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7일, 진실의 힘에서 열렸던 ‘작은 음악회’ 촬영이 다큐멘터리 <1991, 봄> 제작 결정 후 첫 촬영이었으니까, 벌써 5년의 시간 넘게 이 영화와 함께하고 있다. 3년 반 동안 제목을 세 번이나 바꿔가며 <1991, 봄>을 제작했고, 그 후로도 2년 가까이 이 영화를 배급하는데 품을 들이고 있다.
<1991, 봄>은 1991년 김기설의 유서대필 조작사건과 그 사건이 가려버린 희생과 생존자들의 현재적 의미들을 기록해 두고 싶었던 다큐멘터리 영화다. 트라우마로 박제돼버린 기억과 철저히 잊힌 망각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수없는 아픈 이름들만 흐릿하게 되풀이 되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는 사람들조차 영화 자체보다 먼저 영화의 배경 설명에 적어도 한 문단 이상을 필요로 했으니, 여전히 이 시간의 이야기들은 기억의 몸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해야겠다.
이 영화의 시작은 강기훈 선배와의 만남으로 비롯되었다. 원래는 조작사건에 가담하는 검찰들과 수사관의 블랙코미디를 목표로 극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뵈었었는데, 만남 후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픈 역사마저 가해자를 중심으로 서술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무엇보다 나 스스로 강기훈이라는 한 사람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기타를 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세상이 달라 보였다. 말로만 꿈꾸는 세상, 글에만 존재하는 변혁. 부박한 그 언어들을 뛰어넘어, 그의 손가락이 튕겨내는 음들로 채우는 그 순간들은 고통의 시간을 걸러내는 마력이 충분했다. 그는 그 기억들을 재차 강변하기 위해 음악이라는 언어로 잠시 갈아탄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기타를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는 내게 해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영화가 되었다. 분명히 내가 목격한 그 연주 속에는 문자 언어만으로는 표현 불가능한 힘이 있었고, 나는 그저 그것을 고스란히 필름 속에 담아낼 곤경들만 견뎌내면 되는 것이었다.
차마 놓을 수 없던 밥벌이를 병행하면서 늘 허둥지둥하는 영화제작의 일상이 반복됐다. 나는 밥벌이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완료 시제를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제작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설명해야 할 때도 나는 그와 비슷하게 곤란해지곤 했다.
영화제작의 타임라인은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대한 재심과 배상심을 포함한 재판 일정에 걸쳐 있기도 했지만, 촬영 시작 당시 있었던 세월호 참사로부터 궤를 그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애초의 제작 목표는 영화제 출품이나 개봉을 고려하지 않은 영상기록물로 남기는 것이었지만, 영화 내의 출연자가 언급하듯 이 사회에 반복되는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들은 이 영화를 세상에 한 발짝 더 나오도록 만들었다. 고통의 기억들은 단순한 점의 모양이 아니라 그 점들이 무수히 이어진 선의 모양으로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의 마음에 길을 낸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어김없이 저항권을 발동했던 주권자들이 그려놓은 선을 품은 역사였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이 그러했듯, 91년 봄 멈추지 않던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자들을 아파하고 자신을 던져서라도 마지막까지 불의한 권력과 다른 이들의 침묵에 맞서 주권을 행사했던 이들은 이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고전 영화도 조예가 깊던 강기훈 선배가 사라방드를 연주하기 전에 영화 <배리 린든>의 한 장면을 묘사한 적이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촛불 사이로 사람들이 속삭이는 풍경.
<1991, 봄>은 2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공식적인 종영 일자는 김귀정 열사의 28번째 기일인 5월 25일이었지만, 매달 이 영화를 불러주는 분들이 있었다. 최근의 상영은 서울교육청에서 320분의 교사분들 앞에서 있었고, 다음 주에는 일본 요코하마 극장에서 상영 스케줄이 잡혀 있다. 이 영화를 단체관람이나 공동체 상영 등으로 불러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큰소리의 볼륨이 아니라 다가와 건네는 귓속말의 볼륨이다.
배상심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여전히 남아 있다. 부디 대법원이 당시 검사들과 국과수 분석실장에 대한 면책판단을 질책하며 고법에 반송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에는 그를 옹호하던 에밀 졸라가 있었으나 우리에겐 혐오의 언어로 무장한 식자들이 있었던 그 현실들이 중고교의 일반사회 교과서에, 로스쿨 입시학원 교재 맨 앞에도 실리길 바란다.
특히 검찰의 1심 공소장은 국어책에 실려 대대손손 웃음거리가 되기를 바란다. 드레퓌스 사건에 관여했던 판검사와 아직까지 망언을 멈추지 않는 이 사건의 이름들과 함께, 많은 이들이 인용했던 드레퓌스가 손주들과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사진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