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살아남은 ‘증인’, 최연석

“진짜 역 바로 옆에 붙어 있구만?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여.”

2019년 3월 최연석은 이른 아침 전주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했다. 검은 벽돌과 손 한 뼘의 좁은 창문으로 정체를 숨긴 이곳에 온 건 37년 만이다. 1982년, 전주에서 작은 슈퍼를 하는 그의 앞에 낯선 자들이 나타났다. ‘잠시 조사받을 것’이 있다며 목적도, 목적지도 밝히지 않고 그를 끌고 갔다. 멈추지 않고 200km의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한강 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그는 1982년 김제 가족 간첩단의 ‘참고인’이자 ‘증인’이다. 이 사건은 피를 나눈 큰아버지의 ‘자백’이 조카를 ‘간첩’으로 만들고, 형의 ‘허위진술’은 동생을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씨 가족은 서로를 간첩이라고 지목했다. 살기 위해 최낙교는 큰아버지인 최연석의 이름을 불었고, 살기 위해 최연석은 최낙교를 간첩이라고 썼다. 원수가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조카들은 간첩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고문이 가해졌다. 물속에서 자맥질하다가 폐까지 물이 들어차고 온몸에 전류가 흐른 순간, 최연석은 죽음과 맞닿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입을 열었고, 지장을 찍었다. 몸에 든 멍을 지우기 위해 안티푸라민을 발라주던 고문 수사관은 “나가서 허튼 소리하면 죽을 줄 알아라”고 했다. ‘고문을 받고 거짓말 했다’고 부인하자 검사는 “헛소리를 한다”고 했다. 진술을 받아 쓰는 검사 서기는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아저씨도 간첩 된다”고 했다. 간첩은 곧 죽음인 시대였다.

“긍게 나 맞은 것은, 아프고 고문당한 것은 뭐 기억하고 싶지 않고 다만 낙교가 허지 않은 일을 했다고 싸인한 내 자체가 미워서. 그런 사실이 없는데. 간첩도 아인데. 내가 어른이 돼 갖고 싸인한 것이 내가 밉고 괴로운 거예요. 괴로웠어. 괴로웠어. 지금도 낙교만 말하면 눈물이 나요. 내 이제 잊을 때가 됐는데 그게 쉽지 않고만…”

고문에서 살아남은 최연석은 원죄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살아서 전주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방에 틀어박혀 서너 달 간 술만 마셨다. 어른으로서 “절대 아니라고 혀야 할 판이디 혔다고 현 내가 미웠고” “좋은 사람 하나 내가 죽였다고 생각”했다. 자기 말이면 죽는 흉내도 껌뻑 낸다는 부인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자책과 좌절이었다. ‘조카를 팔아먹었다’는 고향 가족들의 비난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고문 받은 사실도, 허위자백의 심적 고통도 이해할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쉬쉬하며 홀로 삭혀내야 했다.

“이런 얘기? 전혀 안 해요. 사람들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뭣 하러 말하겄어요. 나 혼자만 갖고 다니는 거지. 죽을 때까지 갖고 댕기는 거지.”

그러나 이것은 존재해선 안 될, 가져선 안 될 죄책감이다. 피해자들끼리 죄책감을 나눠 갖게 만든 것이 고문의 목적이었다. 최연석도 알고 있다. 그 어떤 인간도 당해낼 수 없는 고문 앞에서 무너진 것은 절대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문이라고 허면요. 시키는 대로 헐 수 밖에 없어요. 고문하는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헐 수 밖에 없어요. 사람은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뭐가 나오든 시키는 대로 헐 테니깐 살려만 달라 애원했당께요.”

그는 ‘빗겨갈 수 없다’는 말을 거듭하며 자꾸만 말을 흐렸다.

“고문은 빗겨갈 수 없어요. 빗겨갈 수 없어. 물고문만 시켜도 다 시킨 대로 하게 돼 있어요. 못 비껴요. 못 비껴. 절대 못 비껴요...”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고인 중 한 사람은 사형대에 섰고, 두 사람은 죽음을 택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건 경찰, 검찰, 법원 그리고 국가였다. 하지만 아무리 거짓을 꿰어 맞춰도 진실은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다. 살아남은 최연석은 자신이 고문을 받았을지도 모를 남영동 대공분실 50X호 방 한 가운데에서 증언했다. 그때의 고통을 복기하는 것이 괴로울 법도 한데 그는 담담했고 마음이 가볍다고도 했다.

“매 맞고 고문으로 억울하게 당했으니 그 자들의 억울함을 내가 풀어줘야지. 간첩이 아니라고 판명이 나서, 다행히 영혼이라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죠,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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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가족 조작간첩단 사건]

1982년 8월, 김제군 진봉면의 작은 고사마을, 어느 날 밤 동네 어른 최을호씨가 낯선 사람들을 따라 간 후 종적을 감췄다. 마을 이장으로 동네의 신임을 받아온 조카 최낙전씨도 숙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전주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최낙전씨의 형 최낙교씨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최낙전, 최낙교 두 명의 조카도 어느 날 아침 사라졌고, 몇 달 뒤 세 사람은 별안간 ‘간첩죄’로 기소돼 법정에 세워졌다. 이들 앞에는 ‘김제 가족 간첩단’ 이름이 붙었다.

강제로 북한에 다녀온 사실 밖에 없는 최을호씨에게는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누설한 간첩죄’가 덧씌워졌다. 무인포스트에서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다고도 했다. 어디에도 그 ‘증거’는 없었다. 최장 45일간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고문 수사를 받은 후, 세 사람은 ‘간첩’임을 자백했다. 그 결과는 1985년 최을호 사형 집행, 1982년 최낙교, 1991년 최낙전 자살. 

무자비한 고문이 이뤄졌던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최연석씨가 유일하다. 최낙전, 최낙교씨와 5촌 형제인 그는 김제 가족 조작간첩 사건의 ‘참고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라고, 전주에서 최낙교와 몇 번 막걸리를 마셨다는 이유로 그는 최낙전, 최낙교씨가 ‘간첩’임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으로 둔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