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7일, 광주 트라우마센터는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국가폭력·고문생존자 재활과 국가의 의무에 관한 국제심포지움’을 열었다.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노라 스베아스 위원과 조지 투구시 위원, 유럽의 고문생존자재활센터 네트워크 엘리제 비텐바인더 의장, 미국 고문피해자센터 누신 사르카라티 변호사, 이영문 국립공주병원장, 숙명여대 정경수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다. 법무부와 국가인권위원회, 대한변호사협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생존자 및 제주 4·3사건 생존자, ‘진실의 힘’ 김철 이사가 토론에 참여했다.
유엔이 1987년 ‘고문방지협약’을 채택한 이후, 국제사회는 ‘고문 없는 세상’이라는 인류의 위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왔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2013년 4월 ‘유엔총회 결의문’을 채택, 고문생존자의 재활을 위한 ‘국가의 책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협약 14조 및 ‘일반논평 3’에 따른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문생존자 치료를 위한 재활센터를 설립·운영·유지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피해자에 초점을 두고, 피해자의 구제 및 신체적·정신적 재활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서는 고문, 의문사, 민간인 학살, 반인권적 공권력 행사 등 국가폭력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재활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의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울러, 한국정부가 국제사회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국가폭력이나 고문생존자의 치유·재활을 위한 상설적인 전문치유기관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그 날 토론자로 참석한 김철 선생님의 발표 전문을 싣는다.
“국가는 피해자에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진심을 담아 사과해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진실의힘에서 온 김철입니다.
진실의힘은 군사독재정권시절 수사기관에 영장 없이 끌려가 수십 일에 걸쳐 잔인한 고문을 당했던 고문생존자들이 만든 재단법인입니다. 재심재판을 통해서 무죄를 받고,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국가의 책임을 추궁한 끝에 받아낸 배상액의 일부를 출연해서 진실의힘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고문과 간첩조작, 감옥살이, 사회적인 차별 등 고통 속에 살아왔지만, 이 고통스런 삶을 토대로 국가폭력과 고문 등 아픔 속에 있는 분들을 찾아 위로하고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고문생존자 재활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묻는 심포지움에서 말씀 드리려고 하니, 거대한 파도가 할퀴고 지나간 폐허 가운데 홀로 서있던 그때의 악몽이 새롭습니다.
우리들은 한 달 또는 4개월씩이나 밀폐된 고문실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군을 고문하는 방식으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들을 대한민국 경찰, 기무사, 안기부가 짓밟고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강타하는 것도 모자라 물고문, 거꾸로 매달고 온몸을 찌르기, 성기고문, 바늘로 손톱 찌르기, 잠 안재우기, 가족을 빌미로 자백받기 등등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을 하여 폐인을 만들어놨습니다.
2,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참혹하고 끔찍했던 고문실이 생생히 떠오를 때면, 온 몸이 쑤시는 통증으로 잠을 못자고 뜬눈으로 밤을 꼬박 세울 때가 많습니다. 맑은 영혼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고문이라는 상처는 눈을 감아야 끝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나마 진실의힘을 만들어서 다른 분들을 도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 고통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저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 한 달 넘는 끔찍한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되었습니다. 7년 감옥을 살고 나왔으나 세상의 따가운 눈초리, 외면, 차별은 끝이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노력 끝에 2010년 재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지금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이제 무죄를 받았으니 다 해결된 것 아니냐, 국가로부터 보상금 받았으니 다 된 것 아니냐고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통스럽던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죄나 손해배상이 우리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위로해줍니다. 억울함을 달래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나를 불법 감금하여 끔찍한 고문을 하고, 증거를 조작하여 간첩으로 조작해낸 고문 수사관들과 그들의 범죄를 알고서도 오히려 나를 간첩으로 몰아세운 검사, 그들을 어찌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의 재심재판에는 나를 고문한 수사관이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그는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의 범죄행위를 부인하였고, 오히려 자신이 빨갱이를 잡은 애국자라고 강변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충성했다는 궤변만 늘어놨습니다. 상금 타먹고 진급해보려는 과욕에서 저질러 놓은 조작행위를 충성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극히 불손한 반역죄인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고문은 국가의 충성이 아니고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독재통치를 하려는 통치자의 권력승계 수단에 공범자들의 소행일 뿐입니다. 그는 거짓으로 일관함으로써 법정의 권위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위증죄를 범했습니다만, 검사는 그를 위증죄로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제가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자 대법원에 상고를 했습니다. “수사관이 폭행사실을 부인하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재심재판부가 피고인의 말만 믿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원은 “국가의 이름으로 과거 잘못된 수사와 재판을 피고인에게 위로한다”고 판시했는데, 검찰은 1989년 사건 당시 제 뺨을 슬리퍼로 때리던 검사의 행태와 하등 다를 바 없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2년 반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되었지만 그 시간동안 저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삶이 얼마나 힘이 들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 힘겨운 인생을 저는 다 내려놓고 용서하고 떠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제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과 그 시간들, 그 시대를 용서하고 떠나보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얼마 전 남아공 만델라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과거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파헤쳤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인정할 때 사면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사위원회를 만들고, 진상규명을 했으며,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판결도 나왔습니다만, 단 한사람의 고문수사관도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기소한 검찰 역시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단 한사람도 단죄하지 못한 것이 우리 과거사의 현실입니다. 모두 공소시효라는 방패 뒤에 숨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면을 하기 위해서는 범죄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해를 했던 그 개인의 양심에 맡겨둬서는 안될 것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과거 불행한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을 대신해서라도 사과해야 합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피해자가 용서한다고 할 때까지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고문 가해자 일 개인도 잘못을 인정할 것 아닙니까. 그게 옳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걸 하지 못하고서 어찌 일본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국내의 과거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위정자들이 이웃나라의 과거 잔혹성을 말할 권리와 양심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가 고문생존자들의 고통을 깊이 공감할 줄 아는 분들이 모인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고문생존자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서 대한민국 정부에 적극적인 책임을 묻고 우선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