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제1087호 2015.11.18
‘유서 대필 사건’ 무죄 확정 받은 강기훈이 클래식 기타 잡은 ‘진실의힘’ 연주회. 유신으로 돌아간 듯한 오늘 잊게 하는 정겨운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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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유서 대필’이란 황당한 거짓 혐의를 벗고 올해 5월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무려 24년이 걸렸다. 1991년 봄, 전투경찰이 명지대생 강경대군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화 요구는 잇따른 분신 항거로 이어졌다. “죽음의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짓 선동과 함께 강기훈을 희생양 삼아 민주화 요구를 잠재우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친구 김기설의 분신을 부추기며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는 어처구니없는 혐의. 27살 청년 강기훈은 무죄를 밝히려고 법정에 출두했지만 거짓의 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검찰, 법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그리고 언론. 무고한 젊은이의 일생을 망가뜨린 범죄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단 한 명도 사과하지 않았다.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을 비롯한 조작의 주역들은 오히려 청와대와 국회의 요직에서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들의 거짓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장난 LP처럼 되풀이되는 종북몰이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펼침막에서, 우리는 강기훈을 짓밟은 파렴치한의 얼굴을 데자뷔처럼 떠올린다.
리허설이 끝난 뒤, 강기훈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무죄가 확정됐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답답하구나, 이거 하려고 오랜 세월 기다렸나, 하는 회한도 들었어요. 하지만 음악을 하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제 시간이에요. 나머지 시간은 제 시간이 아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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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로 <일 포스티노>를 다시 연주한 뒤 진실의힘 사무실에서 뒤풀이가 이어졌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긴장된 공식 연주회가 끝나고 뒤풀이에서 막걸리가 한 순배 돌면 진짜 볼 만한 음악회가 열리는 법이다. 강기훈은 <로망스>와 <이별의 전주곡>을 거침없이 연주했고, 이한솔은 <백조>와 마르첼로 협주곡을 멋지게 불어젖혔다. 다음 연주회에서 마르첼로를 제대로 해보자는 다짐도 빠지지 않았다.
어두운 시절이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박동운 진실의힘 이사장은 “유신이나 5·6공으로 돌아간 것처럼 어수선한 시절이고, 나도 재판에서 소멸시효 관계로 보상이 기각돼서 여러모로 착잡하다”고 심경을 밝힌 뒤, “강기훈씨가 옷에 묻은 먼지 털듯 오랜 병고를 툭툭 털고 완치돼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덧붙였다.
속마음 털어놓기를 꺼리는 강기훈도 입을 열었다. “앞으로 좀더 잘 살아야겠네, 날라리지만 약간 덜 날라리처럼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호른을 전공하는 딸 해원도 밝은 웃음으로 함께했다. 아버지 강기훈을 닮아서 입이 무거운 해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오래오래 즐겁게 살자!”
우리 모두를 위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거짓이 진실을 질식시킬 듯한 오늘, 우리는 모두 강기훈이다. 음악이 있고, 마음이 있고, 진실이 폭력보다 강하다는 신념이 살아 있기에 강기훈은 웃을 수 있다.
이채훈 음악 칼럼니스트·<클래식 400년의 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