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을 함께 뜨겁게 보낸 진실의 힘 박채연, 이승은, 이현희 대학생 자원활동가와 함께 치열했던 여름 활동기를 자유롭게 나눴습니다.
진실의 힘: 진실의 힘 오기 전에 상상했던 활동과 실제 활동은 좀 어떻게 달랐어요? 시민단체나 인권단체 하면 떠올랐던 이미지가 있지 않나요.
승은: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고문 피해자 선생님들을 통해 암울했던 시기의 상황이나, 그분들의 내면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분들의 진술을 읽고, 그분들 곁에서 서포트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반대로 제가 살아온 방식을 돌아본 시간이었어요.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얻었달까요.
진실의 힘: 어떤 위로와 용기였을까요?
승은: 처음 왔을 때 사랑 간사님이 진실의 힘 소개를 해주시면서 ‘싸움’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셨어요. 일상적으로 ‘싸움’이라는 단어는 암울하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진실의 힘에서의 ‘싸움’은 또 다른 의미 같더라고요. 저희 세대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그 고통을 겪지 않을지, 어떻게 그 시대를 기억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많은 분을 만났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쩌면 제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떤 시련과도 일종의 작은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제게 ‘버텨낼 수 있다, 더 싸워나가라’고 하면서 큰 용기를 주시는 마음이랄까요.
채연: 저는 진실의 힘 활동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앞서 활동한 후기를 읽었는데 진실의 힘 자원 활동 후기가 유독 방대하고, 자세하게 나와 있었거든요. 가까이에서 보니 사회에 꼭 필요한 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을 진실의 힘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이곳에서 하는 일이 제 예상보다 훨씬 더 쉽지 않겠다 싶은 거예요.
진실의 힘: 가까이에서 보니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뭐예요?
채연: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일만큼은 지속적인 공부나 열정이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계속 사안이 빠르게 바뀌기도 하고, 비슷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주시가 중요해 보였어요.
또 ‘인권’에 대해선 다소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영역이라고도 생각해요. 경제는 숫자가 나오고, 법은 용어 자체가 어려운 등 애초에 접근 장벽이 높다는 느낌이 있지만, 인권은 다소 정치적이며 감정적인 영역이라서 그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폄훼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인권 문제나 인권단체의 활동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거예요. 피해자들과의 만남이나 이슈에 관한 선전뿐만 아니라 국가 제도 제안, 기념관 건립이나 다크투어와 같은 시민 창구 마련, 국제단체나 회의에 의견 제안, 기자회견 등 굉장히 할 일이 많잖아요. 이걸 모두 해내려면 학문적인 사고가 필수적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저는 졸업 후 인권단체나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번 자원 활동을 하면서 좀 더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다는 것에 정말 끌려서요.
승은: 채연이 말에 공감해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피해자를 만나야 하고, 또 동시에 대외적으로 그분들의 이야기를 알려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치는 지점까지 파고들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메시지로 이 이슈를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을 쏟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희: 제게 인권단체 활동은 막연하게 딱딱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하는 것을 상상했는데, 실제로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서로 의견도 많이 주고받는 분위기라서 좀 놀랐어요. 그리고 국가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으면서 국가폭력 사건들이 실제로 한 '사람'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객관적인 사건 자체만을 봤다면, 이 활동을 계기로 피해자 한 명, 한 명과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꿨는지 볼 수 있게 됐어요.
진실의 힘: ‘사람’과 마주했을 때의 마음이 어땠어요?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살았고, 다른 가치관을 위해 싸웠고, 그 방법조차도 우리 세대에게는 익숙하지 않잖아요.
현희: 그렇죠. 처음에는 ‘나와는 다르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이분은 나와는 달리 용감하고 대단하다, 내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을 텐데 같은 마음이요. 좀 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온 것 같아요. 물론 여전히 국가폭력과 맞서 싸운 분들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 ‘이분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남영동 대공분실 인터뷰 녹취록을 정리하면서 삼촌이 생각났어요. 삼촌과 외모가 닮기도 했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삼촌도 한때 학생 운동을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다루는 국가폭력 사건이 정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심지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그때 싸웠던 ‘가치’는 당시 시대적 의제였잖아요. 그분들이 싸운 가치관들이 지금 저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고요. 한편으론, 어쩌면 당시 이분들과 함께 싸우지 않았던, 무서워서 피했던 사람들까지도 이해하게 됐어요.
진실의 힘: 싸우지 않고, 피했던 사람들까지 이해했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현희: 국가에서 저지른 일들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게 되면서 국가가 무서워서 함께 싸우지 못한 사람들이 무엇이 두려워서 그랬는지 좀 더 이해하게 됐달까요. 그리고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불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고문을 끝까지 버텨낸 분들도 있지만, 극심한 폭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기란 정말 어렵잖아요. 남영동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그분이 매우 후회하고, 그래서 더 ‘내가 잘 살아야 한다’는 얘길 하시는 걸 보고는 이런 분들을 제가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승은: 현희 말에 생각난 건데, 진실의 힘 처음 도착했을 때 제가 사는 혜화동에서도 볼 수 없는 창덕궁 경치가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는 그 특유의 따스함이 있었어요. 제가 검찰청 범죄피해자 지원센터에서도 자원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곳은 일반 사무실처럼 칸막이가 쳐져 있고 상담실도 매우 협소해서 실제로 범죄 피해자분들이 방문해서 상담하기에는 다소 분위기가 무겁고, 답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실의 힘에서는 일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분과 동고동락하신다는 느낌이 컸어요.
채연: 저는 매주 올 때마다 창덕궁을 찍고 있어요. 창덕궁을 이 구도로 ‘직관’할 수 있는 곳은 진실의 힘밖에 없을 거예요. 나중에 그 사진을 모두 모아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현희: 저도 창덕궁 풍경, 정말 인정합니다. 궁궐을 높은 곳에서 그것도 비스듬히 기와의 물결을 따라 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잖아요. 그래서 매번 진실의 힘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요. 좋은 풍경과 좋은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진실의 힘: 다들 진실의 힘 활동 후기에 ‘창덕궁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라고 쓰겠는데요. (웃음) 지금부터는 제 질문 없이 세 분이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승은: 일하면서 어떤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어? 나는 국가폭력 피해자 진술 내용을 정리하는 데 그때마다 ‘뭔가 계속 겹치는데? 이거 위에서 봤던 사람인데? 다 같은 사람이야?’ 싶은 거야. 또 고문의 방식을 계속 보다 보니 일정한 패턴이 보이더라고. 이건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정말 토 나오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무뎌질 정도로 철저하게 학습되고, 훈련된 사람에 의한 것이구나 싶었어. 어쩌면 어떤 때는 강압적으로, 어떤 때는 회유하듯 달래야 한다는 매뉴얼이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생각도 들고.
현희: 나는 국가폭력은 시대와 상관없이 지금도 어떠한 다른 형태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아는 사건들을 그저 과거로만 받아들일 수 없더라고.
채연: 맞아. 구조 속에서 개인이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아. 악하지 않지만 악한 제도 속에서 국가폭력 행위를 직접 하는 사람,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피해자,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고위층, 나는 당하지 않았으니 관심 없는 사람, 그냥 잘 모르는 사람 등등. 하나의 제도와 구조 속에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존재하잖아. 특히 자기 모순적인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상했고, 정말이지 이 사회는 참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
승은: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어. 나는 거기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나 생각도 하게 되는 거야.
채연: 지난 학기에 특수교육학개론을 들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야. “어차피 시험도 없고 너희가 공부 열심히 할 거는 기대 안 한다. 다만 길을 걷다가, 뉴스를 보다가 '장애인'이라는 키워드 나왔을 때 이전에는 그냥 넘기지 못하는 그런 관심을 기대한다” 진실의 힘을 하면서 내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조금 더 증대된 것도 긍정적인 변화였던 거 같아. 원래도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제는 <소수의견>,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를 찾아보거나, 뉴스에서 ‘보안관찰’ 이슈가 나오면 더 공부해보려고 하는 등의 변화가 생겼거든.
나라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나 싶긴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같이 하자고 독려하는 것, 거시적으로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구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를 바꾸려고 하는 노력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은데. 우선 미시적인 것을 조금 더 잘하게 된 것 같아서 뿌듯하고 후자는 이후에 천천히 해도 되지 않을까. 아직은 무지렁이라서. (웃음)
승은: 완전 공감! 이제는 국가폭력 관련 기사가 나오면 바로 클릭해서 보게 되더라. 그리고 지난 8월 경향신문에 박동운 선생님 가족 인터뷰가 크게 실렸잖아. ‘이게 법인가, 대법관들이 제일 나쁜 사람들이다’라는 선생님들의 한 섞인 목소리를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어.
채연: 나는 사회학도라 그런지 ‘구조’ 자체에 관심이 많거든. 요즘 인간의 자율성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인간은 얼마나 주체적인가 등등 ‘구조 속의 인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어. 나는 모든 인간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그 한계를 하나씩 극복하려는 인간에게 '성찰'이라는 덕목이 주어진다고 생각해. 내가 모든 걸 포용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작은 노력이 모여서 변화를 만들어 가겠지?
현희: 나는 현재 진행 중인 아시아 지역의 국가폭력 현안을 정리하면서 아직도 고문을 행하는 국가들도 있다는 것을 보고 고문, 결국 ‘공포’가 지배층의 입장에서 가장 쉽고 효과적인 통치 방법이 아닐까 싶었어. 바꿔 말하면, 지배층이 생각을 바꾸면 언제든지 고문이 다시 행해질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국가, 정부를 감시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
다른 국가들을 보면서 그 나라 국민들이 겪는 문제나, 그분들이 어떤 가치관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가 결국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우리나라가 겪고 싸워야 할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국제연대를 통해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라는 이유처럼 다가왔고.
채연: 맞아. 그리고 사람들도 이 ‘고문’에 대해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는 게 필요해. 예를 들어 지금도 tvN <코미디 빅리그> 같은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전기고문을 웃음 코드로 사용해. 연출자나 출연진들은 ‘시청자들은 아무 생각 없겠지? 전기에 감전된 듯한 연기를 하는 사람을 보고 웃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고문을 미화하고, 웃음의 소재로 사용하는 게 정말 화가 나. 고문 피해자들이 버젓이 생존해 있는데 말이야.
승은: 현희 말대로 고문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과거의 이야기가 절대 아니지. 채연이 말을 들으니 영화 <동주>의 한 대목이 떠올랐어. 윤동주가 정지용 시인 앞에서 자기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시만 쓰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을 때, 정지용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그 자체만으로 너는 떳떳할 수 있다'라고 답한 게 떠올랐어. 성찰조차 하지 않는, 또는 성찰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는 세상에서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해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채연: 사회 문제를 두고서 대중들의 인식 중 가장 나쁜 게 '내 문제가 아니다'라는 거야.
승은: 맞아. 무관심. 그게 어쩌면 폭력을 직접 가하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인데.
채연: 무관심은 가해 사실도 지워주거든. 마치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길 바라는 것처럼.
승은: 결국 돌아가시기를 바라지조차 않는 일반 사람들이 서서히 기억을 지워나가는 거잖아. 아무런 목적 없는 내 무관심이 어쩌면 가해자를 돕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해보게 돼.
현희: 맞아. 무관심. 이걸 어떻게 바꿔내야 할지는 정말 계속 고민해봐야 하는데 참 어려워.
채연: 기본적으로는 주변 사람에게 알리는 게 가장 큰 것 같아. 예전에는 그 힘을 몰랐거든 하나둘 얘기를 하고 다니니까 생각보다 친구들이 꽤 관심을 가지더라고. 이런 사소한 것, 사소한 변화들이 가지처럼 뻗어 나가겠지? 사실 국가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활동가도 필요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기자도 필요하고 정책가도 필요하고 선생님도 필요하고 단적으로는 후원자도 있어야 하잖아? 그런 역할을 해줄 다양한 사람들, 내 주변 사람들을 우리가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