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호 후원회원│ 말이 많고 자신을 설명하는 것을 좋아해, 종종 여기저기에 짤막한 글을 쓰면서 놀곤 합니다. 주로 나에 대해서, 그러니까 공학하고 일하는 것에 대해, 신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춤을 추고 노래하는 일에 대해, 여행하고 떠돈 기억에 대해 씁니다. 몇 년 전 사고로 장애를 얻은 후로는 장애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도 종종 쓰곤 해요.
문득 예전 사진을 둘러보다가 북한산에 올랐던 사진을 보고 좀 놀랐다. 북한산은 산성이 있는 곳에 올라 내려다보던 서울 시내 풍경이 멋있었다고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정상 백운대에 오르는 길이 제법 험하고 무서웠던 것이 사진을 보니 깨닫듯이 생각났다. 바위 절벽을 따라 로프 난간을 믿으며 올라야 했기에 굉장히 무서웠고, 바람도 제법 쌩쌩 부는 날이어서 걸음을 옮기기가 겁이 났다. 그렇지만 그렇게 오르고 나니 그 바위 위에 내가 섰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벅차게 감동적이었다.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북한산 자락과 서울의 풍경, 공포가 느껴질 정도로 위태로운 암벽 길, 사진으로도 느껴지는 산 정상의 거센 바람과 뿌옇고 창백한 초겨울의 저녁 햇빛, 누가 봐도 설렌 표정의 지금보다는 어린 김권호.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니 그날의 감각들과 감정들이 조금씩 생각났다. ‘내가 여기를 올랐구나. 이제는 오르지 못할 텐데. 다행이다. 다치기 전에 올라봐서 다행이야.’
결국 장애라는 것은 틈틈이 내가 무엇을 못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일이다. 20대에 시작한 모든 국립공원의 사계절 다 보기 프로젝트는 일단 미루었다. 그나마 20대에 모든 국립공원 한 번씩 가기 목표는 성공해서 다행이다. 몇 개월간 침대와 휠체어 생활을 할 때는 다 나으면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볍게 뛰거나 까치발 같은 동작들은 여전히 안 되니 원하는 만큼 자유로운 춤은 내내 못 추지 싶다. 살면서 한 번쯤은 번지점프라던가 패러글라이더라던가를 해보고 싶었는데, 2년 전 터키 여행을 갔을 때 패러글라이딩을 포기한 것은 좀 아쉽긴 했다. 다치기 전 겨울 스노보드 실력이 꽤 늘어서 고급 코스에서 즐겁게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아마 스노보드를 다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급할 때 달려 나가지도 못하고 때때로 소변이 잘 안 나와서 헤매는 것도 여전할 테니까. 가끔은, 제대로,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걷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조금 그립다.
그런 것들은 참 안 괜찮지만, 또 생각해보면 개중엔 다치기 전에도 못하던 것들이 훨씬 많다. 애초에 나는 제대로 된 춤을 춰 본 적도 없고, 번지점프나 패러글라이딩은 기회가 있어도 겁을 냈으니까. 타고나길 운동을 워낙 못해서 단체 운동은 어디서 하든 깍두기 신세였지, 뛸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문득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좀 헷갈린다. 제대로, 건강하게, 정상적으로의 기준은 어디 있는 걸까? 연말정산 때 공제도 받았고, 병원에서 진단서를 다시 받아 후유장애보험금도 받은 것을 보면 그 경계가 어딘가에 있긴 있을 텐데 말이다.
미혼인 데다 별다른 공제항목도 없어서 장애인 인적공제는 제법 쏠쏠하다. 13월의 월급까지는 아니어도, 예상치 못한 거금 지출은 막아준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되기 전 받은 6등급의 복지카드 덕분에 문화재 입장료 같은 것도 할인받는다. 장애 등록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장애 등급 기준을 알아봤을 때, 척추 뼈마다 점수를 매겨놓은 표는 좀 신기하긴 했다. 장애라는 것이 참 인위적이고 사회적으로 정의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장애를 겪고 이겨내는 일도 생각보다 사회적으로 일어난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은 언제나 다정한 친구들에게서 오니까. 때로 사람들은 내가 몸의 장애에도 우울해하지 않는 것을 신기해하지만, 나는 그냥 내게 주어진 윤택함에 대해 계속 생각해본다. 나는 2인실 병실에 있을 수 있었고, 회사에서 병원비가 나왔고, 3개월을 쉴 수 있었고, 몸의 운동 기능이 덜 필요한 일을 하고 있고, 부양해야 하는 가족도 없으니까. 나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정신력 같은 것은 별로 믿지 않는다. 노인분들보다 6인실 병실의 답답한 공기를 더 잘 버티거나, 진료 대기 시간을 더 너그럽게 보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스마트폰을 덜 피로해하며 쓸 수 있고 조금 더 체력이 좋기 때문이지, 정신력 같은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병원에 있다 보면 이 공간이 장애를 덜 느끼도록 구성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평탄하고 턱이 없고 문이 넓은 화장실과 공간들, 지지할 곳이 많은 복도, 전자 키오스크 사용을 돕고자 대기하시는 분들, 침대와 휠체어가 먼저 타도록 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낮은 위치에 설치된 대부분의 스위치들. 이런 곳에서는 장애를 크게 의식할 일이 없었다. 다만 병원 밖에서도 좀 덜 피곤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라면 좋겠다. 대중교통이 빠른 속도가 아닌, 장애인과 교통약자를 포함한 모든 대중의 편리한 이용을 고려해 운영되면 좋겠다. 모든 인도가 휠체어가 다닐만하면 좋겠다. 그리고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좋겠다. 사람들은 종종 내 몸이 더 나아지지 않는 것을 우려하고, 그 우려에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답하면 실망할까봐 걱정되지만, 솔직히는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은 삶이고 사회면 좋겠다. 왜냐면 어쨌든, 춤을 출 수 있거든.
간밤 꿈엔 까치발로 뛰어다녔고, 나는 내가 까치발로 뛰어다니는 것을 알고 꿈인 것을 알았다. 꿈에서 깨면 까치발로 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다시 깨닫기를 바라면서, 꿈속에서 최대한 방법을 느껴가며 까치발을 뛰었다. 깨어나서 까치발로 뛰게 되지는 못했지만, 그 꿈들이 쌓인다면 언젠가는 다시 까치발로 뛰게 되겠지. 그렇지만 뭐, 뛰지 못해도 상관은 없다. 어쨌든 요즘은 운동을 하고는 아무 노래에나 맞춰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으니까. 춤이라기보다는 몸부림에 가깝지만, 막 뛰고 돌고 굴러보곤 한다. 이건 역시, 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