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어어이! 개야도 임봉택입니다!”

사무실에 오는 전화 중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인 임봉택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새벽에 어선을 타고 나가 어망을 치고, 오전 일을 본다. 오후에 다시 어망을 걷으며 그날의 수확을 하고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붙인다. 저녁 식사 전에 일어나시는데, 보통 이 때쯤 진실의힘에 전화를 건다. 요새 돌게가 제철이라 아주 통통해 진실의힘 식구들 생각이 나니 개야도에 꼭 놀러 오라는 당부의 인사다.

개야도에서 선생님의 배 '성덕호'를 탄 날이 떠오른다. 배, 특히 어선은 탈 일 없는 서울 촌사람이라 어부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5명이 타면 꽉 찰 만큼 작은 어선인 성덕호는 시원하게 새벽 바다를 갈랐다. 어장에 다다라 시동을 끄고 뱃일을 시작했다. 바닷속에 있던 어망은 툴툴 소리를 내며 배 위로 올라왔다. 어망이 엉키지 않게 요령 있게 풀어내며 걸려 있는 소라, 게 등을 떼어내 고무 대야에 넣는 게 그날의 일이었다. 잔잔한 바다 위에서 성덕호는 위아래로 꿀렁거렸다.

나는 뱃멀미는 육지 멀미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됐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데 허리를 수백 번 구부렸다 펴가며 어망에 걸린 소라를 떼어내서 담는 뱃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썼다. ‘신이시여..’

뭍으로 돌아오고서도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꿀렁거렸다. 식은땀을 두 대야 정도 흘리며 선생님 집으로 도착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뱃멀미가 아니더라도 어선 일은 고됐다. 고작 반나절 일했다고 손이 붓고 허리 이곳저곳이 쑤셨다. 젊고 기운이 좋으니 배를 타면 50만원어치 일은 하겠노라고 큰 소리 뻥뻥 쳤던 내가 우스웠다.

개야도는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주민 대부분이 어촌에 종사해서 섬 여기 저기에는 어망이 널려 있다. 학교라곤 초등학교 분교 딱 하나다. 아마 섬 사람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일 거다. 주소를 몰라도 이름만 알면 집을 찾을 수 있는 개야도에서는 1970, 80년대 서 너 건의 큼지막한 조작간첩 사건이 터졌다. 수 십 명의 섬 사람들이 육지로 끌려갔다. 그리고 ‘간첩’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72년 개야도에서 조작간첩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임봉택 선생님은 스물 여섯 살이었다. 경찰은 개야도에서 나고 자란 단짝 박춘환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임봉택 선생님에게 불고지죄를 들이밀었다. 선생님은 군산경찰서와 여인숙으로 끌려 다니며 17일 이상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

“인간이라면 그런 고문 속에서 내가 뭐라도 갖고 있으면 안 내놓을 수가 없어. 사람이 그런 고통 속에서 어떻게 안 내놓겠어. 다만 비슷한 뭐라도 있으면 얘기라도 하면 좋은디. 뭘 알아야 내놓고 가졌다고 얘길 하지. 미칠 일이지.”

또다른 개야도 단짝 유명록 선생님도 불고지죄가 씌어져 징역 8개월을 살고 같은 날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출소 날이 되어서야 임봉택 선생님은 그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어머니가 울어 싸면서 그러더라고.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죽었다, 가슴이 전기가 팍 나더구만. 아버지가 왜 죽었대요. 어디, 어치케 죽었대요.”

임봉택 선생님의 아버지는 ‘봉택이가 반공법으로 간첩이 돼 갖고 징역을 산다’고 개야도에 소문이 떠돈 정월 초여드레 날, 어머니가 재판에 가고 막냇동생이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임봉택 선생님은 개야도로 돌아왔고 다시 배를 탔지만, 삶은 예전 같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반공법이라고 하면 무조건 간첩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불고지죄밖에 안 되든, 징역 8개월 살든, 8년을 살든, 10년을 살든 다 똑같아요. 반공법으로 징역 살았다 하면 다 간첩이고 빨갱이인 줄 알아요. 누가 억울하게 징역 살고 나왔다고 인정을 해주는가. 개야도에 있으니까 더 불안하더라고.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어떻게 그랬냐고 붙들고 물어보는 놈 하나 없고. 어쩌다 지나다가 욕봤다, 지나다가 어쩔 수 없이 대꾸하는 거지. 누가 상대를 안 하더라고.”

그러나 삶은 계속 됐다. 임봉택 선생님은 결혼을 하고, 느지막이 딸을 가졌다 그래도 사건 얘기는 누구에게도 잘 하지 못했다. 진실의 힘 식구들을 만나고 나서야 그때의 억울함을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가슴 깊이 묻고 살았던 고문도, 어찌 표현할 수 없던 부모님 이야기도 진실의 힘 식구들에게는 꺼낼 수 있었다. 1972년 사건 이후 39년이 지난 2011년, 대법원에서 재심으로 무죄를 밝혀냈다. 증거 하나 없던 당시 사건은 끔찍한 고문 때문에 허위 자백할 수 밖에 없었고, 임봉택을 포함한 ‘개야도 단짝’ 그 누구도 간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진실의 힘 사람들은 ‘식구’다. 우리는 여러 해 함께 밥을 먹고 있다. 어쩌다 서울에 올라올 때면 큰 박스에 돌게장, 섬배추 겉절이, 해초 무침, 주꾸미 두루치기 등 하나하나 선생님 손이 닿은 음식을 싸 오신다. 개야도에서 군산까지 배를 타고 22km, 군산에서 서울까지 200km, 총 222km다. “선생님, 이렇게 많은 걸 어떻게 모두 챙겨오셨어요?” 하면 “우리 누구씨가 제일 좋아하는 돌게”라 빼먹을 수 없었고, “누구씨가 잘 먹는 쪽파 무침”이라 챙겼단다. 진실의 힘 식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가져왔지만, 개야도에 오면 더 많이 챙겨줄 수 있다고 아쉬워했다.

매일 나가야 돈이 벌리는 게 바다 일이고, 매일 손봐야 하는 게 밭일이라 선생님은 서울에 오래 머문 적이 없다. 진실의 힘 일을 보고 나면 다음 날 새벽부터 다시 개야도로 내려갈 준비에 분주하다. 서울에서 군산, 군산에서 개야도까지 버스와 배를 갈아타고, 5시간은 가야지만 개야도에 도착한다.

항구에서 내려 딱 하나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왼쪽에는 야트막한 동산, 오른쪽에는 너른 바다다. 집 서너 개와 어망을 펼쳐놓고 손질하는 사람을 지나친다. 그렇게 걷다 보면 곧 임봉택 선생님의 집이 보인다. 뱃일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생선 손질을 하는 수돗가가 있는 그 곳.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선생님은 아마도 성덕호를 보러 가실지도 모른다. 잔잔한 바다에 무탈하게 떠 있는 배를 보고서는 다시 전화를 건다.

“어어어이! 개야돕니다. 잘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