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는 재단법인 진실의 힘 상임이사에서 한 사람의 후원회원으로 돌아갑니다.
공교롭게도, 우리 진실의 힘을 후원하는 회원들이 생기기 시작한 지 10년이 된 해입니다.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우리 선생님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지만, 또 10년을 함께 해온 회원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새삼 감사하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려고보니 진실의 힘을 처음 만들던 때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김태룡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새겨져있습니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조작되어 20년을 살고 나와보니 내가 살았던 지도가 사라져버렸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고 싶지만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니고 집도 이미 집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집이 되자, 몸과 마음이 무너진 폐허 위에, 사라져버린 고향과 집을 재건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고문과 국가폭력 피해자들, 더 나아가서 인권의 피해자들이 돌아갈 집이 없어졌을 때 집이 되는 것. 힘겹게 길 위에서 싸우는 피해자들이 언제고 찾을 수 있는 곳, 고문과 국가폭력의 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한 걸음 더 들어가기 위해 찾아오는 곳, 진실의 힘을 그런 곳으로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구제의 대상이고, 피해의 사례자이고, 통계의 수치에 불과한 피해자들이 자신의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활동하실 수 있도록 법적으로,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돕자고 생각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고통에 정당한 이름을 부여하고, 사회적인 이슈로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가 사람에게 이 사회에 가닿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도왔습니다. 그것이 진실의 힘을 만든 우리 선생님들의 뜻이고 바람이라고 믿고 실천해왔습니다. 처음의 다짐대로 잘 걸어왔는지, 그런 바람에 값하도록 일해 왔는지, 마땅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지금 저는 여전히 아쉽기만 합니다.
10년 넘도록 일하는 동안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선생님들의 삶에서 절망이나 좌절보다는 희망과 환희 같은 것을 봤습니다. 선생님들은 제게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호기심 많은 저는 선생님들에게 배우고 익힌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주저앉고 싶을 때면 선생님들의 삶을 이어온 따뜻한 사랑, 정의를 향한 열망이 저를 이끌어줬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날들을 간절함과 설렘 속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오로지 진실의 힘에 집중하며 살아왔으므로, 이곳을 나서는 것이 어떤 것일지 저는 가늠조차 못하겠습니다. 더하지 못해서 아쉽고, 더 많이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고, 마땅히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문을 나선다니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진실의 힘이라는 집이 있으므로, 길에 나설 수 있습니다. 사랑과 열정, 뜨거운 연대와 깊은 위로 가득한 돌아올 집이 있으므로, 지금 나서는 낯선 여행이 두렵지 않습니다. 함께 해온 힘으로, 노동 없는 민주주의, 가난한 이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인권, 지금 우리가 봉착해있는 현 주소 앞에서 조금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내겠습니다. 진실의 힘에서 배운 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겠습니다.
진실의 힘은 집입니다. 인권피해자들의 집이고, 피해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진지입니다. 집이 제 기능을 하려면 마땅히 집을 지키는 식구들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반겨주고 상처 난 곳을 어루만져주고,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런 식구들 말입니다. 우리 후원회원들이 바로 그런 식구입니다.
잠시 제가 집을 비우는 동안, 집 앞에 나무도 심어주시고, 꽃도 심어주시고 해도 잘 들게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선생님들 곁을 잘 지켜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수많은 인권피해자들이 문을 두드릴 때 두 손 벌려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서로 몸과 마음의 건투를 빕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