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위한 대안’의 부상과 ‘피해자화’의 정치

이번 강의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 부상의 맥락을 세 가지로 짚어냈다. 첫째는 정당 지형의 변화다. 2013년 반(反)유로 정당으로 출발한 AfD는 2015년 난민위기를 지나며 반이민·민족주의 정당이 되었고, 2025년 총선에서 20%를 넘겨 제2당으로 올라섰다. 둘째는 "누가 독일인인가?"라는 시민성의 문제로 이주배경 인구가 30%에 이르렀음에도 민족 개념은 여전히 강력하며, 하이트마이어가 추적한 중산층의 지위 불안이 '조야한 시민성'으로 표출된다는 진단이다. 셋째는 통일의 상흔이다. 슈테판 마우의 분석처럼 동독의 문제는 경제적 지표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심리적 소외 및 정체성의 문제이며, AfD는 이 상실감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세 층위를 관통하는 것은 전후 독일이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 위에 세운 역사문화가 더 이상 견고한 안전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진단이었다. 가울란트의 '새똥' 발언처럼, 가해의 역사를 상대화하고 독일인을 피해자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정상과 극단의 경계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의 ‘방화벽’은 어디서든 유효했는가?

강의를 들은 후 가장 마음속에서 오래 붙들게 된 것은 이 '방화벽', 즉 ‘안전장치’의 성격이었다(강의에서 '방화벽'은 정당 간 연정 거부 전략을 뜻했지만, 나는 이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은 분명 독일에서 극우를 억눌러온 힘이었고, 지금 그 힘이 해체되는 중이라는 진단은 아주 서늘하게 마음속에 와닿았다.

하지만 동시에, 홀로코스트 자체는 여전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정전(正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해체되는 것은 기억의 내용이라기보다(물론 이에 대한 해체도 시도되고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 현재의 정치를 구속하는 힘인 것 아닐까.

바로 이 지점에서 불편한 질문 하나가 생겼다. 정전이 된 기억은 무엇에 대해 말하게 하고, 무엇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는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반성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국가이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렸고(이 표현은 2008년 메르켈의 크네세트 연설에서 정식화되었으며 2023년 숄츠가 연방의회에서 반복한 바 있다),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에서의 폭력은 독일 공론장에서 예리하게 다루기 어려운 주제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을 이야기하는 것의 어려움 자체는 여러 나라에서 관찰된다. 다만 독일의 경우 그것이 동맹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반성의 의무에서 도출된다는 점이 다르다.

즉, 과거의 폭력은 인정받고 애도되지만, 그 인정의 방식이 다른 폭력에 대한 발화가 흘러나올 여지를 손끝으로 막는 구조로 작동하는 것 아닐까. 나는 이쪽이 어쩌면 더 견고한 형태의 폭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 강도 이야기가 아니다. 언어와 정당성을 독점당한 폭력은 이름조차 얻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다.

이 논점이 독일 극우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편, 즉 기억의 정치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극우의 역사수정주의든, 정전화된 반성이든, 그 대가는 특정한 이주민·난민 집단이 더 많이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그 '안전판'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 성찰이 독일 내부에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혹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주민의 계층 상승과 중산층의 불안, 그리고 한국의 상황

이주배경 인구가 독일의 복지와 교육을 통해 중산층으로 진입하고, 그 상승이 기존 중산층의 위기감으로 되돌아온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다. ‘밑바닥에 머물 줄 알았던’ 이들이 ‘진짜’ 독일인의 자리로 올라오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는 진단은, 혐오가 불안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떠오르며 많은 공감이 갔다.

다만 이 대목에서 나는 한국의 현실을 겹쳐 보며 다른 감정을 느꼈다. 한국의 이주배경 아동·청소년은 독일만큼의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고 학업 중단 비율도 높다. 상승 이동이 일어나서 갈등이 생기는 사회와, 상승 이동의 경로 자체가 열리지 않은 사회는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독일이 부럽다.

그러나 강의의 질의응답에서 이야기 나눈 대로, 이 부러움은 '독일 모델'에 대한 이상화일 수 있다. 독일 역시 이주배경 학생과 비이주배경 학생 사이의 학업 성취 격차가 큰 나라이고, 이주배경 인구 내 양극화도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니 부러움의 대상을 정확히 특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부러운 것은 이주배경 인구를 사회 구성원으로 셈하는 독일의 제도적 기본값이 우리나라에 비해서 탄탄하다는 점이다.

독일 노조는 이주노동자를 정말 대변하지 않았을까?

강의에서 독일 모델의 한계를 짚으며 "독일 노조조차 역사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지 않았다"고 했고, 문제의식에 공감하나, 여전히 독일 노조를 동경하는 입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1950~60년대 초 독일노총(DGB)은 외국인력 도입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했었다. 1954년 성명에서 DGB는 국제적 연대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자국에 실업자가 있는 한 노동력 유입 정책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노조의 태도가 거기서 멈춘 것은 아니다. DGB는 1970년대 초부터 외국인 노동자를 대변하기 위한 특별 부서와 다국어 상담센터를 설치했고, 이 상담센터는 이주민들의 교류와 정치적 네트워킹 거점으로 기능했다. 1984년에는 금속노조(IG Metall)에 외국인위원회가, 산하 노조들에도 관련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제도적 전환점은 1972년 사업장조직법(BetrVG) 개정으로, 외국인 노동자도 사업장평의회의 근로자대표로 선출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의 노조 조직률은 1973년 약 20%에서 1990년에는 독일 노동자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오늘날 기본법(GG), 일반균등대우법(AGG), 사업장조직법의 체계는 국적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이주노동자의 조직화·대표 권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김희성·이승현(2024), 「독일에서의 외국인 노동자 노동조합설립 및 조직화」, 강원법학(77), pp. 485-527 내용을 참조했다).

물론 이것이 충분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독일 노조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고 평가된다. 게스트 노동자 시대에는 임시 체류를 전제해 적극적인 조직화에 나서지 않았고, 1973년 포드 쾰른 공장 파업처럼 노조가 이주노동자와 대립한 국면도 있었다. 법적 보장과 실질적 대표성 사이의 간극도 여전하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고, 양가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대변하지 않았다고 하긴 힘들지 않을까? 독일 모델을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는 매우 동의하지만,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제도적 자원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강의는 우리가 오랫동안 이상화해 온(내 경우 적지 않게 동경해 왔다) 독일 모델의 내재적 한계를 직시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값진 의미를 가진다. 다만 그 직시가 “에이, 독일도 별수 없네."라는 결론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한계이고 무엇이 여전히 참조할 만한 성취인지를 가르는 작업이 함께 필요하다고 느꼈다.

독일에서 시민교육은 이미 존재하는 방어선을 지키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 방어선이 탄탄하게 만들어진 적이 없다고 본다. 제도적 차이는 더 크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다수는 고용허가제 아래에서 정주 경로가 단단하게 봉쇄되어 있고, ‘단순 인력’ 이주노동자의 가족결합권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으며, 노사협의회 같은 제도가 있으나 단기순환 체류자인 이주노동자는 실질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

독일에서 이주민이 '조야한 시민성'의 표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이미 사회 구성원으로 셈해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그 이전 단계, 즉 셈해지지 않음의 문제가 더 큰 것 같다. 적지 않은 산업과 지역 사회가 이주민들로 인해 지탱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독일 사례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주민을 권리의 주체로 등록시키는 제도적 통로(체류 자격의 안정성, 가족 결합권 보장, 작업장 내 대표성 등)가 아닐까? 독일이 지금 겪는 갈등은 그 통로를 열어둔 사회가 치르는 비용이고, 한국이 겪게 될 갈등은 그것을 열지 않은 사회가 치를 비용일 가능성이 높다. 후자가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강의 이후에

강의 이후 베를린에서 사건이 있었다. 7월 25일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 LGBTQ+ 프라이드 행사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CSD) 행렬에 차량이 돌진하고 흉기 공격이 이어져 한 명이 사망하고 29명이 다쳤다. 가해자는 IS 가담을 시도했던 이력으로 이미 당국에 등록되어 있던 21세 남성이었고, 독일 검찰은 이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로 규정했다.

물론 폭력을 실행한 쪽은 독일 극우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건 직후의 정치는 정확히 강의에서 이야기했던 구도로 흘러갔다. AfD 공동대표 알리스 바이델은 트위터(현 X)를 통해 곧바로 메르츠 총리가 '이주민 폭력'에 충분히 조치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자당이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대로 바이델 자신이 동성 파트너와 함께 살지만, AfD의 강령과 지지 기반은 성소수자 권리에 적대적이고, 실제로 독일의 CSD 행사는 극우의 조직적 방해와 공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왔다. 그럼에도 이슬람주의 테러가 발생하는 순간 극우는 성소수자를 '우리'의 일부로 호명한다. 성소수자는 표적이자 동시에 도구가 된다.

이주민이 사회 구성원으로 셈해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위협으로 감각되듯이, 가시화된 소수자는 보호의 명분이 되는 일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일을 동시에 겪는다. 셈해진다는 것은 안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된다는 뜻에 가까운 것 같다. 그 싸움에서 누가, 어떻게 대신 말하는지를 보는 일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 같다.

마지막으로,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