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요한 : 마이데이란 시간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우리 마음 속의 상처를 공개적으로 질문을 하고, 마음을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우리들 각자 돌아보면 마음 속에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이 누구나 있기 마련이구요, 그런 부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닌거죠. 하다못해 우리의 개인적인 상처도 그럴진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문과 폭력들로 입었던 마음의 상처를 여러 사람들,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힘들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 섰다는 것 자체, 상처를 직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치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최양준 선생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같이 나눠주실텐 데요, 선생님이 말할 준비가 되셔서 오늘 오신거지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돼있어야 해요. 얘기하는 분 따로 있고, 듣는 분 따로 있는 그런 것 보다는 여기 있는 분들이 마음을 같이 해주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 자리는 따로 없지만 선생님이 얘기 하실 때마다 마음에서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 들 때, 상상 속에서나마 걸어 나오셔서 선생님의 손을 마주잡아 주신다고 생각하시거나, 선생님과 어깨를 맞댄다고 생각하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마이데이를 진행하면서 드는 느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고통의 질감은 달라진다고 해야할까, 조금씩 조금씩 날카로웠던 상처들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먼저 하셨던 선생님들은 그런 느낌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요. 오늘 가만히 최양준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선생님의 고통을 함께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아직 아물지 않는 상처를 마주하는 시간일 거 같구요. 선생님의 그런 것에 공감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우리 안의 내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공명하는 자리가 될꺼구요. 최양준 선생님, 전에 많이 사양하셨잖아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는지?
최양준 : 저도 과거 괴로웠던 것을 내색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서요. 아시다시피 저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4살때 돌아가시고 계모 밑에서 자라다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상경해가지고 목수일, 인테리어하고 문짝 자르는 일을 쭉 해왔어요. 그런데 사돈되는 분이 일본에 가면 돈벌이가 아주 좋다해서, 제가 어렸을 때 일찍 부모도 돌아가시고 해서, 돈벌어 마누라 얻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보자, 그런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 있으면 한자라도 더 배우고, 이랬는데. 경제적인 여건이라던지 모든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에, 저는 공부도 못해보고 목수일을 하다가 일본을 가게 됐죠. 처음에 일본에 가니까 야, 이거 말이 통하지 않아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사장이랑 같이 일을 하는데 내 의사를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문요한 : 그때 누굴 믿고 가셨나요?
최양준 : 친척 사돈 그 분을 믿고 갔죠. 거기서 한 3개월 있다가 한국에 나왔죠. 도저히 생활을 못하겠더라구요. 그리고 여기서 생각하는 것 보다는 돈벌이도 그렇게 좋진 않더라구요. 그런데 다시 한국에 와서는 일손도 잡히지 않아서 제가 다음해에 일본을 또 갔죠. 다 아시겠지만, 70년대 초 그때만 해도 여권을 내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들었어요. 빽 없으면 우리 같은 서민들은 생각도 못 할 정도였죠. 그래서 재차 제가 일본을 들어가서 생활을 하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제가 75년도에 일본에서 불법체류를 한 거죠. 그래가지고 한 3~4년 정도 낮에 일하고, 저녁이면 열심히 사전 하나 들고 공부를 하고, 그래서 한 3~4년 정도 지나니까, 가족들이 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사장한테 한국 나갈란다 하고 이야기 하니까 사장이 이런 방법도 있다더라, 해서 모리미스 가스오 라는 일본 사람 여권을 일본 사장이 만들어주길래, 그 여권을 가지고 한국을 왔다 갔다 했던 거예요. 그 여권을 가지고 왔다갔다 하다가, 붙잡히게 되었죠. 오사카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서 오무라 수용소로 갔죠.
문요한 : 여권법 위반인가요?
최양준 : 예, 여권법 위반이죠. 오무라 수용소에서 3개월인가 있다가 비행기를 타고 김해공항으로 오니까 부산 보안대 수사관들이 4명이 딱 와 있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이거 뭐 내가 여권법 위반을 했기 때문에 나를 잡으러 왔다보다, 이 생각 밖에 없었거든요. 아 그런데 가니까 그냥 뭐 빨간 카페트가 딱 깔려있는데, 겁을 그냥 확 주더라고요. “야, 이노무 새끼야, 너 솔직히 말 안하면, 너 이 빨간 카페트가 무슨 카페트인지 아냐, 너 같은 놈 들어오면 두들겨 패서 피로 물든 자국이다, 이 카페트가.”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겁을 주고 3일동안 잠을 안재우더라구요. 3일을 잠을 안자고 나니까요, 도저히 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더니 3일 이후부터 진술서 써라 그러지, 고문을 시작하더라구요. 돌아가면서 들어온 사람마다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데 병신 되는 줄 알았어요. 거기서 한 25일 동안 반복, 반복, 반복을 해서 도저히 배겨날 수가 없는 거예요. 하여튼 두들겨 맞고 물고문, 고추가루 고문, 이건 뭐 하는 것은 고통이고 그러지만요, 제일로 거기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은요, 벌거벗겨 놓고 그 추운데 발가벗겨 놓고는 전기 고문도 전기고문이지만은, 이 대바늘로다가 손톱 밑 찌르는 거요, 그것은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한 20일을 당하고 나니까 참.. 죽는게 낫지 사는게 어떻게 살겠냐 말입니다. 제가 3번을 까무라쳤었어요, 그 카페트 위에서. 그때 의무과에서 와가지고 봐주고, 청진기 대고 그러더라구요.
두 놈이 나가면서 “내가 너를 오후에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하더라구요. 제가 이러다가는 내 처자식도 한번 못보고 죽겠구나 싶더라고요. 화장실도 가고 싶었지만은, 나를 이렇게, 팔을 못썼으니까, 팔을 부축해가지고 화장실 쪽으로 올라가는 그 군인이 소홀히 한 것 같더라구요. 근데 뭐 변소 창문이래봐야 높은데 걸려있고, 작은 크기 밖에 안돼죠. 그런데 제가 기왕 죽을 바에는 어린 처자식이나 얼굴이나 한번 보고 죽자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도망을 시도했죠. 근데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거길 도망을 갔는지, 아마 지금 그 담을 넘어서 도망을 가라고 하면 지금은 못 갈 것 같습니다. 화장실 문을 딱 뛰어 넘었는데, 아 그냥 보안대 담이 말입니다. 그게 높이 있는 겁니다. 거기다가 철조망이 막 똘똘똘 말려 있는 겁니다. 맨손에다 맨발에다 허술한 군복을 입고 거길 내가 뛰어 넘었습니다. 어떻게 뛰었는지 팍 뛰어넘었는데 손이고 발이고 뭐 다 찢어져가지고 피는 범벅했고, 팍 뛰어 내리니까는, 창살 같은 걸 막 박아놨더라고요. 창살. 그래가지고 툭 뛰어내리니까는, 지금도 여기가(발바닥을 가리키며) 간질간질하고 지금도 아픈데요, 한 복판에 그 창살이 박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정신에 창살을 쭉 잡아뺐죠. 그랬더니 피는 질질 나지... 그래도 기왕 담을 넘었으니까 도망 한번 가보자 하고 가정집, 옛날 재래식 연탄 때고 하는 집, 거기로 도망을 갔어요. 화장실에 가서 숨었는데 냄새가 나서 도저히 못 있겠는 거예요. 그래서 부엌으로 들어갔어요. 부엌으로 가니까 요만한 거울이 하나 있는데,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연탄불 아궁이가 두 갠가 있었고. 거울을 보니까 25일 동안 수염을 안 깎았지, 이놈들이 따귀를 얼마나 때렸는지 양 볼이 이만큼 부어가지고 저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몸으로 내가 어디 도망을 가겠나 싶어서, 다시 부산 보안대 정문 쪽으로 가니까 나를 잡으러 오더라구요. 가자 그래서 저를 지하실로 다시 데리고 들어 가더라구요......
*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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