 발부 시점도 경찰로 이송한 이후로 거짓 작성했다. 하지만 진실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기록 곳곳에 ‘보안부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무학자가 소설을 꿈꾼 댓가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군인 아닌 경찰이라 나을 줄 알았지만, 덜하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어 머리를 집어넣는 물고문을 당한 뒤로 “다 잘못했어요” 싹싹 빌었다. 이유도 없이 그들에게 무조건 빌 때 그는 몰랐다. 잘못했다고 빌었던 그 말들이 자신을 떠나지 않은 채 60 평생, 무력감과 자괴감에 휩싸이게 할 줄은. 두들겨 맞는 거야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옅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욕과 모멸감은 오래도록 그를 놔주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임근규 선생이 <8억인과의 대화> 등 수많은 책을 읽고, 집 안 가득 온갖 책들이 쌓여있고, 소설과 시를 좋아한 것을 대놓고 모욕하고 조롱해댔다. “네까짓게 무슨 소설을 쓰냐”며 한없이 조롱하며 비웃었다. 무학자가 소설을 꿈꾸고 대학생들에게 술을 사준 댓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무학자는 사회에 관심을 가져도 안되고, 대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은 붉은 의도가 있는 것이고, 더구나 글을 쓰는 것은 의심스런 짓으로 몰렸다. 인생이 통째로 재단되고 그들 마음대로 시궁창에 짓이겨졌다. 가난 속에서도 소중하게 품고 온 꿈, ‘소설쓰고 싶은’ 마음도 함께 쳐박혔다.
임근규 선생은 대전교도소로 넘겨져서 검찰 조사도, 재판도 받았다. 재판정에는 그토록 매질을 가했던 보안대 수사관 3명이 방청석에 와있었다. “용서해달라”는 말 외에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함께 술을 마셨던 대학생들은 군인이 되어서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1명은 휴학해서 입대한 현역군인이었고, 1명은 막 제대한 직후였다. 겁먹은 얼굴의 그들은 검찰이 묻는 대로 “예예예” 짧게 답하고 나갔다. 서로 눈 한번 마주칠 수 없었다. 그렇게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년이라는 징역형을 선고한 이는 김이수 판사, 나중에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된 분이었다. 항소한 뒤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 중 일부 몇 마디, 그것도 엄청나게 침소봉대된 말로 범법자가 됐다는 사실이 임근규 선생은 너무나 부끄럽고 스스로 못나 보였다. 시국사범이나 반정부 인사였다면 더 떳떳했을 것이다. 출소했지만 정보 경찰들은 시시때때로 찾아와서 동태를 살폈다.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감시했다. 가족들의 불안과 원망도 커져 갔다. 일상도 깨졌고, 오랜 꿈도 사라졌다. 마음 붙일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결국 길림 땅으로 건너간 것이다.
32년 만의 해후, 32년 만의 진실
길림성에 사는 임근규 선생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검찰청, 국가기록원 등 관련 기록을 신청하는 한편으로 당시 법정에 증인으로 섰던 그 후배들을 찾아 나섰다. 사건 발생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후배들. 30년 전 함께 막걸리 마시며 함께 시를 읊던 후배들, 그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것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어렵사리 찾은 후배는 32년 만에 만난 임근규 선생에게 말했다. 군복입은 신분을 이용해서 거짓 진술을 강제하고, 그걸 근거로 무고한 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던 시절. 그런 야만의 시대는 저물었을지 몰라도, 후배는 32년 세월 그 무게만큼의 미안함과 무거움으로 살아야 했다. 후배가 말했다. 군에 입대하자마자 유성에 있는 국군휴양소로 끌려가 쉴 새 없는 매타작과 물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발버둥 칠수록 물은 코로 입으로 눈으로 쉴 새 없이 들어왔고 까무러치길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썼고, 받아쓰기를 반복했다. 불러주는 내용이 사실과 달라서 받아쓰기를 멈출라치면 주먹이 날아왔다. 그러고도 또다시 507보안부대로 끌려갔다. 과거에 쓴 진술서를 보완하라는 것이었는데, 북한방송을 들은 일이 없다고 했다가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검찰도 가고 법원도 갔다. 갈 때마다 ‘충남기업사’ 사람들이 데리고 갔다. 임근규 선배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비무장지대로 데려가서 쏴 버리겠다”는 협박이 군 복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때의 일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거 관심도 없고 잘 알지 못했던 순진한 대학생이 갑자기 보안사에 끌려가 두들겨 맞고 군 복무 내내 감시를 당했다. 제대한 이후로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 사이 두려움도 잦아들었고,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과 대면을 시작했다.
32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그 시절을 기억해냈고, 눈물을 흘리며 껴안았고, 또 눈물을 흘리며 서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날 밤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 한 자 한 자 풀어내시길
임근규 선생은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변호인단’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대전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년여를 기다린 끝에 재심 개시 결정이 났고, 잇달아 재판이 열렸다. 그리고 6월 26일! 밤새 잠을 설친 임근규 선생은 대전 법원으로 향했다. 법정에는 옛 친구들 서넛이 왔다. 재심을 계기로 연락이 닿은 친구들이었다.
“판사님이 무죄라고 말씀하실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온갖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 부인과 자녀들에게 ‘무죄’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제일 좋았다. 그리고는 덤덤했다. 기쁜지 슬픈지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 그 정체를 쉽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32년 만에 법원에서 당신은 무죄입니다, 라고 말한들 이미 찢기고 상처난 선생의 삶이 어떻게 재생될 수 있을까. 평생 삶을 옥죄어 왔던 억울한 감정, 임근규 선생 마음의 빛깔이 되어버린 그 감정이 쉽사리 떨어질 수 있을까. 울음인 듯, 웃음인 듯 인사를 건넨 임근규 선생은 다시 길림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길고 긴 편지를 보내왔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저는 이제 30여 년 동안 담가두었던 '문학'을 향한 힘찬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제 심연 속의 깊은 상처들을, 애초 그 쓰라리고 막막한 아픔의 단초가 되었던 '소설'을 통해서 시원스레 한번 풀어보도록 전진, 또 전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걸 통해 제 가슴에 쌓인 한을 다 풀어보도록 노력, 또 노력하겠습니다.”
30년 동안의 심연 속을 가득 채웠던 상처들과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기쁨, 의지, 희망 중에서 어떤 것이 임근규 선생의 여생을 비춰줄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선생이 오래된 꿈을 다시 펼쳐보겠다는 용기, 오래도록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과거의 얽힌 실타래를 직접 풀어보겠다는 의지, 바로 그것일 테다. 그의 삶에 꿈이 돌아오고 미래가 생겼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고 반갑다.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글로 옮기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지만 임근규의 말이라면, 그보다 뜨겁고 그보다 깊을 수는 없으리라. 32년 동안 갇혀있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와서 가닿아야 할 곳, 그 말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도록 임근규는 길림의 밤을 지필 것이다. 말들이 쏟아져 나오면 이제 그는 고통과 슬픔의 페이지를 넘겨서 못다 했던 꿈, 멈춰있었던 삶을 다시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