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해결해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처럼 힘든 상황에서 위로가 되는 말이 또 어디 있으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말이 싫다. 나와 남편과 딸들이 겪는 고통 앞에서 이 위로는 무용지물이다.
남편 김동수 씨가 세월호를 타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반지하 집에서 살았다. 매달 화물차 할부금 140만 원에 두 딸의 교육비에 집세까지 내가며 빠듯한 생활을 하며 살았다. 동수 씨는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화물 기사 일을 했고 나는 평일에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아동복지 교사로, 저녁과 주말에는 독서 논술 교사로 평범한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남편 동수 씨와 제주 사려니숲길로 출근한다. 남편에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삼나무와 각종 나무가 무성한 숲길에 어떤 이들은 일부러 여행을 오고, 어떤 이들은 시간을 짜내어 걷기 위해 오는 곳이다. 탐방객들은 부부가 이런 곳에서 같이 근무를 하니까 너무 행복하겠다고 한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내 마음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남편은 여러 번의 자해와 사소한 갈등들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물론 본인이야 그 거대한 트라우마와 싸우느라 힘들어 그렇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와 딸들도 만만치 않은 트라우마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히 남편은 안전에 관해서는 너무 과하다고 할 정도로 예민해서, 숲길에서 근무하면서 크고 작은 민원들도 많이 발생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근무를 하면서 내 신경은 온통 남편에게만 집중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지인들이 김동수는 사려니 지킴이, 김형숙은 김동수 지킴이라고 하겠는가.
언제부터인가 내 입에서는 죄송하다, 감사하다는 말이 자동으로 나오게 된다. 남편이 누군가와 갈등을 빚어 문제가 발생하면 ‘남편이 트라우마 환자라서 그렇다,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고 말한다.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굽신거려야 하고 경찰이 출동하면 내가 빌어야 하고, 도움받은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하고, 남편이 입원하거나 남편 앞으로 민원이 들어오면 담당 주무관과 과장님께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것이 일상이 돼 버렸다.
그날 남편이 세월호를 타지 않았더라면, 아니 구조 현장에 있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동창회 모임은 안 간 지 오래고 남편 동창회 모임,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더 많이 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은 전부 남성이라 언젠가 참석한 총회에서 나 혼자 여자라서 뻘쭘한 기억이 있다. 지금은 어쩌다 내가 빠지면 왜 아내는 같이 안 왔느냐며 안부를 물을 정도다. 남편은 동창회도, 친구들 모임도 가라고 하는데 남편을 혼자 두고 가면 내 마음이 불안하다. 불안한 마음으로 가느니 남편을 내 레이더망(?)에 두고 보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더 편해졌다.
얼마 전 어느 단체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간담회를 했는데, 내게 남편을 누군가 잘 돌봐주고 개인적인 시간 일주일을 준다면 무얼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청와대 앞에 가서 남편을 도와달라고 1인 시위도 하고 이곳저곳 시위현장도 가서 목소리도 보태고 싶다고 했더니, 왜 본인이 아닌 남편을 위한 시간이냐고 했다.
지금은 남편을 진료하는 교수님께 나도 같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다. 상담을 하다 보면 항상 ‘김동수’ 얘기만 하고 있다. 교수님은 “김형숙 님 진료를 하는데 우리는 김동수 님 이야기만 하고 있네요”라고 말해서 서로 웃은 기억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돼 버렸다. 지금은 내 삶은 없다. 오롯이 나 김형숙의 삶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더라도 동수씨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 사람인들 그렇게 살고 싶을까? 온갖 정신과 약에 의존해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삶.
세월호 참사 초기, 의인이니 영웅이니 칭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당시 동수씨에게 트라우마가 올 수 있으니 잘 지켜봐야 한다고 했던 지인의 말을 비웃으며 흘려들었던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마라톤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과 신실한 성도만이 한다는 방언기도를 하는 내 남편 김동수에게 트라우마가 찾아오리라고는 그 당시 짐작도 할 수 없었기에.
무엇보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하다못해 희귀병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서로 아픔을 공유하며 지낸다는데 나는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기에 남편의 돌발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늘 전전긍긍해야 했다. 또 누군가는 그래도 남편은 살아왔지 않냐, 자식을 잃은 사람도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힘드냐고 한다.
항상 유가족의 아픔이 먼저인 상황에서 생존자 가족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처럼 들리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이야기할 때 눈에 보이는 상처가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너무 공감되는 말이다. 그래서 초창기에 남편의 트라우마 치료도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아쉽고 더 힘들다.
이제 다시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남편도 이전의 내 남편 김동수, 내 딸들의 아빠 김동수로 돌아갈 수 없다. 왜 남편이 이러지 왜 아빠가 달라졌지 라고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 어느 날 딸들이 얘기하듯이 아빠를 이해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정답인 것 같다. 가끔은 남편이 지금처럼 견디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 상황을 다 지켜보고도 온전한 정신으로 버텨주는 것이 대단하다고 말이다.
오늘도 남편은 약을 복용하고 눈이 풀린 채 먹을 것을 찾는다. 몸무게가 사고 이전보다 10kg 이상 늘었다. 남들은 건강해졌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이 너무 듣기 싫다. 정신과 약을 복용한 후에는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말릴 수도 없다. 하지만 살이 찌면 어떻고, 정신이 깜박깜박하면 어떤가? 당신은 소중한 생명을 살린 우리들의 ‘히어로’이기에 그저 나와 딸들 곁에서 오래오래 있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