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사는 세월호 의인 김동수씨의 부인 김형숙씨가,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는 김동수씨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그날의 기억, 아프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기억한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앞두고 한 달 전쯤 동수씨 진료가 있는 날이라 같이 따라갔다. 평소에는 진료실에 동수씨 혼자 들어간다. 아내인 내게도 하지 못하는 말이 있을까봐 나는 늘 그 자리를 피했는데, 그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사가 내게 들어오라고 했다. 담당 의사는 '몸이 기억한다' 며 동수씨를 살폈다. 스스로 발버둥치며 이겨내고 싶어도 그날의 일을 몸이 기억하는 이상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의사의 우려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7주기 한 달 전부터 시작된 동수씨는 짜증이 늘고, 예민하고, 무엇을 해도 즐겁지가 않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반갑지가 않은 채 자신만의 성에 갇혀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켠엔,

7년이나 지났는데 설마 올해는 무난하게 보내지 못 할까하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4월 9일 동수씨는 큰딸과 함께 대구에 사는 작은딸을 보러 갔다. 딸들과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면 그래도 조금은 4월 16일을 수월하게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만든 자리였다. 올해는 국가소송을 위한 기자회견도 있고, 언론에 우리 가족 이야기가 기사화 되기도 해서 동수씨의 마음도 좀 편안해졌으리라 짐작했다. 4월 11일 아침 큰딸이 먼저 집에 왔고 동수씨는 작은딸과 하루 더 보냈다. 작은 딸이 보낸 사진을 보면서, 역시 딸이랑 있으니 동수씨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날 저녁 동수씨는 늦은 비행기로 도착했다. 공항에서 만나 '딸이랑 만나 좋았어?'하니 '응..'하고 한마디 대답을 한다. 대구에서 같이 먹으려고 사왔다며 특이한 김밥들도 꺼냈다. 식탁에 앉아 가까이 보니 동수씨 얼굴이 너무 안 좋았다. ‘종일 딸이랑 돌아다니고 비행기까지 타고 왔으니 피곤한가 보다’ 하고 휴식을 권했다. 동수씨는 보통 9시쯤에 수면제를 복용하고 누우면 11시쯤 잠이 드는데, 그날은 9시 30분쯤 약을 먹고 10시 30분쯤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동수씨는 일찍 일어나지 못 했고, 나는 반려견들을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 평소에도 아침에는 약기운에 비몽사몽하는 동수씨이기에 당연한 모습이라 생각했다. 참사 이전엔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고, 청소하고, 세차까지 깔끔하게 하던 그였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예 일어나지를 못 했다. 출근 시간이 다 되어서 억지로 깨우는데 몸은 축 늘어지고 반응을 안 하는 것이었다. 순간 아찔한 생각에 떨리는 마음으로 약봉지를 보니 남아있어야할 일주일 분량의 약이 하나도 없었다. 몇 알을 먹었는지 가늠조차도 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도 화장실을 가고 싶다하여 겨우 끌고 갔다. 볼일을 보게 하고, 대강 씻기고 옷 갈아입힌 후에야 큰딸을 깨워 불렀다. 상황 설명을 하고 응급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119를 부르자니 또 여기저기 소문이 날 것 같기에 딸이 운전해서 가기로 했다. 몸이 축 늘어지니 여자 둘이서 차까지 데려가기도 쉽지가 않았다. 겨우 차에 눕히고 우리는 다시 집에 들어와 병원갈 준비를 했다.

문득, 너무나 차분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 딸과 나의 모습을 보았다. 서로 무엇을 챙길까 물어보지도 않고, 각자 자신의 준비해야할 것들을 너무도 차분히 챙기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이런 일을 겪었으면 이제는 그리 놀라지도 않고 이렇게 대처할 수 있는 걸까? 이젠 시댁과 친정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고도 척척(?) 해결을 한다.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응급실에서 10시간 가까이 보낸 후, 동수씨가 100알 이상의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입원 결정을 했지만 코로나 검사의 의무화 때문에 우선 퇴원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틀 만에 입원을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병실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다. 적어도 병실에서는 동수씨에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그렇게 동수씨는 아니 우리는 일곱번 째 맞이하는 4월 16일도 병원에서 보냈다. 몸이 기억하는 한 동수씨가 참사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제 더욱 강력하게 깨달았다. 그러고보면 주변에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신 분들이 그 시기가 오면 몸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기에 앞으로 남은 과제들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번 더 깨달으며 또 있는 그대로의 남편과 아빠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할 뿐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가 지겹다하고 잊으라 한다. 이미 우리 가족들 글에도 악성 댓글이 벌떼처럼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주위에선 신경쓰지 말라고 하지만, 씁쓸한 마음을 가실 길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기에, 동수씨는 우리 마음속 영원한 의인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 동수씨가 이겨내고 싶어도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힘들다, 주위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담당 의사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한번 더 이해해주고, 한번 더 보듬어주고, 한번 더 같이 울어주는 마음이 그 남자에게는 더 필요하지 않을까?