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3일 목/ 진실의힘

<색, 계色,戒 Lust, Caution>

연출 : 이 안(2007,중국) 출연 : 양조위, 탕웨이

컬럼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적과 동지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세계, 사악한 적이 지배하는 세상을 끝내기 위해 목숨을 내건 투쟁은 의로운 일이다. 그러나 강한 적을 허물어뜨리기 위해서는 이중적인 계략이 필요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고전적인 미인계는 강력하게 작동한다. 에로스 에너지를 가진 남성이 적대자로 존재하기에 그렇다. 부당한 권력을 누리는 적과 그걸 파괴하려는 자 양쪽 모두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외로움의 극단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목숨을 건 사랑이라는 열병은 피안의 세계로 작동하여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를 압도한다. 자기파괴적인 타나토스 에너지와 자기부정적인 에로스 에너지는 뫼비우스띠의 경계없는 양면처럼 하나로 흘러 돌아간다. 이안은 바로 그 지점을 유장하면서도 섬세한 미장센을 통해 탐구해 나간다.

1940년대 상하이, 저항조직은 친일 괴뢰정권의 관료 이장관(양조위)을 유혹하고 암살시키는 임무를 왕가지(탕웨이)에게 부여한다. <색,계>를 여성첩보물로 설정시키는 이런 플롯은 ‘마타하리’류의 할리우드식 고전 서사나 <쉬리>에서도 되풀이 된다. 색을 이용하여 적을 파멸시켜야 하는 첩보원이 오히려 적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적을 구해주고 자신은 파멸하는 자기배신적 서사는 팜므파탈의 순정을 증명하는 결말을 맺기도 한다. 공의적인 임무보다도 사랑이라는 열정이 더욱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런 서사는 여성이 첩보원일 때 주로 작동하곤 한다. 남자에겐 일과 사랑이 공존하지만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전제가 서사공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여성첩보물의 한계이다. 이 영화의 서사도 그 속에 포함되지만, 그런 상투성을 넘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계략적 사랑게임이 진실한 그것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대한 치밀한 내면탐구이다. 부인들의 마작판에서부터 둘만의 은밀한 공간에 이르기까지, 비밀 저항조직의 안가에서부터 권력이 집행되는 근엄한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두 남녀의 감정은 연기와 진실 사이를 미세하게 오간다.

연극과 마작판

마작판으로 열린 영화는 나중에 다시 되새겨보면 장차 일어날 사건의 핵심을 상징기호들을 통해 예시해준다. 바깥 세상의 혼란과 물자 부족을 심심풀이조로 이야기하며 벌어지는 부인들의 마작판, 우아한 치파오를 세련되게 빼입고, 화려한 장신구에 정교한 화장으로 모양을 낸 상류사회 여자들이 매니큐어로 단장한 손으로 마작패를 다루는 장면들이 여러 가지 앵글로 클로즈업 된다. 그 속에서 가장 젊은 막부인으로 위장한 왕가지의 자태는 수줍음을 가장한 교교한 매혹을 발산한다. 이 부분은 원작인 자아이링의 동명 소설에서도 마치 영화장면을 예고하듯이 막부인의 이미지를 화장술까지도 포함한 섬세한 시각적 묘사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조각을 하듯 정성스레 바른 립스틱을 바른 두 입술만은 선홍색이 금방 뚝뚝 떨어질듯 반짝였다’, 와 같은 식으로. 여기에 이장관이 등장한다. 마작패에 눈이 팔린 이장관의 부인 앞에서 오가는 이장관과 막부인의 시선, 그들의 시선은 빗나가는 듯 주위를 헤매다가 욕망의 당사자에게 정확하게 꽂힌다. 물론 이 빗나가는듯함 자체도 정확하게 계산된 것이다.

마작판에서 둘의 해후가 일어나기 4년 전 상황이 플래쉬백으로 끼어든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홀려야만 하는 계략의 정체를 알려주는 서사 정보이지만, 4년동안의 부재는 정작 그에게 그리움을 키우며 욕망의 억압을 폭발시킬 에너지를 비축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의 주도로 둘의 본격적인 밀회가 시작된다. 아니다. 서사의 내막을 다 아는 우리이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그녀가 그가 주도하게끔 유혹적 계략을 짠 것이다. 세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정사장면은 노골적인 몸의 뒤섞임을 전면화한다. 그가 그녀의 옷을 찢고 그녀를 허리띠로 묵은 채 강간적 섹스를 해내는 가학적인 첫 번째 정사장면은 이후 혼신을 받쳐 해내는 섹스의 경지로 발전된다. 섹스는 몸으로 하지만, 그 비의는 몸을 떠나 영혼의 경지에 이르는 쾌락이라고 지적한 카트린느 브레이야의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몸 위에 마음 혹은 영혼을 올려놓으며 몸을 억압한 이상적 인간론을 뒤엎으며, 인간 존재는 오로지 몸 자체에 놓여있음을 간파한 니체적 인간이해가 이제 두 인물에게 그대로 실현된다. 이 부분에서 의아스러운 점은 4년전 유혹녀가 되기 위해 동지로부터 섹스훈련을 받던 그녀의 무덤덤하고 의무적인 태도가 돌변한 점이다. 그러니 이 분야에 관한한 지난 4년간 그녀가 어떤 진화를 겪었는지, 혹은 그를 진정 사랑하게 돼서 그런 모든 체위가 가능해졌는지 어느쪽으로건 이 농익은 섹스장면을 정당화시킬 이유는 알아서 짐작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의 창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가 일본 술집에서 그에게 술을 따르며 온몸으로 부르는 노래, ‘이 세상, 어느 누가 청춘의 봄날을 사랑하지 않으리오. 소년과 소녀는 바늘과 실이라네, 오 나의 아름다운 사랑이여,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는 바늘과 실이라네’. 영원히 함께하는 사랑은 불가능하기에 우리를 매혹시킨다. 암살에 대한 공포, 반민족적 행위로 얻은 권력의 공허함, 그리하여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는 소년처럼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에서, 그러니까 계략이 물이 오른 이 지점에서 그는 그녀의 사랑을 믿지만, 과연 그녀도 그런 것일까? 적어도 그를 사랑하는 척 해야 하는 위장에 미안함과 흔들림을 느꼈을 것이다.

이 정도쯤에 이르면 철면피같은 반민족적 기회주의자인 그가 더 이상 악당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왕가지에게 처단할 적이라기보다 허장성세의 가련한 연인으로 보이는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소설에서 선명하게 묘사하듯이 ‘봉황의 꼬리 위에 얹혀있는 사람처럼 왜소해 보이는’ 그는 ‘깔끔하고 창백한 얼굴에 갈매기 모양으로 약간 벗겨진 이마를 가진’ 쥐를 연상시키는 서상을 했지만 외롭고 가련해 보인다. 이런 이중성, 감춰 둔 내면의 고통과 외로움이 위악적으로 포장된 차가운 겉모습을 압도하는 이런 면모가 그를 증오할수 없게 만든다. 그런 면모는 이안의 연출과 농익은 화학작용을 벌이는 양조위라는 배우 특유의 연민을 자아내는 우수에 젖은 이미지가 획득해내는 덕목이다. 연륜어린 양조위에 비해 내면이미지의 발산에선 역부족이지만 탕웨이가 연기하는 왕가지도 외로운 인물이다. 전쟁과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외국행과 재혼으로 버림받은 그녀는 내밀한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을 강한 자의식 속에 감춘채 위장 신분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외로움을 알아차린다. 하긴 사랑에서 외로움과 연민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그런 외로움, 그래서 더욱 도피처가 되는 사랑은 얼굴에 새겨진다. 영화란 무엇보다 얼굴의 예술이기에, 이야기가 제시하는 복잡성과 써스펜스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주된 존재이유는 얼굴이며, 그것을 불온한 인간에 대한 친밀감으로 간파한 르 클레지오의 지적은, 얼굴 클로즈업으로 쌓아나가는 보석상 장면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계략의 진실이 폭로되는 이 장면에서 (첫장면인 마작판에서 언급되었던) 다아아몬드 반지가 실물이 되어 그녀의 손에 끼어진다. ‘누가 노리면 어떻게 하느냐’, 며 반지를 빼려는 그녀에게 그는 말한다. ‘내가 지켜줄게’, 라고. 두 사람의 얼굴 클로즈업이 반복적으로 교차한다. 전편에 걸쳐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남자 특유의 유연함을 수줍게 폭로한다. 그런 그의 표정/내면을 알아본 그녀는 사랑을 확인하는 감동과 그걸 배신해야 하는 갈등에 직면한다. 그의 사랑에 부응하지 마자 동지들을 배신해야 하는 딜레마, 어느쪽을 택하든 치명적인 배신이 되버리는 악몽같은 순간의 혼란과 분열이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다. 순간 ‘가요’라는 짧은 주문이 던져진다. 상황이 급변한다. 부드러웠던 그의 얼굴은 순간 경직된다. 사랑의 진실이 폭로되자마자 계략의 진실이 폭로되는 최악의 상황이다.

서사질서에 따르면, 사랑에 눈이 멀어 임무를 저버린 여자 첩보원의 행태나 아마추어 연극단 저항조직의 행태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정의와 부정의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점에 유감을 표할만하다. 그러나 조직에 대한 충성과 개인적 사랑이 애국과 배신으로 온전하게 구분되는 사적인 삶의 지평이 왕가지에겐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고백된 광위민(왕리홍)의 사랑이란 것,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미인계로 이용하는 계략이 애국적이라고 정당화되기에는 인간적인 혐의가 있다. 그 역시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말한다. 마치 이장관이 보석상에서 그랬듯이. 그러나 진실은 냉혹하다. 어떤 남자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지만, 그녀는 사랑의 약속을 지켰다. 광위민에 대한 사랑으로 임무를 맡고 이장관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위기에서 구해낸 뒤 그녀는 침묵 속에 처형된다. 그런 문맥에서 여성첩보물로 분류될만한 이 영화는 집단의 일원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인간 개체의 내면에 대한 탐구이며. 그것은 인간됨의 고통이자 환희인 사랑의 탄생과 그런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진실의 발견에 대한 성찰담이기도 하다.

유지나 08/07/01

출처 : 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