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룬 소설 <은희>를 쓴 박유리 작가를 만났다. 10년 차 기자로서 기사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가 이번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소설적 진실’을 담은”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는 도시의 안보다는 바깥에 서서, 쉽게 지나칠법한 어떤 냄새와 온도를 포착하고,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의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은희>는 세상에 알려졌지만 쉽게 사라지고 마는 ‘사건’,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인생과 기억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이다.
왜 형제복지원 사건인가요. 기자로서 수많은 사건과 사람을 접했을 텐데 그중에서도 형제복지원을 소설화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이유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떤 일은 하지 않으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지요. 마침내 그 일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야 이유를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제게 형제복지원이 그러했습니다. 첫 번째 책을 내야 한다면 형제복지원이어야 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쓸 때쯤에야 어설프게 알 것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듯이, 저 또한 지독한 기억을 가진 사람이고, 그 기억에서 한 발짝 떼기가 어려운 시간을 지나쳐 왔습니다. “그림자처럼 떼어낼 수 없는 기억”이 한 사람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늘 패배하게 합니다.
형제복지원은 꽤 알려진 사건입니다. ‘아는 사건’입니다. 사건은 한 문장, 한 단어로 정리됩니다. 사건은 “12년간 513명이 사망한 인권유린”으로, 피해 생존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트라우마”로요. 저는 “안다”는 말보다 “모를지도 모른다”, “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여백을 더 좋아합니다. 이러한 여백에서 성찰과 사유가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소설을 쓴다는(읽는다)는 것은 “12년간 513명이 사망한 사건”이라는 표피 아래 어둡고 좁은 곳으로 손을 집어넣어 뜨겁고 차가운 기억의 물질을 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정보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나눔과 애도가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든다고 믿어요.
기자가 쓴 소설이기에 2014년 한겨레에서 연재한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사 중 "형제복지원은 세간에 알려졌다가 잊혀진 사건이지만, 복지원에 갇혔던 수만 명의 인생과 기억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라는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라진 적 없는 인생과 기억"이라는 문장에서 이 소설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시간은 과거를 지나 현재로, 미래로, 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기억은 지나간 시간이나, 결국 돌아오고야 마는 현재이며, 미래이기도 합니다. 결국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시간이지요. 시간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물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직선의 시간이면서, 기억에 의해 체험적으로는 되돌아오는 ‘원형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기억의 현재성’입니다. 생존자들에게 고통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소설은 이러한 기억의 현재성을 살리기 위해 청각, 후각, 시각적인 문장을 많이 쓰려고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 당장, 눈 앞에 펼쳐지듯이 말이지요.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은 기사와 소설의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형식이라고 인터뷰한 적 있어요. 이번에는 완벽한 소설입니다. 기사를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민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기자로서 현재진행형 사건을 소설화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듯 하고요.
현재진행형인 사건은 ‘팩트’로서 존재합니다. 팩트를 재현하는 것이 문학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의 재현에 그쳐서는 소설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사실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려 노력했습니다.
소설에는 사실과 허구, 현실과 진실이 혼재합니다. 부랑인이라고 우겨서라도 남루해 보이는 사람들을 치웠던 1987년의 시대,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통과되지 못한 2015년의 현실, 그리고 사실의 조각들입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도망치다 붙잡혀 매 맞아 숨진 김계원의 죽음과 그런 김계원에게 안티푸라민을 발라주었다는 윤우택의 짧은 검찰 진술, 박인근 원장을 위해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한 수용자 함천수, 복지정책의 우수성을 알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설문, 형제복지원을 긍정적으로 다룬 MBC 드라마 ‘탄생’의 제작 일화 등이 ‘사실의 조각들’입니다.
기억을 잃었다는 박인근 원장과 기억을 잊지 못해 고통스러운 피해 생존자 사이의 거대한 간격은 전반적인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과 사실 위에서 ‘소설적 진실’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인간됨이 가장 파괴되는 곳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인간됨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니까요.
책을 넘길수록 읽기 어려운 지점은, 소설임을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현실의 사건, 사람과 겹칠 때였어요.
소설 속 수많은 인물은 제가 만난 생존자들의 어떤 한 조각을 따서 창조한 캐릭터입니다. 그 한 조각을 발견할 때 누군가 떠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의 한 챕터, 한 챕터를 읽기가 고통스러웠다고 말씀하신 독자도 계셨습니다. 보다가 덮기도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고도 하셨습니다. ‘있을 법한 이야기’가 소설의 본질이며, 이 ‘있을 법한 이야기’를 읽게 됨으로써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지요. 그러나 <은희>는 ‘있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들었기에 다시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작가의 말’은 허구가 끝났을 때 현실을 마주할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저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은희>는 불행을 선사합니다. 지독한 인간의 불의와, 그렇게 망가진 애먼 인생들의 불행에 관한 서사이며, 애석하게도 현실입니다.
<은희>에는 피해 당사자, 피해자의 아들, 피해자이자 방관자였던 이의 아들 그리고 가해자가 나옵니다. 읽으면서 ‘나’는 누구인가 생각했습니다. 나라고 해서 가해자가 아닐 수 있을까? 사건에 대해 몰랐던 나,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나, 모두 해결됐다고 믿는 나 등등 내 안에 내재된 수많은 감정과 대면했습니다. 나아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실은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아직 답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답은 이제 책을 덮어놓은 뒤의 시간에서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완벽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고, 완전한 답을 찾아가는 시작은 ‘질문한다는 행위’이니까요.
소설에는 피해자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면모, 가해자라면 지녔을 법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찌그러진 인물들과 인물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도덕적, 정치적으로 완전한 피해자와 응당 그럴 것이라고 예측되는 가해자 사이에서 빠져나와, 독자가 방관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어쩌면 완벽한 선악 구도가 독자를 방관자로 만들지도 모르지요.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대학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는 등 비교적 문제없는 사회생활을 하는 미연이 남편과 아이 교육, 체벌을 두고 다투다 남편이 하는 말이 다소 충격적이었어요. "거기서 배운 대로 애한테 하지 마"(97쪽) 트라우마란 머리와 몸이 기억하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발현되는 장면으로 읽혔습니다.
미연은 과거를 잊고 살아가려 하지만 기억의 힘에 휘둘립니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가정을 꾸렸으며, 안정적인 재정 상태에서 살아가지만 기억의 힘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눈을 맞추고 천천히 친구가 되는 과정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이 아닌 적당한 필요를 주고받게 되지요. 형제복지원 생존자분들도 다시 마음을 열고 누군가와 친구를 맺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지점에서는 그 누구보다 힘겨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그의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는 않는지요.
피해자의 아들 준과 진상규명 활동가 병호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병호는 생수병을 못 본 건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의 언어에는 묘한 규칙이 있었는데 모든 말을 '그러니까'로 연결하는 거였다. 마치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우연이나 기적은 없는 것처럼."(29쪽) 형제복지원이라는 괴물의 탄생이 단순히 부랑아가 많던 시기이거나, 1980년대 군사정권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지 않았다.” 학살은 미치광이 한 명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아니라 다수의 암묵적 동조로 이뤄집니다. 레닌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내전 등 제노사이드를 분석한 학자 와이츠(Eric D. Weitz)는 제노사이드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특정 인종, 민족, 종교, 국민, 집단이 파괴되는 동안 집단 학살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사람들은 서서히 감염되어 가지요. 지극히 보통 사람들에 의해 제노사이드는 이뤄집니다.
비단 국가 차원에서 일어나는 제노사이드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작은 집단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이유 없는 왕따와 배제를 봐도 다수의 사람들이 ‘정상성’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배제의 공기 속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하지요. 배제는 감염 같은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수십 년에 걸쳐서 일어났던 형제복지원, 서산개척단, 선감학원 등 수많은 강제수용 사건을 보면, 보통 사람들의 ‘적극적 무관심’ 속에 용인됐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학살과 학대가 이뤄지는지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런 시설들이 공개적으로 설립됐고 지지 속에서 운영됐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지지는 언론에서도 확인됩니다. 한 가지 신문 기사를 소개합니다.
“거리를 헤매는 부랑아의 수용 문제는 관계 당국의 두통거리가 되는 모양. 서울시내에서 헤매는 부랑아를 잡아다가 천안 방면에 그냥 내버리는 일이 있더니 이번에는 대전 방면에서 부랑아를 실어다가 금산 진해 방면에 내버렸다는 전문. 서울서 천안에 버린 부랑아가 서울로 다시 아니 올라 만무한 것과 같이 대전에서 금산 진해 방면에 버린 부랑아가 다시 대전에 아니 올라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헛수고를 하며 갖다 버린 지방에서는 부랑아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동아일보> 1954년 9월28일)
부랑아를 “버린다”는 표현이 신문 지상에 버젓이 소개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의 인식에 이들은 폐기처분해도 된다는 믿음이 있었고, 보편적 인식 속에서 형제복지원이라는 괴물이 탄생한 것입니다.
소설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시작됩니다. 홀로코스트는 인류에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가진 존재인가? 인간 집단의 광기에 개인은 저항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죠. 저는 형제복지원이 단일 사건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빈곤한 자에게 이뤄진 ‘대 감금’에 대해 우리는 성찰하고 돌이켜봐야 합니다.
미연이 '특별한 피해자'에서 '살인자'로 전환되는 순간도 인상적입니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순수'한 존재로 설정해두고, 그것을 벗어나는 오염의 징조가 보이면 '어떻게 피해자가 그럴 수 있어'라며 순식간에 돌변하곤 합니다. 피해자의 지위까지 박탈시키면서요. 반면 가해자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쁜 놈이니 그럴 수 있지' 식으로 죄를 사해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를테면 법적으로 인정받지 않거나 혹은 범법행위 중 일부라도 유죄가 나오면 '그만하면 됐다'는 식으로요. 1987년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도 그러했습니다.
피해자는 꼭 순수해야 하는가? 저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사람입니다. 피해에는 폭행과 감금과 부조리와 무관심과 냉대, 성폭력 등 수많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피해가 피해자를 파괴시키고 망가지게 합니다. 미연은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자신의 아이에게 강압적인 행동을 하다가 후회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죄책감을 지닌 인물입니다. 미연에게 피해자로서의 순수성은 없습니다.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고, 이 피해에 대해 국가와 공동체가 책임을 져야할 뿐이지, 이 피해자가 순수하지 않으면 피해자로서의 지위까지 박탈돼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원래 다층적이고 입체적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해자를 볼 때 전형적이기를 요구합니다. 왜 도덕적 강박의 프레임 속에서 피해자는 규정돼야 하는 걸까요? 가해자의 대칭적 지점에서 피해자를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해자는 악인이기 때문에, 피해자는 선인이어야 한다는 구도 말입니다. 피해자는 어떤 구도 속에서 위치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2014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농성을 시작한 시기에 기사를 썼고, 2020년 5월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 즈음에 소설을 끝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차례의 고공농성이 있었고 매번 국회 문턱에서 좌절되던 과거사법 개정안이 극적으로 통과됐습니다. 그 희로애락이 소설에도 영향을 줬을 듯합니다.
집중적으로 취재하던 시기와 소설을 쓰던 시기는 구분됩니다. 소설을 쓰면서 몇 번을 엎고 다시 썼는데,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복지원을 바탕으로 소설을 낸다면 사회적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은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사의 재조립으로 소설을 낼 수는 없으니까요. 소설로서의 최선이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10년 이상 기자로 일하며 ‘팩트’에서 벗어난 글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한겨레>에 연재한 ‘형제복지원 3부작’도 형식이 소설일 뿐이지, 한 문장, 한 문장 취재와 조사를 거쳐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기자로 살다가 소설을 쓰려니 상상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이 초반에는 어려웠습니다. ‘글을 쓴다‘는 점에서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녀야만 가능한 세계입니다. 2차례에 걸쳐 1년6개월 휴직을 했고, 휴대폰을 정지시켰고, 집안의 와이파이도 끊었습니다. 농성장과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사람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하나의 ‘소설적 진실’을 만드는 과정이 은희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4번째 버전 만에 이 소설을 내놓아도 작가로서 부끄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올해 5월 출간하게 됐습니다. 2016년 여름에 습작을 시작했으니 4년 만에 소설을 내놓게 됐습니다.
한편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 영감을 받은 예술작품을 접할 때 드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피해자 고통을 소비하는 방식으로만 사용하거나, 결과물에 따른 공이 오롯이 창작자의 몫으로만 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박유리 작가도 형제복지원 사건을 '소설'로 풀어내면서 비슷한 고민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소설을 읽는 일이 타인의 삶에 동참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고통의 당사자라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통에 동참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 고통을 화인처럼 맞아야 글쓰기가 가능할 것입니다.
‘쓴다’는 행위가 저에게는 그런 일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소비하는 방식의 글을 종종 볼 때가 있습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불쾌한 감정이 듭니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렇고, 마음이 담기지 않은 문장의 품질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피해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동시에 소비하는 자인지에 대해 묻게 됩니다. 저 또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쓰는 사람으로서 저의 역할이 무엇인지 자문할 때가 많습니다. 가만히 제 마음을 들여다볼 때 발견하게 되는, 여러 감정들이 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는 이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기자로서 고통의 당사자를 만났을 때, 현장에 갔을 때, 탈고할 때까지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록하는 자’로서의 ‘작은 최선’입니다. 슬픔의 증언을 들을 때 함께 ‘공명’해야 합니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기억을 꺼내놓는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또 다른 고통입니다. 청취하는 자는 그가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들음으로서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피해자에게 다양한 지점이 있듯이 저 또한 그런 사람입니다. 가까스로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됐을 때 누구보다 가슴 벅찼던 시민이고, 제가 쓰는 글이 사건의 해결이나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사회인이고, 저의 글이 다양한 이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조마조마한 신인작가이며, 때로는 1쇄가 다 팔릴지 재고로 남지 않을지 고민하는 생활인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박유리’라는 사람입니다.
원래는 '버려진 사람들'을 주제로 한 사회과학서와 동시 출간할 계획이라고 하셨죠. 그 책과 <은희>는 어떤 결을 공유하고 있나요.
가제를 ‘폐기된 사람들’이라고 지었습니다. 탈고는 했지만, 아직 수정을 마치지 못했기에 올해 하반기에 발간할 예정입니다. 원래는 동시 출간을 목표로 했는데, 몸이 하나라서 시차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책을 비슷한 시기에 집필했는데, 기자로 사회서적을 썼다가, 다시 작가로 소설을 썼으니 전혀 다른 정체성을 동시에 지녀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에는 몇 명의 캐릭터와 특정한 시대가 나옵니다. 이 ‘있을 법한 허구’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지도가 사회서적 ‘폐기된 사람들’입니다. 앞서 질문을 주셨듯이, 형제복지원이라는 괴물이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어떻게 빈곤을 처리해왔는지에 대해 역사적 맥락을 서술하는 한편 시대에 대한 사유를 담고자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이라는 특정 괴물을 뚫고서, 그 시대를, 지나온 한국 사회를 성찰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적극적인 무관심’ 속에 수많은 빈곤이 폐기처분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형제복지원들’을 말입니다.
책에서 단 한 문장을 꼽자면 "사람이 되려고"(154쪽)라는 은희의 말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쓴 장면인가요.
“죽고 싶은 거야?”라는 질문에 은희는 “살고 싶어서”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은희는 죽어가면서 “사람이 되려고”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립니다. ‘무엇이 된다’는 것과 ‘사람’이라는 말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사람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아닌 어떤 위치로 전락할 때가 많습니다.
수용소는 생과 사를 가르기도 하지만, 사람으로서의 지위, 존재를 박탈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수용소뿐일까요? 지금도 우리가 한 사람으로서 어디에서나, 언제나 존재하는지요? 어떤 소속과 직함을 버리고서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지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사람’이라는 지위는 이제 때로는 빼앗기고 쟁취해야 할 그 무엇인가가 되었습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기를 맡기 위해서요.
그러나 태어나면서 사람이었기에 ‘사람으로서의 나’로 존재하는지 잊고 지낼 때가 있지요. 그런 점에서 한종선 생존자 대표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과거의 기억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는 시간이 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힘겨운 여정으로 보였습니다. 이 시간이 저마다 다른 질문을 던졌을 것인데, 저에게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목소리를 갖지 못한, 제 무덤조차 갖지 못한 ‘은희들’에게 이름과 생명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