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 박동운, 허현, 박미심 선생. ⓒ경향신문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이 박동운 선생 일가족을 간첩단으로 날조하며 시작한 재판이 마침내 막을 내리고 있다. 1981년 3월 7일 박 선생 일가족이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납치되어 남산 지하 밀실로 연행된 때로부터 40년 만이다.

2020년 2월 27일 대법원은 박 선생 일가족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확정했다. 서울고등법원의 재심판결에 대한 법무부의 상고를 기각한 것이다. 국가가 박 선생 일가족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반환 소송이 남아 있지만 국가의 패소로 끝날 수밖에 없다. 

박 선생 일가족 사건은 군사정권 시절 안기부가 만들어낸 대표적 간첩조작 사건이다. 한집안 전체를 간첩단으로 날조해 가히 멸문지화의 지경에 몰아넣으면서 자행한 고문의 잔혹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시나리오의 완성도와 증거조작의 치밀성 또한 그 이전에 이루어진 조작사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송씨 일가 사건을 비롯해 그 후에 만들어낸 대규모 조작사건의 전형을 제공한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 초기 안기부가 와신상담 끝에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만했다. 검찰과 법원도 적극 협력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사건의 해결 과정은 유독 험난했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박 선생의 부친이 북한 공작원으로 내려와 일가친척을 포섭해 간첩단을 만들었고 이들이 북한을 왕래하며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누설했다는 황당무계한 시나리오를 ‘범죄사실’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비결은 고문이었다. 

20여 년이 지나 재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 선생의 고모 박미심 선생은 “얼마나 징헌지 그 일 생각하면 지금도 죽고 잡은 그 생각이 날라고 하요”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이웃들에 의하면 석방되어 집에 돌아온 피해자들은 아예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정신도 온전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미쳤다, 정신 나가부렀다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7년 형을 마치고 풀려난 박경준 선생은 “아조 풋나물 데쳐논 거 멘키로 찌개처럼 형편없이 되어”“힘이 하나도 없고 건드리면 자빠질 정도”였다. 한등자, 박미심, 허현 선생을 치료한 의사 오동민 씨는 “여하튼 도저히 사람이 했다고 할 수도 없고, 사람한테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고문의 실상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역사에 기록하는 일은 이렇게 어렵다. 당한 사람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고 들은 사람은 차마 말로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간첩인지를 가리는 재판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법원은 정말 몰랐을까?  

법정에서 변호사는 이들에게 아직도 고문받은 상처가 남아 있다면서 그 모습을 재판장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그런데 재판장이 막았다. 신체감정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결문에는 “…검찰에서의 피고인들의 진술이 소론과 같이 그전 수사기관에서 받은 고문의 영향으로 임의성없는 상황에서 된 것이라고 기록상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썼다(대법원 82도1092 판결). 그런 재판을 받아 박 선생 일가는 ‘가족 간첩단’으로 둔갑했고 삶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감옥에 갇힌 고모부, 어머니, 동생, 삼촌이 차례로 풀려나고 마침내 정권이 바뀐 1998년 8월 박 선생도 풀려났다. 감옥 밖의 삶도 고통의 연속이었다. 진실을 밝힐 방법을 찾아 동분서주했지만 길을 찾기 어려웠다. 재심의 요건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형사소송법 조항을 대법원이 더욱 좁게 해석해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증거를 수집하며 준비하던 중에 노무현 정부가 국정원발전위를 설치하고 나아가 과거사법을 제정해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로 하면서 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너무 복잡하고 상징적 사건이라 그랬는지 피해자들이 많은 증거를 수집해 제출했고 국정원발전위 보고서까지 있는데도 과거사위 조사는 하염없이 시간을 끌었다. 2005년 12월 진상규명을 신청했으나 지지부진한 과거사위원회 조사를 마냥 기다릴 수 없어 2007년 4월 재심을 청구했다. 

이번에는 법원이 시간을 끌었다. 이수례 선생의 건강이 하루하루 나빠지고 있었다. 몇 번이나 법원에 심리를 촉구했지만 마이동풍이었다. 재판부는 나중에 접수된 사건은 재심을 개시해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이 사건만은 미루었다. 2009년 1월 5일 과거사위원회가 진상규명결정을 한 후에도 시간을 끌던 재판부는 이수례 선생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진단서를 내자 비로소 6월 9일 재심을 개시했다. 박 선생이 두 번이나 북한으로 탈출해 간첩 교육을 받고 잠입했으며 A-3 방송으로 지령을 받고 무전송신기로 국가기밀을 보고했다는 것을 비롯해 모든 공소사실이, 단지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날조된 거짓임을 증명했다. 재심을 청구한 지 무려 4년이 지난 2009년 11월 13일 무죄판결을 받았다. 

2009년 11월 13일 재심 무죄 선고. 한등자 선생과 박동운 선생. ⓒ진실의 힘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형사보상을 청구한 다음 손해배상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행방불명인 박 선생 부친 박영준 선생의 가족관계등록을 정리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형사보상결정도 나오기 전인 2010년 8월 20일 실종선고를 청구했으나 법원은 1년이 지난 2011년 8월 12일에야 심판을 내주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대법원 구성이 바뀌면서 법원의 기류도 변하고 있었다. 2011년 1월 13일 박시환 대법관이 주심으로 선고한 일련의 판결이 그 흐름에 불을 지폈다. 오랜 세월 동안 배상은커녕 박해를 받아온 과거사 피해자들에게 지연이자를 주면 “현저하게 과잉된” 배상을 하게 된다는, 이상한 이유를 내세워 손해배상액을 절반 이하로 깎아버린 것이다.

과거사 사건을 대하는 법원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대법원의 신호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이제 아래를 향한 경쟁, 피해자들이 받을 손해배상액을 줄이고 국가의 책임 자체를 부인하려는 온갖 궤변이 남발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박 선생 가족은 실종선고심판도 나오기 전인 2011년 5월 6일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2012년 7월 20일, 2심 법원은 2013년 7월 19일 부족하게나마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판결금의 절반을 가집행해 밀린 빚도 갚고 몸을 누일 집도 장만했다. 

대법원은 결정적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2013년 5월 16일 진도 민간인학살 사건 판결에서 교묘하고 은밀하게 짜 맞춘 발판을 높은 다음 12월 12일 치명타를 가했다. 과거사 피해자들의 권리행사기간(소멸시효)를 황당하게 단축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민법이 정한 소멸시효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이다.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비로소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됐으므로 그때부터 3년 안에 소를 제기하면 된다는 것이 상식이었고 대법원도 그렇게 판결해왔는데 그걸 뒤집어엎은 것이다. 유독 과거사 피해자들의 권리행사기간만을 6개월로 단축하는 것은 사실상 법률을 개정한 것으로 불법이고 위헌이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로 나온 이상 그대로 효력을 발휘했고 하급 법원들은 ‘6개월’을 넘겨 소장을 제출한 피해자들의 청구를 모조리 기각했다. 박 선생 일가를 비롯해 진실의 힘에 참여한 오주석, 안교도, 이준호, 정영 선생 사건도 이 함정에 빠져 모두 패소판결을 선고받고 말았다. 사건마다 사정이 있지만 박 선생 가족의 경우 법원이 박영준 선생에 대한 실종선고심판을 1년 가까이 미룬 것이 ‘6개월’을 넘기게 된 이유라는 점에서 더욱 황당했다. 

암담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였다.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방법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위헌결정을 받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 이상으로 어려웠다. 비슷한 사건에서 합헌 결정을 한 선례까지 있는 상황에서 헌재가 소멸시효 조항에 대해 새로 위헌 결정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다. 한다고 하더라도 제일 쉬운 선택지(질적 한정합헌결정)는 대법원이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일부 변호사들이 강력히 주장한 재판소원은 아예 각하될 위험이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과거사법에 규정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한해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양적 한정위헌결정’ 형식을 선택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2심 승소판결에 따라 가집행한 돈을 갚는 문제였다. 패소판결이 확정됨으로써 가집행금이 부당이득으로 간주되어 연 5%의 이자까지 붙여 반환해야 하게 된 것이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게 대한민국의 ‘법’이라면 돌려주겠다는 것이 박 선생 가족의 뜻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돌려줄 길이 없었다. 일부는 예금과 보험을 헐고 빚도 내서 갚았지만 일부 가족은 불가능했다. 법무부에 제안했다. 일시불로 갚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니 현재 있는 모든 현금과 부동산을 처분한 돈으로 원금의 일부를 갚은 다음 앞으로 버는 돈에서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계속 갚아 나갈 테니 일부 변제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피해자들을 파산시키는 것보다는 국가에도 그게 더 이익이었다. 실무자도 동의했는데 법무부가 거부했다. 그리고 소송을 제기했다. 기어이 파산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보복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부당이득금 재판에서 박 선생 가족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헌재 결정을 기다려 판결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해도 대한민국에 손해가 없고 서둘러 판결해야 할 사정도 없는 반면, 판결을 해서 피해자들이 전 재산을 강제집행당하고 파산을 하게 되면 나중에 위헌 결정을 받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볼 위험이 있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1심 재판부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가집행한 돈에 판결선고일까지는 연 5%, 그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5%의 지연이자를 붙여 갚으라고 판결했다. 다행히도 2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 제8민사부)가 판결 선고를 미뤄준 덕분에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이 판결 선고일은 5월 14일로 예정되어 있다. 

4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2018년 8월 30일 헌재가 헌법소원을 받아들였다. 형식으로는 과거사 사건에 소멸시효 조항을 적용하는 것이 헌법 위반이라고 했지만 실질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위헌 선언이었다. 탄핵과 정권 교체, 사법농단 폭로 등이 이어진 후에 비로소 나온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사필귀정이었고 다시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하필이면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상징적인 두 날을 잡아 문제의 판결들을 한 배경은 사법농단을 은폐하려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2015년 8월 양승태 대법원장의 대통령 면담을 준비하기 위해 법원행정처가 만든 문서다.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음” 이라는 문장 다음에 그 노력의 근거를 열거했는데 과거사 피해자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한 판결들이 포함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과거사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을 “과거 정권의 적폐”며 “왜곡된 과거사”라고 비난한 점이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궤변으로 피해자들의 권리를 박탈한 문제의 판결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과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고려”해서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했다고 강변했다. 이 문서를 작성한 법원행정처장이 바로 주심으로 문제의 판결을 한 박병대 대법관이었다. 

박 선생 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은 헌재 결정에 기초해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한 패소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간첩으로 조작한 유죄판결에 대해 재심재판을 받은 데 이어 그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제기한 민사 판결에 대해서까지 다시 재심재판을 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법무부는 헌재 결정이 재심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거나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고등법원의 여러 재판부는 2019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재심을 받아들였다. 과거의 패소판결을 취소하고 손해를 배상하라고 했다. 

대법원은 정영 선생 사건에 이어 박 선생 사건에서도 법무부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번에는 법무부도 손을 들었다. 다른 피해자들 판결에 대해 한 상고를 모두 취하한 것이다. 


40년에 걸친 재판이었다. 박 선생 가족은 형사재판 3번, 형사 재심재판 1번, 형사보상 재판 1번, 손해배상 재판 4번, 민사 재심재판 2번, 국가가 제기한 부당이득금반환 재판 2번, 실종선고심판 1번, 헌법소원 1번 등 모두 15번의 재판과 국정원발전위와 과거사위의 조사를 받았다. 변호사와 재심을 하기로 합의한 때부터는 20년이 흘렀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 박동운 선생. ⓒ한겨레21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다. 박 선생 가족은 뜻을 같이 하는 피해자들과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설립해 국가폭력과 제도적 폭력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를 지원하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수사관들과 검사들, 판사들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기막힌 재판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박경준, 이수례, 한등자 선생의 명복을 빌며 2009년 10월 23일 형사 재심재판에서 한 변론의 마무리로 맺는 말을 대신한다.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기록을 재검토하면서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피고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 자리에 있는 피고인들과 이제 의식도 혼미한 가운데 무죄판결만 기다리는 이수례 씨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박경준 씨에게 오늘의 법조인들이 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이며 인간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재판에 참여한 우리는 이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억울함과 고통을 이겨내며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분투해 온 이들 덕분에 우리는 과거에 법조인들이 저지른 큰 오점을 일말이나마 씻어내고 법률가의 역할과 사명에 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