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진실의힘인권상 심사위원회(위원장 한인섭, 위원 김선주, 조은 교수, 인재근 의원, 김성규 최양준 송소연 진실의힘 이사)는 만장일치 의견으로 홍성우 변호사를 제3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습니다.
홍성우 변호사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2003년까지 30년 동안 인권변론의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인권보장의 최후보루’가 되어야할 법원과 검찰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채 정권의 하부구조 속에 안주해 있던 시절, 불법적인 법집행과 불공정한 판결이 일상화된 군사독재 시절, 홍성우 변호사는 누구도 대변할 엄두를 못내는 피고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 용기가 부족하면 뜻을 같이하는 변호사들의 의지를 모아 같이 갔”습니다. 양심수들의 이야기를 깊이 듣고 경청하면서 이 시대의 아픔을 껴안았습니다. 수사기관으로, 교도소로, 법정으로 바삐 뛰어다니면서 그 고통에 함께 연대했습니다. 인권변호사의 전형을 만들었습니다. 그 길을 걸어온 분이 홍성우 변호사 한 분은 아니지만 우리가 진실의힘 인권상을 드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홍성우 변호사는 무엇보다 고문 수사실을 벗어난 고문피해자들이 맨 처음 만난 핵심 대화자(interlocutor)였습니다.
1980년대 이 땅의 고문피해자들, 수많은 김근태들에게, 권인숙들에게, 홍성우 변호사는 첫 ‘대화자’였습니다. 수십 일 동안 지하 고문실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들은 몸은 그 수사실에서 풀려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문에 묶여 있는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저질렀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의 실태를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고문사실을 폭로했다가 다시 끌려가는 경우도 숱하게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변호사라 소개한 이가 실제로 변호사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게 고문피해자들의 처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문피해자들 앞에 맨 처음 손을 내민 사람, 그 존재의 의미는 인간 이상의 의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고문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죽음같은 경험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압니다. 홍성우 변호사의 진심과 정성은 고문피해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었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고문생존자는 용기내어 말할 수 있었고 어두운 시대를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김근태가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홍성우 변호사는 그를 만나기 위해 날마다 구치소를 찾았습니다. 접견을 시켜주지 않아 12번이나 허탕을 치면서도, 변호사가 다녀갔다는 말이 김근태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날마다 김근태를 접견하러 다녔다는 일화는 그가 고문피해자들에게 어떤 사람이기를 원했는지 보여주는 일례일 뿐입니다. 누구보다 고문피해자의 처지와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고 이해할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세 차례에 걸친 ‘남산 중앙정보부 체험’ 덕일 것 같습니다. 자기 앞에 닥쳐온 뜻밖의 불행한 사건과 고통을, 그 보다 더한 고통속에 갇혀있는 이들을 돕고 지원하는 원천으로 삼은 것입니다. 홍성우 변호사는 1974년, 1975년, 그리고 1980년 세차례에 걸쳐 중앙정보부 밀실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1974년은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연행되어 반공법 위반 피의자로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풀려나자 마자 다시 민청학련 사건 변론을 했습니다. 그 뒤로도 1975년, 1980년 두 번 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각각 2박 3일에 걸친 조사를 받았습니다. 인권변론의 싹을 없애기 위해 독재정권은 전방위적인 힘을 행사했습니다. 변론을 문제삼아 2박3일씩 지하 수사실에 가뒀습니다. 경찰의 감시와 겁박으로 때로는 동료 법조인들과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습니다. 사무실 앞을 지키는 경찰 때문에 변호사 사무실 유지가 어려울 정도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홍성우 변호사는 그럴수록 더 단단한 인권변론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폭력과 광기, 억압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키워준 힘이 된 것입니다.
- 홍성우 변호사는 고문을 척결하고 예방하기 위해 형사절차를 정비하는데 한 몫을 다했습니다.
고문은 고문을 직접 당한 피해자에게 저지른 범죄행위 뿐 아니라, 고문 가해자와 고문을 묵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더욱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고문은 전체 공동체의 의지와 존엄을 파괴하고 손상시킵니다. 우리가 고문실태를 폭로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문이 제도화되지 않도록,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고문에 대한 효과적인 조사와 기록을 하여 고문의 실태를 폭로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법적, 제도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1985년 서노련 사건 당시 김문수씨가 고문을 당했을 때 홍변호사는 증거보전신청, 대한변협 조사 청원 등의 방법으로 고문 실태를 폭로했습니다. 김근태 사건 때는 고문경관을 고발했고,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재정신청 등 변론활동을 주도했고, 이를 통해 형사절차 개선에 기여했습니다. 권인숙 사건 때는 변호인단이 직접 고문수사관을 고발하였고, 재정신청, 재정신청 기각에 대한 재항고 등의 방법을 통해 고문수사관들을 직접 단죄하려는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조작간첩 사건에서 홍성우 변호사의 활동입니다. 그는 고문에 의해 방북했다는 허위자백을 하게 된 이들의 알리바이 입증을 통해 무죄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재일교포 윤정헌 사건, 송씨일가 송기준 사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안기부의 협박 속에서 변호사의 존엄과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그의 노력은 최근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이끌어낼 수 있게 한 큰 동력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은, 홍성우 변호사의 활동이 고문 가해자들의 목적을 차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고문은 한 인간의 정체성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힙니다. 더 나아가 우리 공동체의 존엄과 의지를 파괴합니다. 홍성우 변호사는 고문 피해자를 처음 만난 변호사로서 인간적인 신뢰를 이끌어냈습니다. 변호사의 절대적 지지와 공감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고문피해자들에게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구축하는데 가장 큰 밑바탕이 됩니다. 고문이 목적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믿음의 파괴를 막아낸 것입니다.
홍성우 변호사는 “양심범의 소신을 지켜주는 것”이 인권변호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그대로 행동하고 실천했습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소신을 지킬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건넸습니다. 고문피해자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고문가해자를 법정에 끌어내어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홍성우 변호사의 활동은 고문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홍성우 변호사는 7, 90년대 기록을 보존하고 한인섭 교수와 대담을 통해 그 사건들과 의미, 교훈을 정리해서 남기는 방대한 작업을 마쳤습니다.
모든 언론이 권력의 통제아래에서 정상적인 보도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 홍성우 변호사는 자신이 기록하고 변론한 자료를 모았습니다.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 때의 피고인들이 이 자료를 찾아서 재심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 기대” 때문에 2, 30년 동안 기록을 보존해온 것입니다. 그가 남긴 기록은 그의 기대대로 역사를 정리하는데도, 재심을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더 나아가 7, 80년대 암흑으로 고통스런 한 시대와 그 어두운 시대를 헤쳐 나온 고귀한 숨결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서 30년 동안의 인권변론이 단순한 변론을 넘어선 고문과 폭력에 맞서 싸운 저항과 헌신의 역사였음을 확인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록을 통해 고통 속에서 다시 희망의 메시지를 일궈낸 수많은 이들의 위대한 걸음을 읽습니다. 다시는 고문과 암흑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아야한다, 고문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의지를 얻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눈물과 땀에 빚지고 있는지를 다시 떠올리며,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려는 다짐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우리가 제3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홍성우 변호사에게 드리려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