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랑 인권사업팀장│
형제복지원 후신 '실로암의 집' 기록 이관 현장 방문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감추어진 사건의 진실 규명이 필요한 이유를 피해자 본인이 직접 목소리를 내어 알릴 수도 있고, 우연한 계기로 그의 피해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 피해자의 용기에 답하고, 이런 사건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과제를 마주한다. 그렇다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가장 첫 단계는 무엇인가? 근간이 되는 것은 아마도 '기록을 찾는 일'이다. 이를 통해, 피해자의 피해 사실이 입증되며, 더 나아가 피해자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시간이 실재했으며, 그 시간을 견뎌 '살아남았다'라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록에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간직되어 있다. 쌓여 있는 기록을 읽고, 분석하며 우리는 어떤 사건의 진실의 뼈대를 얽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며 우리는 '가능한 모든 기록'을 모으는 것이다. 어떤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 3월 11일 부산일보는 부산 ‘실로암의 집’이 유튜버 사이에서 폐가, 흉가로 알려졌으며, 내부에 형제복지원 관련된 기록과 함께 많은 물건이 가득 차 있다고 보도했다. 실로암의 집은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재단이 형제복지지원재단, 느헤미야 재단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며 1991년부터 2016년까지 운영한 중증장애인 복지시설이다.
보도 당시 부산일보는 부산 지역에서 형제복지원 대응 활동을 지속해 온 사회복지연대 김경일 사무국장과 함께 현장을 방문했다. 영상 속 실로암의 집 내부는 충격적이었다. 전체적인 양을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의 문서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고, 실로암의 집을 운영한 재단의 수익사업 관련 기자재가 건물 내부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잠깐 촬영하는 사이에도 형제복지원 관련 물건을 비롯해 재단의 운영 및 행정 등 관련 문서도 찾아냈다.
방치된 건물, 남겨진 기록
이전에도 형제복지원 대책위, 부산시 형제복지원 실태조사팀 등이 진실규명 관련 기록을 확보하기 위해 실로암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대책위가 우선적으로 확보한 자료는 박인근 원장이 만든 형제복지원 운영 자료집, 형제복지원 기관지인 <새마음> 등 주로 형제복지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위주이다. 이후에도 2018~9년 부산시 형제복지원 실태조사팀이 방문하여 추가 자료를 찾았으나, 실로암의 집에 남아있는 기록 전체를 파악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상 속에 보이는 부분만보더라도, 건물 내 ‘방치’된 기록은 대단한 분량이었다. 김경일 사무국장과 확인한 결과, 실로암의 집 내부에 형제복지원을 운영했던 법인이 해산할 때까지의 운영 기록, 행정 기록 등이 상당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방대한 기록 속에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조각들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낱장 하나까지 모든 기록을 안전한 장소로 이관해야 했다.
부산시가 2014년 느헤미야 재단의 해산과 청산을 명령했으나, 재단의 불복 소송, 청산 절차 지연 등으로 2017년까지는 실로암의 집에 관계자 등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이후 몇 년이 지나 버려져 있다시피 한 건물은 겉보기에 닫혀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하고자 하는 이, 단순한 호기심에 들어가 보고자 하는 이 등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건물에 들어가 내부를 훼손하거나, 내부에 있는 기록을 유출할 수 있었다. 형제복지원에서 발생한 잔혹한 폭력, 사망 등도 이들의 방문을 부추기는 ‘소재’로 다루어져, 방문자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였다.
상황은 다급했다. 보도 이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는 실로암의 집 ‘기록’에 대해 진실의 힘과 논의했다. 기록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확보해야 했다. 협의 결과, 한종선 씨는 형제복지원 진실규명 조사를 앞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부산시에 조속히 상황을 알리고, 빠른 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실로암의 집 정문 앞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현장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한종선 씨가 부산으로 내려간 첫날밤에만 유튜버 4 팀이 현장을 방문했다. “저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이고, 이 건물 안에는 우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사라지면 안 되므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종선 씨의 설명은 그들에게 바로 와 닿았다. 흥미로운 ‘소재’ 안에 사실 사람이 있다는 것, 호기심에 현장을 찾았을 이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한종선 씨는 기록이 모두 안전한 장소로 이관될 때까지 실로암의 집 정문 앞에서 노숙을 감행하겠다는 의지를 진실화해위원회, 부산시에 전달했다. 결국 부산시가 그 요구에 응했다.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실로암의 집에 존재하는 자료를 낱장 하나까지 철저히 확보 및 이관하여 진실화해위원회와 자료 조사 및 보존 방안에 대하여 조속히 논의하기로 했다. 부산시 기록 이관은 3월 19일 금요일 진행됐다.
기록 이관의 날, 형제복지원은 이렇게 운영됐다?
이날 진실의 힘은 기록 이관 현장, 실로암의 집을 방문했다. 당일 오전 9시쯤 도착한 부산 실로암의 집은 부산역에서 27km 정도 떨어졌으며, 가장 가까운 주거단지로부터도 약 3km 거리인 산골짜기에 위치했다. 폐허에 가까운 정문에는 길게 자란 들풀이 무성했다. 그 사이로 솟아오른 길쭉하고 파란 간판에는 “실로암의 집 중증장애인요양원”이라 적혀있었다. 정문을 지나 5~60도의 가파른 경사로를 2~3분 정도 오르니 멀리서 조금씩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날부터 밤새 기록 이관을 준비하며 현장을 지킨 피해생존자 한종선, 박순이, 김대우 씨와 김경일 사무국장이었다. 이후에도 피해생존자 최승우, 엄남현, 박경보 씨 등이 실로암의 집을 방문했다.
실로암의 집 내부는 영상에서 본 그대로였다. 대책위 등이 몇 년 전 이미 확보한 형제복지원의 운영자료집 등은 아직도 박스째로 쌓여있었다. 형제복지지원재단, 느헤미야 재단 등의 운영 자료를 비롯한 기록들은 대부분이 파일철로 분류되어 몇 개의 사무공간에 집중적으로 놓여있었다. 도착한 당시에는 눈 앞에 펼쳐진 기록의 내용과 양에 압도되어 건물 전체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곧 부산시에서 고용한 용달 인력들이 도착하고, 우리는 기록 이관이 “낱장 하나까지 철저히” 될 수 있도록 지켜봤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기록과 상황을 주시하며 이관 과정 전반을 철저히 살폈다.
쌓여 있는 문서에는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의 이름이 자주 보였다. 2014년 2월 느헤미야 재단으로 명의를 변경하기 이전 형제복지지원재단의 대표는 박인근이었다. 각종 결재 서류, 이사회 관련 문서에 등장하는 그의 이름은 기시감을 들게 했다. 1987년 형제복지원 내부의 인권침해가 알려져 박인근은 기소되고 원생들은 전원 조치 되거나 사회로 돌아갔다. 그래서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 종결되었는가? 눈앞에 있는 기록들이 온몸으로 ‘그렇지 않다’ 외치는 듯했다.
각종 폭력과 노역, 영양결핍 등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1987년 아무런 재활 및 적응 과정 없이 다른 시설로 옮겨졌거나 노숙생활을 시작했다. 일부 원생들은 형제복지원이 명의 변경한 ‘재육원’에 이어 입소하기도 했다. 박인근은 횡령 등 일부 행위에 대한 책임이 겨우 인정되어 2년 6개월 징역살이를 마친 뒤, 다시 부산시 사회복지시설의 장으로 복귀했다. 기시감의 원인은 그것이었다. 형제복지원이 이름만 바꾸었을 뿐, 박인근, 박인근 일가친척 등은 복지시설 운영을 계속했고 부산시는 이를 허가했다. 복지시설 보조금을 받고 수익사업을 운영하며 재단은 계속 유지됐다. 실로암의 집 기록 중 박인근의 복지시설 운영 철학, 운영을 위한 공부와 고민이 드러나는 서류철도 눈에 띄었다. 형제복지원은 한 명의 악마 때문에 운영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행정 시스템 내에서 허가를 받고, 복지시설의 테두리 내에서 유지됐다.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실로암의 집에 있는 문서와 기록을 통해 형제복지지원재단 등의 운영 형태를 이해하는 것이 곧 형제복지원과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딘가에는 있다, 더 찾을 수 있다
건물 외부와 내부를 그제서야 찬찬히 살펴보았다. 깨진 창문, 어두컴컴한 복도, 1층부터 5층까지 뚫린 중앙계단에는 을씨년스런 원색의 담요가 철제봉 위로 쌓여있었다. 층마다 시설 거주자들이 지냈을 방 20여 개와 세탁실, 휴게실 등의 공동공간으로 구성됐다. 어떤 방은 운영 당시처럼 침대, 협탁과 수납장 정도가 들어있었지만, 많은 방에는 처리하지 못한 집기, 기자재, 박스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쉽게 문을 열 수 없는 곳도 있었다. 제대로 된 반성과 처벌 없이 바로 그 장소에서,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바로 그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형제복지원은 이렇게 운영되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기록 안에 그 유착과 협력의 역사를 드러낼 조각이 어딘가 있으리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5t 트럭을 가득 채운 서류와 문서가 실로암의 집을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들의 목소리가 사건에 눈감은 사회를 억지로 깨웠고, 형제복지원에 대한 최초의 ‘진실규명 조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진실화해위원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진실의 실마리가 되는 기록도 피해생존자들이 직접 지켜냈다. 이제 피해생존자들의 기다림을 멈추고 본격적인 진실규명, 피해자 배상, 재발방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피해생존자들, 그리고 함께 힘을 모아온 시민단체, 연구자 등은 형제복지원 기록을 충분히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진실의 힘 또한 2018년 12월 부산시에 형제복지원 사망자 등 관련 기록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답변은 듣지 못했다. 이외에도 기록은 너무 오래 전 사건이라서, 유실돼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등등의 여러 이유로 기록을 수집하기는 쉽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힌 삶을 살아냈던 피해생존자 중 그 신분을 소명할 자료를 찾을 수 없는 분들도 매우 많다.
도무지 어디로 뻗어도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았으나, 이곳에서 일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실로암의 집을 바라보며 되뇌었다. 어딘가에는 있다, 더 찾을 수 있다. 이곳은 흉가도, 폐가도 아닌, 사건 현장이었다. 이처럼 어딘가에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조각들은 감춰져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방치되지 않게, 더 소실되지 않게 서둘러 찾아내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니 흉흉한 건물을 향해 공포심이 느껴지기는 커녕 심장이 뛰고 활기가 돈다.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