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의 또 다른 이름은 ‘파란바지 의인’입니다. 당시 현장을 찍은 헬기영상과 생존자들의 진술에는 어김없이 ‘파란바지 아저씨’가 등장합니다.
2014년 4월 16일, 김동수 씨는 헬기 구조바스켓에 아이들을 먼저 태워 보냈고, 기울어진 갑판을 뛰어다니며 협곡처럼 변한 객실과 출입문 사이에 소방호스를 연결해 승객들을 구조했습니다. 10시 21분, 세월호가 선체 바닥을 드러내던 때에도 김동수 씨는 다섯 살 난 아이를 먼저 넘기고 자신은 마지막으로 해경 배에 옮겨 탔습니다. 눈앞의 해경을 보자마자 그가 했던 말은 ‘구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기 이, 삼백 명이 있으니 제발 빨리 구해주세요.” (<세월호, 그날의 기록> 143, 165, 170~174쪽 발췌 요약) 그날, 김동수 씨는 20여 명의 승객을 제 손으로 ‘구조’했습니다.
2020년 6월, 다시 김동수 씨의 이야기입니다. 생존자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그가 사회에 원한 것은 ‘의인’ 대접이 아니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국가의 대응, 그리고 ‘살아남은 자’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였습니다.
며칠 전 예전에 살았던 집을 가봤다. 지금 24살인 작은 딸이 6살 때 살던 집이다. 마침 집을 세놓은 상태라 내부까지 들어가 봤다. 두 딸은 예전에는 넓은 집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이렇게 좁아 보이냐고 말했다. 당시 우리는 지인이 운영하는 마트 안에서 수산코너를 하고 있었다. 죽은 생선 하나도 손질 못 했던 내가 팔딱팔딱 뛰는 활어를 잡아서 포를 뜨고 썰고 배달까지 하며 악착같이 살았던 시간이었다.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때면 어린 딸들이 소시지를 볶고 계란프라이도 해서 도시락을 싸 오곤 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일해도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못이라도 하나 박으면 집주인이 내려와서는 ‘남의 집 살면서 못 박고 사는 것 아니’라고 했다. 또 사용하지 않는 외부 화장실에 자전거를 뒀는데 태풍이 와서 화장실 유리창이 깨졌다. 그러자 우리 자전거 때문에 유리창이 깨졌다며 집주인이 수리비를 받아 갔다. 그래도 전혀 서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집주인 구박받을 일도 없고 휴일마다 꼬박꼬박 쉬고 두 딸은 이제 내가 돌보지 않아도 될 만큼 컸음에도, 내 삶은 왜 이리 고달픈 걸까.
지난 5월 2일 응급구조사로 일하는 작은딸을 만나러 대구를 다녀왔다. 제주로 돌아오는 대구공항만 잘 통과했다면 완벽한 일정이었는데, 신은 우리에게 완벽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항 도착 전 딸 친구가 사주는 저녁을 거나하게 얻어먹고, 공항에 도착해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동수씨는 나들이 갈 때마다 똑같은 가방만 메고 다니는데 그 가방은 김해공항, 제주공항 그리고 제주에서 대구로 오는 길에도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했다. 그런데 이날은 공항 직원이 가방을 열어보겠다고 했다. 가방에서 손가락 길이만한 작은 휴대용 칼이 나왔다. 공항 직원은 기내에 반입이 안 된다고 했다. 동수씨는 김해공항, 제주공항도 그대로 통과했는데 왜 여기서만 문제가 되느냐고 물었다. 공항 직원은 “항공법 안전상 안 된다”고 답했다.
동수씨는 ‘안전’이라는 단어에 또 흥분하고 말았다. 당신들이 안전을 얼마나 아느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순간 나는 아직 응급의료법위반사건 재판*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동수씨를 말렸다. 공항 직원에게도 동수 씨가 세월호 생존자이고, 트라우마를 앓고 있어 감정조절이 어려우니 제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지 말아 달라고 무릎까지 꿇고 빌었다. 그런데도 그 직원은 영상을 찍겠다고 했고, 항공법에 따라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나이가 지긋한 직원 한 명이 동수 씨를 알아봤다. “저 사람 뉴스에서 봤다. 세월호 아이들을 구한 사람이다” 그분이 나서서 직원들을 말리면서 일이 마무리되는 듯 보였는데, 그사이 탑승객이 민원을 넣은듯 했다. 이미 나는 탑승객들 앞에서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하다, 남편이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이라 감정 조절이 어렵다, 그러니 이해를 해달라고 연거푸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동수씨와 실랑이하던 직원은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했다. 동수씨가 “나는 세월호에서 살아 나왔고 국가에서 버림받아 괴물이 되었다”고 말하며 윗옷을 걷어 올려 자해 상처를 보여준 것이 공포감을 주며 협박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동수씨를 대신해 사과했다. 그리고 다른 탑승객들도 기다리고 있으니 제발 제주행 비행기를 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이 이번에는 “남편이 기내에서는 괜찮겠냐”고 물었다. 동수씨는 다시 분노했다. “내가 범죄자냐. 내가 왜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해하냐”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순간 사복경찰이 다가왔다. 공항 직원들이 소란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나는 또다시 사정했다. “아까 제가 무릎까지 꿇으면서 사과했으니 제발 이대로 보내달라” 경찰은 다른 탑승객들이 기다리니 우선 내 번호를 남기고 가라고 했다. 나는 명함을 주고 겨우 비행기에 탔다.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고 자리에 앉았다. 1시간이 지난 후 제주에 도착할 때가 다가오니 슬슬 ‘제주공항에 경찰들이 나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제주공항은 무사히 통과했고, 마중 나온 딸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안도했다. 아무 일 없는 듯 집에 와서 정리를 하고 누우니 눈물이 났다.
나는 왜 매일 동수씨가 어떤 상황을 겪은 사람인지 설명해야 할까. 왜 매번 무릎까지 꿇어가며 죄송하다고 빌어야 하나. 지난번 응급실 사건 이후 법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범죄자’가 되기에, 경찰이 오기 전에 상황을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응급실 트라우마를 극복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공항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그날 대구공항에서 ‘제발 이해해달라. 좀 도와달라’고 사정하는 나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쳐다보면서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는 국가도 나 몰라라 하는 세월호에서 혼자 미친놈처럼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한 동수씨가 정말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 5월 19일 아침, 동수씨는 40알에 가까운 수면제를 복용하고 응급실로 실려갔다가 깨어났다. 그날은 원래 동수씨가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로 재판을 받는 날이었다. 다른 연유로 재판은 연기된 상태였다. 사전에 어떠한 징후도 감지하지 못했던 나와 딸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동수씨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재판도, 지금의 상황도 너무 힘들어서 그냥 며칠 간 푹 자고 싶었단다.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이었다.
제주대병원 담당 교수님은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길 수 있어 입원을 하고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반 진료와 달리 입원은 단지 동수 씨가 병원에서 진료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24시간 내내 보호자 없이는 입원을 할 수 없어서 가족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여러 차례 병간호하면서 나는 연차를 거의 써버려서, 공부를 하고 있는 큰딸에게 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낮에는 큰딸이 밤에는 퇴근한 내가 병실을 지켰다. 그동안 무한 반복했음에도 병원 생활은 여전히 우리에게 슬기롭지 못했다.
예전에 자폐아들을 둔 엄마가 아들이 돌발행동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내 아들이 자폐아라서 그런다, 이해해달라”며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지금 나의 모습이 겹친다. 내 남편이 중증 트라우마 환자라 그러니 제발 이해해달라고 고개 숙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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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 세월호 의인이 ‘진상 환자’로 재판받아…“생존자 트라우마 외면했다”, 20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