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지난해 9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뢰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고문실태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 그 결과를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보고서>로 발간했다. 기념사업회의 프로젝트는 올해도 이어졌다. 고문피해자 증언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담는 것이었다. 진실의 힘은 박경태, 김동령 감독과 함께 3개월 동안 남영동 고문피해자 22인을 만나 고문에 관한 소중한 증언을 듣고 영상으로 담았다.
-대공분실요? 기억하기도 싫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합니다.
2018년 8월, 남영동 대공분실 증언 기록을 하고 싶다고 어렵게 연락이 닿았던 통화에서 김봉수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겨자 탄 물에 고문받은 거 말고는 없고, 잘 기억도 안 난다”는 그에게 ‘남영동 대공분실’라는 단어는 33년 만에 처음 듣는 진절머리 나는 단어였다. 가슴에 묻어뒀던 “끔찍한” 고문의 순간을 털어놔 주십사 어려운 요청을 거듭한 건 1986년 12월 안산노동교회 교인들의 성명서에 남아 있는 그에 관한 한 줄의 짤막한 기록에서 시작됐다. “김봉수가 직장에서 일하던 중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현재까지 소식을 알 수 없다”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끌려가 생사를 알 길 없는 그의 삶의 궤적을 기록해야 했다.
“어떤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별로 해줄 말도 없는데.”
김봉수가 운영하는 여수 시청 앞 작은 횟집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손님들이 밀어닥친다는 저녁 장사 준비를 잠시 미루고 그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멋쩍게 웃는 그에게 첫 통화의 순간처럼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김봉수는 그 단어를 반복해서 잇다가, 순간 북받쳐 올라 울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눈물을 훔쳐내고 다시 얼굴을 들기까지 우리는 준비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33년 전, 1986년 12월 10일의 기억이 실려 있었다.
공장에서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잘려 나갔고, 온몸이 짓눌렸다
“해군 제대하고 나서 먹고살려고 이것저것 찾다가 공장에 갔죠.”
군대를 제대한 스물다섯의 김봉수는 돈 벌 곳을 찾아 자연스럽게 반월공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용접 기술이 있던 그가 첫발을 디딘 곳은 자동차 차체 부품을 제조하는 광진상공이었다. 크고 작은 프레스 기계가 즐비한 공장에서 그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동료의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풍경과 마주했다.
“기계에 손이 들어가면 알아서 멈춰져야 하는데 생산성을 높이려고 안전장치를 작동시키지 않는 거예요. 같이 일하던 친한 친구의 손가락이 잘린 걸 보는데 가슴이 미어지죠. 그 잘린 손가락은 제가 묻어줬어요. 10년간 프레스기 잡고 일하면 손가락이 온전한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프레스 기계에 한 노동자가 압사당해 죽었다. 더 이상 일터에서의 죽음을 목도할 수 없었던 김봉수는 ‘노동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근로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노동부에 넣었고, 같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사측의 사주를 받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어용 조직 대신 진짜 노동자들의 조합을 만들어 보자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편, 그해 10월 안산노동교회 전도사이자 김봉수의 큰 형인 김현수는 예배 중이던 교회에서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사복형사와 전경의 습격을 받고, 경찰서로 강제 연행됐다. 형수는 김봉수에게 “몸조심하라”고 일렀지만 그는 “특별히 조심할 것이 없다”고 넘겼다. 기껏해야 “프레스 기계에 사람이 깔려서 죽는 걸 본 후, 노동부에 진정서 한 번 넣은 것”이 전부이니 행여라도 잡혀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두 달이 지나도록 큰형 김현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문 수사관, “너만큼 물 잘 먹는 놈은 못 봤다”
그리고 12월 10일, 평소와 다름없이 광진상공에 출근해서 일을 하던 오전 10시경, 현장 사무실에서 김봉수를 찾는 호출이 떨어졌다. 그가 사무실에 올라가자마자 4, 5명의 낯선 자들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수갑을 채워 차로 끌고 가더니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니가 바로 간첩이고, 빨갱이”라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에 김봉수는 그저 얼떨떨했다. 광명경찰서로 끌려가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후, 다시 차에 태워졌다. 알 수 없는 목적지 근처에 다다르자 얼굴에 수건이 뒤집어 씌워진 채 낯선 밀실에 도착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때려요. 한바탕 구타한 다음에는 자기네들이 시키는 대로, 묻는 대로, 아는 대로 자술서를 쓰래요. 나는 공장 다니면서 진정서 하나 넣었던 것밖에 없는데? 내가 데모하는 거 옆에서 보면서 화염병을 던진 것도 아니고, 그 앞에서 누굴 타도하자고 외친 적도 없어요.”
수사관들은 “언제든 너를 죽일 수도 있고 간첩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두 손을 수갑으로 완전히 결박한 상태에서 긴 봉에 거꾸로 매달리게 한 후, 주전자에 든 물을 얼굴에 부었다. 기절 상태에 이르러 몸속에 들어찬 물을 몽땅 게워내면 다시 매달려졌고, 물고문과 구토를 반복하다가 탈진했다. 뼈 마디마디가 분리된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것조차 약하다 싶었는지 겨자를 탄 물을 온몸의 구멍에 들이부었다.
대공분실에 끌려온 지 하루 만에 그는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렀고, 어김없이 고문은 가해졌다.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써 내려갔고 모든 것을 “체념하는 시간”이었다. 더는 그에게서 ‘만들어질 이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일주일 이후 고문은 잦아들었다. “너만큼 물 잘 먹는 놈은 못 봤다”고 말하는 수사관들 앞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죽을까”를 생각했다.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 많이 당한 것 같아요. 뭐라도 알았으면 빨리 끝났죠. 아는 게 있다면 그거를 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어요. 내가 만약에 뭐라도 아는 게 있었다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보름을 버텨낸 김봉수는 서대문 구치소를 거쳐 6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안산 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사건의 피고인 중 한 명으로 법정에 선 그는 어떤 조직에도 가담한 적 없었다. 김봉수 앞에 붙을 수 있는 말은 ‘광진상공 용접공’이 유일했다.
“애매하게 끌려가서 애매하게 당하고 나온” 사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고 그가 오가던 안산 원곡시장 사거리는 독재정권을 향한 시민들의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신원 조회에서 막히기 일쑤였고, 그러다 발길이 닿은 곳은 안산 노동상담소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슴에 있는 울분”이 차올랐고 의식적인 노동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이 아닌 “몸이 움직인” 결과였다. 산업재해, 임금, 부당노동, 사업주 폭행 등의 상담뿐 아니라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던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느껴야 했던 인간으로서의 굴욕감에 대한 응어리를 함께 풀어냈다. 김봉수는 7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고문의 고통은 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안산을 떠나 지금의 ‘여수의 횟집 사장’ 김봉수를 아는 사람들은 동료의 잘린 손가락을 묻으며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다시 돌아와 노동 상담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경찰서로 강제 연행돼 긴 곤욕을 치렀던 큰 형 김현수도, 수원의 어느 큰 공장의 노조 위원장이었던 부인과도 단 한 번도 나눈 적 없는 기억이다. 그는 그날의 끔찍했던 고통이 듣는 이에게 전달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말 안 했어요. 그 고통은 나에게서 끝나야 하니까.”
스스로 ‘마지막 고문 피해자’이길 원했던 김봉수에게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은 어떤 의지도 꺾어내지 못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노동 현실 앞에서 눈 감지 않고, 그것을 도려내겠다는 의지는 더욱더 단단해졌다. 지금 김봉수의 나이에서 절반인 스물다섯의 그가 써 내려 간 노동자의 죽음을 고발하는 진정서는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옳은 일”이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거니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일을 하겠죠. 그때의 나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잘 한 거고 열심히 한 거고.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김봉수는 1986년 12월 10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돼 약 보름간 구타, 고문 조사를 받았다. 1986년 말, 공안정국을 몰고 온 전두환 정권은 안산, 안양 지역의 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노해투)를 와해시키기 위해 지도부 및 노동자들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고문 수사했다. 김봉수는 노해투 조직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나 전도사였던 형과 함께 끌려갔다. 그러나 곧 풀려나지 못했고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