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서늘하게 내린 10월 21일 밤, 진실의힘 사무실에 사람들이 한 분 두 분 모이기 시작합니다. 2014년 광주비엔날레 프레스 오프닝 개막작인 <Navigation ID>의 작가 임민욱 선생님과 <가면권력:한국전쟁과 학살>의 저자 한성훈 박사님의 강연이 있는 날이거든요. 쌀쌀한 날씨에도 많은 분들이 참석하셨답니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친 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먼저 임민욱 선생님이 <Navigation ID>에 대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죽임 당했고,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억울한 죽음은 아직 그 장례를 치루지 못했습니다. 170여 곳의 소위 ‘민간인학살지’는 노란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 발굴이 이뤄진 곳은 채 스무 곳도 되지 않는 상황이지요.
발굴이 이뤄진 17곳 중 두 곳, 2001년 발굴 이후 13년째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되어 온 경산 코발트 광산의 유해와 올 2월이 되어서야 발굴된 진주지역의 유해가 광주를 향합니다. 앰뷸런스가 행렬 맨 앞에서 달리는 건, 긴급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컨테이너 속의 유골은 말이 없습니다. 버스에 묵묵히 앉아있던 유가족들은 터질 것 같은 마음, 그 고통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운구행렬은 조용한 사이렌을 울리며 광주로 흐릅니다.
우리에게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은 5월의 광주에도 수많은 눈물과 한이 있습니다. 떠나간 이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고통은 광주에 진득하게 머뭅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국가폭력의 비극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벗어나고 싶을 만큼 괴로운 상처가 언제쯤 아물 수 있을까요.
임민욱 선생님과 한성훈 박사님은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남겨진 이들이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학살되고 홀로 살아남은 이, 어머니의 몸을 통과한 총알을 맞고 살아남은 이,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돌아온 건 간첩이라는 멸시도, 서투른 위로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이 서로 손을 잡아줍니다. 아버지가 그립고, 어머니가 그립고, 친구가 그립고, 동생이 그리운 마음이 모여 강을 이룹니다. 경상도의 손과 전라도의 손이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어 줍니다.
그리고, 다시 광주.
<Navigation ID> 퍼포먼스의 전 과정은 당일날 오마이TV로 생중계 되었습니다. 광주에서는 오월어머니집 회원들이 이를 지켜보며 유족을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비엔날레 전시장에서는 최정우 뮤지션의 연주가 운구행렬과 함께 해왔습니다.
광주에 도착한 진주와 경산의 유해. 모인 이들이 제를 지냅니다. 가려진 눈으로 나는 타인을 볼 수 없으며, 타인은 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유가족들은 앞으로 걸어나갑니다.
<Navigation ID, From X to A>는 다큐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감독은 임민욱 작가님, 프로듀서는 한성훈 박사님이시구요. 잠깐 쉬는 시간 후 다큐멘터리를 시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의 시간.
김태룡선생님은 국가폭력피해자로서 광주의 고통을, 또 경산과 진주의 고통을 고요히 지켜보셨습니다. 한성훈 박사님은 저서 <가면권력: 한국전쟁과 학살>에서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으며, 가해자를 실명으로 기재했다고 밝혔습니다. 증언한 분들의 결연한 용기를 담은 책입니다. 감옥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들어야만 했던 김태룡선생님의 목이 메입니다.
많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 준 강연이 끝난 후, 임민욱 선생님과 한성훈 박사님이 준비해 온 광장시장 빈대떡과 오이소박이, 김밥을 먹으며 더 깊은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막걸리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대화가 가을밤을 수놓습니다. 저마다 고민거리를 마음에 품은 채, 진실의힘 사무실을 나섭니다.
<Navigation ID> 흑백사진 출처: Creative Commons Li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