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된 시대를 만난 국민은 불행합니다. 잘 못된 국가를 만난 국민도 불행합니다.

분단과 전쟁의 역사는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숱한 사람들, 우리와 똑같은 가족을 가진 수많은 국민들을 까닭도 이유도 없는 죽음의 질곡 속에 난폭하게 몰아넣었습니다. 이어진 독재와 탄압의 칼날은 살아남은 유족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고문을 강요하였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시기에 온 한반도가 공산-자유, 좌-우 이념대결의 참혹한 폭풍 속에 놓였었음을 기억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렵던 그 무도한 시대,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살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전 한반도가 살상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이전에 이미 제주, 여수순천, 문경 석달마을에서 ‘무고한’ 집단학살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서곡을 막았다면, 또 그 서막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면, 나아가 그 살육을 자행한 자들을 제대로 밝히고 처벌하였다면, 온 한반도로 퍼져나간 집단광기와 강물보다 많았던 눈물들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제6회 진실의 힘 인권상은 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집단 학살사건의 생존자이자 진실규명 투쟁가 채의진 선생과, 민주화 이후 민간인 학살문제를 본격적인 국가와 사회의 의제로 끌어낸 정희상 탐사보도 전문기자에게 드립니다.

이들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천부의 인간존엄과 사회 정의와 국가의 존재이유에 대해 가장 정면에서 다시 묻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채의진 선생의 가공할 피해와 필생을 바친 진실규명 투쟁의 혼, 그리고 진실 복원과 보도를 향한 정희상 기자의 발과 땀을 되살리고 기억하여 ‘생명’·‘인권’·‘자유’·‘진실’의 가치를 세우려 싸워온, 싸우는 이 땅과 세계의 모든 분들에게 함께 공통의 귀감과 위로, 상호 연대와 격려의 표상으로 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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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1949년 12월 24일, 공비 토벌을 이유로 지역을 수색정찰 중이던 국군에 의해 자행된 국가의 국민살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국군 제2사단 제25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2소대 및 제3소대는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을 지나다가 어떠한 정당한 근거와 까닭도 없이 마을주민을 불러내어 86명을 무차별 총살하였습니다. 전형적인 반인륜적 반인간적 국가범죄(state crime)였습니다. 석달마을 학살사건은 어떠한 반(反)국가혐의도 없는 순수국민을 국가가 최소한의 법적 근거와 절차도 없이 자의적으로 살상한 국가폭력이자 민간인 학살행위였습니다.

당시 석달 마을은 127명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86명이 사망, 12명은 중상이었습니다. 29명의 주민만이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마을 주민의 3/4이 피해를 입은 일방적이고 무참한 학살이었습니다. 두 가족은 5명 전원이, 한 가족은 4명 전원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어떤 가족은 8명 중 7명이 학살을 당했고, 다른 어떤 가족들은 13명 중 9명, 7명 중 6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사망자 86명 중 42명이 여성이었으며, 22명은 열 살 이하의 어린이였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정녕 믿고 싶지 않지만 무려 5명의 ‘피학살자’들은 세상에 이제 막 태어난 한 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 한 살입니다. 아직 이름도 없었기 때문에 전부 ‘남 아기’, ‘채 아기’, ‘박 아기’, ‘장 아기’, ‘황 아기’로 기록된 ‘단’ 한 살의 생명들이 군부대의 ‘공비토벌’전과(戰果)로, 훗날에는 ‘피해자명부’ ‘피학살자’로 기록되어야하는 이 전율할 역사 앞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해야합니까? 언어를 잃어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열 살 이하의 어린이 22명 중 과연 누가 공비였고, 어떻게 공비활동을 하였는지 당시의 가해자들과 오늘의 국가는 대답해야합니다.

채의진 선생은 당시 열세 살이었습니다. 그는 할머니, 어머니, 형, 누이, 형수를 포함해 9명의 사랑하는 가족을 국군의 범죄로 창졸간에 잃었습니다. 그는 형의 시신에 가려져 간신히 집단학살의 총구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생존은, 국가가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살상하는 최악의 인간지옥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진실을 규명하라는 가족과 신의 가호였습니다.

사건 이후 국가는 철저히 진실을 은폐하고 억압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왔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의 노력들이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채의진 선생과 피해자 가족들은 피해자 명부를 만들고, 관계당국과 언론을 방문하며 진실규명을 호소하였습니다. 민주정부의 국회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조사단을 꾸려 현장 조사를 나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실과 인권은 민주주의와 함께 간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부는 진실을 다시 암흑에 가두고 피해자 가족과 진실규명 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습니다. 학살에 이은 제2차 국가범죄였습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처벌을 받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이른바 ‘뒤집힌 진실’, ‘전도된 시대’ 상황은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진상규명 자료들은 압수되었고 합동묘와 위령비들은 국가에 의해 난폭하게 유린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유족들의 가슴은 하염없이 무너졌고 진실은 독재의 어둠 속에 다시 묻혔습니다. 인간의 최소 근본도리를 갖추려는, 자식으로서의 최소한의 제의(祭儀)와 위령행사마저 금압하는 현실은 금수(禽獸)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들이었습니다.

학살이 금기어이듯 진실도 금기어였습니다. 채의진 선생도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진실규명 노력을 하는 가족들은 체포·구금·수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군사독재의 도래와 함께 사실상 고문의 기나긴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감옥이었고 국가는 폭력집단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당시의 투쟁가들을 고문하듯, 독재권력은 과거의 진실을 두려워했고 고문하였던 것입니다. 부모형제가 학살당한 진실을 드러내려는 투쟁은 이제 자신의 죽음과 고문을 각오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권력은 언제나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완전 날조된,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빨갱이’·‘좌익’·‘부역’·‘친북’·‘연좌제’·‘이념’의 사슬은 채의진 선생과 가족들, 그리고 전국의 수많은 채의진들의 나날의 삶을 옥죄었습니다. 제주 4.3, 거창, 노근리, 산청, 함평, 고양... 석달마을의 서곡이 전국화 보편화하였듯, 진실과 진실활동가들에 대한 독재권력의 억압도 전국적 보편적이었습니다. 물론 통곡도 슬픔도 전국적 일상적이었습니다.

채의진 선생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울화병이 돋지 않으면 안 될 미칠듯한 회한과 불의의 나날들의 연속에서도 선생은 마음을 단련하고 자강불식하면서 감연하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천직인 교직생활도 정리한 채 선생은 서각공예를 통해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울분을 내면적 미학적으로 승화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천직의 포기는 생존의 위기를 뜻합니다. 진실규명 투쟁은 그에겐 곧 생애를 건 필생의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전생을 걸었기에 그의 내면투쟁이 개인적 비극을 넘어 인간적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시대의 많은 방관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또 감동을 줍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에서 생의 의지를 추슬러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인간 채의진과 유족들의 저 내강(內剛)한 모습은 다른 많은 민간인 학살유족들과 고문피해자들의 감연한 일어섬을 떠올리게 하여 우리를 끝내 눈물로 몰아갑니다. 피해유족들과 고문피해자들의 이토록 형형(炯炯)한 영혼 덕분에 오늘의 우리는 그들에게 빚 진채 살아가고 있음을 또렷하게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 모두는 그 거듭난 영혼들의 도덕적 비약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채의진들의 일상은 안온과 건강과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민주화와 함께 선생은 수없이 많은 탄원과 청원과 방문과 집회를 주도하고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여러 학살 현장과 집회의 처처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간 채의진의 삶은 소극적 피해자에서 능동적 진실규명 투쟁가로, 적극적 연대활동가로 거듭났습니다. 서울과 문경, 전국 학살지를 숱하게 방문하였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료수집을 위한 미국방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진실규명과 연대를 위한 그의 의지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진실규명 투쟁범주는 석달학살 사건과 개인의 고통을 넘어 전국의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개인에서 시민, 부분에서 전체로 도약이었습니다. 각지의 유족회를 함께 꾸리고 서로 돕고 지원하고 전국적 연대조직을 힘 있게 밀고 나갔습니다. 전국의 많은 석달마을 유사-동질 사례들이 결집하였고, 피해자와 연구자와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마음이 모이고 뜻이 모이자 국가는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중앙 정부기구를 출범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실복원을 향한 노력은 그의 삶 전체였습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자신의 온 영혼과 온 삶을 바쳐 기도하는 재기(齋祈)의 절대 소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삶과 진실이 숭고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채의진 선생을, 억압을 견디고 진실과 인간존엄과 인권을 향한 오롯한 삶으로 기리려는 참 뜻이기도 합니다.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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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나긴 길에서 공동 수상자 정희상 기자는 공론화와 연대의 결정적 고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정희상 기자는 월간 <말>지 기자로 일하던 1980년대 말부터 석달마을을 비롯한 전국의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발로 뛰며 취재하고 우리 사회에 이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려 앞장서 적극 노력해왔습니다. 진실을 향한 땀의 결정체인 그의 탐사보도는 언론과 학계, 정부와 시민단체의 무관심과 무도덕을 질타하고 관심과 참여를 촉발하는 중대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특별히 그의 연속적인 발굴기사들은 어둠 속의 사건들에게 진실의 빛을 비추었고, 유족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주었으며, 개별적 피해에 머물던 사례들을 전국적 일반적 사건으로 인식시키고 연대의 손길을 내밀게 한 소통의 계기였습니다. 채의진 선생을 포함한 유족들에게 그는 진실규명 과정에서 동료이자 동지였습니다. 권력의 편이 아닌 진실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정희상 기자는 채의진 선생과 함께 석달마을 학살사건의 진실규명을 향한 기나긴 도정에서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알리고 공감의 가슴을 열어준 참 도반에 가까웠습니다. 정희상 기자는 그것이 “살아있는 자로서 외면해서는 안되는 사명감”이었다고, 한 인간의 높은 윤리적 자세로 고백합니다. 이 땅의 무너진 기자정신을 되살려낸 소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보도를 함께 기리려는 소이입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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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드리면서 우리는 채의진 선생의 삶이 상징하는 한국현대사의 핵심적인 고난과 간구, 어둠과 빛 전체를 기억하고자합니다. 국가에 의한 국민학살, 망각강요, 이념적 낙인과 매도, 진실은폐와 유족활동의 억압, 공동체와 언론의 오랜 외면, 역사적 자각과 고독한 자기투쟁, 생업과 생존의 위기, 시민적 연대와 희망, 진실규명의 성공과 한계, 그리고 남은 숱한 과제들을 기리고 확인함으로써 이 상이 우리 공동체가 드리는 작은 감사와 속죄의 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채의진 선생의 과거 피해와 진실규명 노력 때문에만 이 상을 드리는 것이 아님을 또한 정직하게 고백드립니다. 거기에는 채의진 선생의 평생의 비원(悲願)을 담아 오늘의 우리사회의 진실단계와 인권과제를 엄중히 돌아보려는 다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범죄라는 진실이 명백히 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누구 하나 사과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땅의 부끄러운 도덕수준이고 양심지표입니다. 학살과 억압에 가담한 모든 가해자들의 양심어린 사과와 참회를 촉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용서와 관용, 화해와 상생의 공동체로 나아가는데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기를 같은 인간으로서 무겁게 호소합니다.

게다가 학살을 자행한 국가는 아직도 배상과 보상, 공식사과, 추모시설 건립, 치유와 치료보장 등 기본적인 국가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살과 억압에 이은 세 번째 국가범죄나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는 석달마을을 포함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진실규명, 명예회복, 배상과 보상, 공식사과, 합동 및 개별 추모시설 건립, 치유와 치료보장을 위한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고도 철저하게 이행하여야 합니다. 그 길만이 민간인학살과 진실규명 억압이라는 두 번의 범죄를 갚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나라가 학살과 국가범죄와 독재와 억압을 넘어 미래에는 진실, 화해, 평화, 인권 교육의 세계범례로 기록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석달마을 유족일동이 1993년 5월 17일 국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했던 말을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역사는 진실이어야 하며 그 진실은 곧 진리입니다. 잘못된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상처는 꼭 치유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유족을 대표하는 채의진 선생을 통해 이 상을 위로와 연대, 존경과 감사를 담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집단 학살 사건의 모든 유족들에게도 함께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채의진들이 가고자 했던 진실과 정의, 해원과 상생, 화해와 치유가 남한과 북한, 그리하여 전체 한반도와 아시아와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정신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국가와 국민의 바른 일을 앞서 대신 감당해준 두 분에게 이 공동체와 사회를 대신하여 늦은 속죄와 깊은 경의를 함께 표합니다. 그동안 많이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